사진 잘 찍는 법
내 사진동무는 자기 홈페이지 프로필 난에 이렇게 써 놓았다.
‘저는 아직 빈 껍데기만 찍고 있는 모자란 사진가입니다.’
그 글을 볼 때마다 나는 진심으로 그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통념은 ' 좋은 사진이란, 좋은 형식과 좋은 내용을 갖춰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그런 사진을 거의 못 본 것 같다. 어떤 사진에서는 형식만 보였고, 다른 사진은 내용만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형식과 내용이 잘 어우러질 때 또는 그런 글을 써낼 수 있을 때 군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사진에 적용하면 형식과 내용이 잘 어우러지고 새로운 세계를 가리키는 힘이 있는 사진이 좋은 사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일반인은 형식에 집중하지만 작가는 내용과 형식의 일체를 추구합니다. 형식 자체는 쉽게 배울 수 있습니다. 그 정도 수준은 인터넷을 통해서도 익힐 수 있습니다. 너무 많이 보아왔고 낯익기 때문입니다. 또한 흉내 내기도 쉽습니다. 한국 아마추어사진의 현주소는 여전히 형식미의 완성만을 추구하는 중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홍희. 사진 잘 찍는 법. p18) ]
대게 풍경사진에서는 형식만 보였고, 보도사진이나 다큐멘터리사진은 내용만 보였다. ’내용과 형식의 일체‘라는 말도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풍경사진에서는 대부분 ’내용‘이 없거나, 있다 해도 뒤에 따로 덧붙여져서 사진이미지와 완전히 별개로 존재했고, 보도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사진에서는 내용이 전부이고, 형식은 거의 겉치레나 들러리에 불과해 보였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진의를 의심했다.
<배병우>와 <마이클케나>의 풍경사진이나 <랄프깁슨>의 감각적인 스냅 풍의 사진들은 형식미가 뛰어나지만, 내용은 거의 없거나 빈약했다. 내가 보기에 그 사진들은 명백히 아름다운 그림이거나 세련된 도안(圖案)이었다. 사실 거기서 ‘새로운 풍경의 발견’이라는 의미 외에 ‘내용’이라고 볼만한 요소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풍경사진에서 ‘의미나 내용’을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굳이 그런 것이 필요하다면, 사진가 스스로 혹은 비평가나 관람객들이 각자의 인문학적 지식을 동원해서, 의미를 부여하거나 내용을 만들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배병우의 소나무사진은 사진 속 소나무가 ‘한국적인 소재‘라는 데 착안해서 그럴듯한 내용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혹은 이른 새벽의 짙은 안개 속에 소나무가 서있는 풍경에 담긴 신비로움의 정서를 이용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아니면 그런 멋진 풍경을 발견한 사진가의 열정과 고난에 대한 이야기가 사진의 내용으로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경우 ’사진의 내용‘은 형식을 통해 창조된 게 아니고, 내용이 형식과 무관하게 따로 존재할 뿐 아니라, 사진을 찍은 뒤에 임의로 갖다 붙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풍경사진에서 말하는 ’사진의 내용‘이란 주로 그런 식이었다.
풍경사진과 반대로, <로버트 카파>의 보도사진이나 <최민식>의 다큐멘터리 사진에는 훌륭한 메시지가 담겨 있지만, 형식면에서는 내 미적 감수성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사실 그 분야의 사진들은 주로 ‘무엇이 찍혀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어떻게’는 사소한 문제였다. 때로는 예술적 형식미가 도리어 사진에 방해가 되기도 했다. 솔직히 나는, 보도사진이 완벽한 형식미를 갖추고 있으면, 혹시 연출되었거나 진실이 왜곡되지 않았을지 의심스러웠고, 참혹한 광경이 찍힌 다큐멘터리 사진이 지나치게 아름다우면, ‘가증스럽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그런 사진은 형식을 (아름다움보다는) 기능면에서 봐야하겠지만, 그 부분도 별로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튼 중요한 건 '사실'이고, 형식이 내용을 창조한 게 아닌 건 틀림없다.
나는 전시회용 사진을 고르거나 인터넷에 사진을 게시할 때마다 골머리가 아팠다. 남에게 사진을 보여 주려다보니, 무슨 ‘명분이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왠지 모르겠지만, 아무 말 없이 사진만 덜렁 내 놓기에는 좀 멋쩍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제목을 짓고 캡션을 쓰려고, 찍을 때는 고려하지도 않았던, 사진의 내용을 그제야 부랴부랴 생각해내려고 들었다. 하지만 갖고 있지도 않은 걸 보여줘야 할 상황이어서, 새로 지어내야 했고, 어렵고 당혹스러웠다. 사진의 내용은 대게 급조되었으며, 대부분 허위이거나 과장이었다. 의도하지도 않았던 것을 마치 의도했던 것처럼 말하게 되어 양심에 거리낌마저 느껴졌다. 마치 내가 허풍선이나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아마추어사진가들도 사진의 ‘내용’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말 그대로, '형식미의 완성'만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뒤에 내용을 붙이느라 고심했다. 그래서 나는 ‘형식+내용’을 강조하는 비평가나 직업사진가들이 쓴 책을 읽다 보면 이런 걱정이 들었다. 처음부터 내용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형식미에만 관심이 있는 나와 내 아마추어사진동무들은 필시 언제까지나 초보자 수준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늙은 아마추어사진가가 산전수전 겪으며 수십 년간 사진을 찍고도, 여전히 직업사진가들의 충고와 강의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만년 학생‘으로 남아 있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식으로도 생각해 보았다. '다만 우리가 사진의 본성에 더 충실한 방법을 택했던 건 아닐까?'
사진은 어떤 생각을 품고 의도대로 뭘 만들어 내기보다 그저 세상의 볼거리를 포착해서 타인과 공유하는 수단으로 쓰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리고 사진에서 ‘형식+내용’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며, 단지 자기가 하는 일이 좀 더 가치 있는 것이기를 바라는 직업사진가들이나 품을 만한 '억지스러운 꿈' 같은 게 아닐까. 그래서 나와 내 아마추어사진동무들은 알아야 할 걸 모르거나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굳이 그 사람들의 불가능한 꿈에 부응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어떤 방법이 취향에 잘 맞지 않고, 별다른 의미도 가치도 느끼지 못하기에 무관심한 것뿐일 수도 있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대중음악을 폄하할 수도 있겠다. 거기 좀 더 차원 높은 즐거움이 있지만, 일정한 소양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그걸 즐길 수 없다는 식의 주장도 있다. 하지만 대중음악에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고, 음악을 즐기는 문화의 한 부분이다. 더욱이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굳이 클래식이 더 고상하고 격이 높다고 해서 클래식을 배우거나 그쪽을 동경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사실 나는 사진에서 이런 비유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지만, 십분 양보해서 한 번 비유를 해보는 것이다. 사진에서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들이 자꾸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의 우월성은 그 복잡하고 정교한 형식에 있지 그 내용에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형식이 복잡하다보니 구현하기도 어렵지만, 일반대중이 접근하기 힘들어서 (그 분야 전문가와 애호가들이)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젠체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클래식 음악의 운율이 잔망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고, 격조 높은 예술로 인정받는 오페라나 발레의 과장된 표현과 제스처가 몹시 유치해 보이기도 한다. 꿈이 많던 어린 시절에는 막연히 동경했지만, 그런 것을 즐기기에는 이제 내가 너무 노회해 버린 것 같다. '현실적으로 변해간다'고나 할까? 세상을 배우게 되면 황당한 꿈은 점차 줄어들기 마련이다. 유행가가 마음에 쉽게 다가오는 반면 클래식은 (리얼리티가 모자라고 피상적이어서) 내 감정에 잘 파고들지 못하는 것 같다. 게다가 보는 관점에 따라서 클래식 음악이 유행가보다 훨씬 더 감정표현이 과장되어 ‘신파조’로 비칠 수도 있는 문제다. 사실 어떻게 포장을 하는 지, 표현의 기교면에서 차이가 있을 뿐, 그 안에 포함된 정서는 본질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핵심은 정교하고 치밀한 형식에 있는 것이다.
아무튼 내 생각에는 나와 내 아마추어사진동무들이 형식주의자가 되어 내용 없는 사진을 찍는 것은 ‘잘 못한다거나 열등해서'라기 보다는, 사진 본연의 속성에 더 충실하기 때문이지 싶다. 그러니까 굳이 깊이나 내용을 강요해서 우리를 압박하는 말들에는 그다지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물론 그래도 늘 같은 것만 답습할 게 아니라, 약간 새로운 것에도 눈을 돌릴 필요는 있겠다. 언제까지나 남의 흉내만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사진 이미지를 보는 취향 문제에 대해서도 한번쯤 되새겨 볼만한 부분이 있다. 마이클케나의 세련된 흑백 풍경사진에 비하면 아마추어사진가들이 찍는 컬러풀한 풍경사진이나 화사한 꽃 사진을 ‘유치하다’거나 ‘격이 낮다’는 식으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아름다움을 보는 시각이 아직 '덜 성숙했다'는 뜻이다. 혹은 ‘식상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너무 많이, 자주, 반복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우열의 문제라기보다 ‘관심의 방향’에 관한 문제이고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특히 사진에 내용이 있거나 없는 문제는 아니다.
사진은 좀처럼 의도대로 찍히지 않았다. 나는 꽃 사진을 찍으러 야외로 나갔다가 꽃이 핀 상태가 마땅치 않으면 들판의 풍경사진을 찍어왔고, 은행나무 숲을 찍으러 공원에 갔다가, 빛이 비치는 상태가 좋지 않으면, 식물원에 들어가서 열대식물 사진을 찍어왔다. 햇빛이 강한 맑은 날은 시내 길거리로 나갔고, 흐린 날은 주로 강가로 나갔다. 나는 되도록 피사체가 놓인 외부상황에 순응했고, 사진은 대체로 처음의 의도와 별 상관없이 찍히곤 했다. 오히려 나는 사진을 찍을 때, 내가 가진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늘 궁금했다. 또한 의도한대로 제작되지도 않은 결과물을 두고 ‘의도가 무엇’이라고 말하는 건 사리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해외여행을 가서 찍어온 사진을 볼 때면 나는 늘 어떤 아쉬움을 느꼈다. 중요한 장소나 의미 있는 장면들이 사진에 없었던 것이다. 반대로 별 쓸모없는 장면이 너무 많이 찍혀 있기도 했다. 나는 빛이 좋지 않으면 좀처럼 카메라를 들지 않았고, 빛이 좋으면 셔터를 마구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 사진영상에 나타날 감각적 아름다움을 고려하느라 많은 걸 놓쳤던 것이다. 그래서 막상 (여행기를 쓰는 등) 사진이 필요할 때 아쉬움이 컸다. 그 뿐 아니라 조화로운 형식미를 위해 앵글과 프레임을 조절할 때 정작 중요한 것들을 화면 밖으로 빼내버리기도 했다. 사진의 내용을 염두에 두면 형식미는 미흡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형식미가 미흡한 사진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
실제로 사진을 찍는 순간에는 거의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카메라 앞에 놓인 외부세계를 살피는데 몰두하다보면 다른 데 정신을 팔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미리 준비한 의도를 떠올리거나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행위 같은 것은 사진을 찍는 데 방해가 될 뿐이었다. 처음에 생각했던 목적과 의도 또는 어떤 방향성이나 가치판단 같은 건 다 사라지고, 나는 오직 '그림'만 바라보게 되었다. 의도가 반영된 부분은 고작해야 찾아간 장소와 대상 정도였고, 카메라에 담기는 디테일은 내용과 무관했으며, 사진은 거의 형식적인 면만 고려한 상태로 찍혔다.
[ 대상의 가치를 따지기 전에 그저 시선을 끄는 것을 향해 셔터를 누릅니다. 그 다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결정하는 과정이 편집과 인화입니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 때는 최대한 ‘백치’상태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와, 이게 뭐지? 멋지다. 저 나무덤불에 떨어진 빛을 봐! 저 사람의 손 모양 좀 봐!” 이런 식입니다. 그저 바라보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 p41) ]
미리 구체적인 목적과 의도를 품고 그에 맞춰서 촬영하는 방식은 효율적이지 않았고, 그런 방식으로는 내가 ‘원하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오로지 형식미만 원하는, 막무가내 식의 감각적 욕구와 충돌하기 때문에, 그러려고 해도 잘 되지도 않았다. 게다가 나는 ‘내 의도대로 표현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시작 전에, 이미 내가 가진 의도는 카메라와 피사체의 한계 안에 갇혀있었다. 피사체가 있는 외부 상황을 고려해서 안 되는 건 처음부터 포기했고 되는 방식으로만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없었고 좋은 그림을 만들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기회가 있을 때 가능성이 보이는 것들을 ‘일단 찍어두는 방식’으로 대처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찍을 때는 그 사진이 ‘뭐가 될지 모르는 상태’였고, 아무런 내용도 의미도 포함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뒤에 그 무의미로 인해 고민해야했지만, 별 도리 없었다.
[ 훌륭한 사진은 사진가의 의도와 목적을 궁금해 하는 퍼즐이 아닙니다. 훌륭한 사진은 황금 비율 같은 디자인과 균형의 다양한 보편 법칙들을 가지고 선이나 모양을 만든 것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랄프 클레벤저. 크리스 오르위그의 소울포토 p285) ]
나는 ‘형식을 찍느라 바빠서 내용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점에 아쉬움을 느끼면서 뭔가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끔 미리 어떤 의도를 품고 사진을 찍으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한데 생각해 보니,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문제인 것 같다. 사진은 ‘실물을 포획해서 틀에 대고 찍어내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뭘 ‘찍어내려면’ 원하는 대상이 존재해야 하고, 사진을 찍는 순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그게 놓여 있어야만 한다. 말하자면, 눈앞에 없는 것은 찍을 수 없고, 바람직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바람직한 사진으로 찍을 수는 없는 문제였다. 나는 '선택'할 수 있고, 약간 '조절'할 수는 있지만, 그림을 그리듯이 내 의도대로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면 의도는 카메라 뒤에 숨어버렸고 (의도대로 할 수도 없는 일에 굳이 의도를 품을 까닭이 없었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의도가) 내게서 점차 사라져갔다. 나는 세상을 뒤져서 아름다운 선이나 모양을 찾아내는 탐색로봇이 되었다.
적절한 시기와 조건이 맞아 떨어지면 셔터를 눌러서 일단 사진을 찍고 봐야했다. 주어진 것 외에 다른 의미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올바른 방법을 알아보려고 책을 읽고 전문사진가들의 전시를 보면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때로는 비답(批答)을 찾았다고 기뻐했지만, 막상 책을 덮고 생각해 보니, 알게 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좋은 사진에 대한 그럴듯한 암시들은 대부분 쓸모 있는 답들이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사진은 ‘기회에 관한 문제’이고, 사진가가 내용을 위해 형식에 개입하면 결국은 '사진의 본성'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는 문제 같았다. 물론 '사진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입장은 사진가들마다 다르겠지만, 내 관점에서 볼 때 그렇다는 얘기다.
아주 간단한 이치였다. 다른 예술작품들은 사람의 창의적 상상력을 활용해서 창작자의 의도대로 마음껏 제작할 수 있지만 사진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찍을 대상’이 필요했고, 대상이 ‘내가 원하는 상태’로 보이는 순간에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이런 점이 나를 점점 더 피동적인 입장에 놓이게 만들었다. 나는 갈수록 카메라의 방법과 그 한계 안에 갇혀서 기계적 제약과 외부세계의 상황에 의존적으로 되어갔다. 그건 물론 카메라가 그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그림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대상에 끌려 다니면서 기회가 왔을 때 셔터를 눌러서 사진을 찍어야 하다 보니 나는 내가 품은 목적과 의도에 맞춰서 마음껏 창작행위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형식+내용’은 사진을 대하는 나의 그런 태도와 방법을 부정하는 개념이었다. 그건 역시 자기 사진이 예술작품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일부 사진가들의 희망사항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탁상공론이나 비현실적인 얘기 같고 순리에도 잘 맞지 않았다. 실제로 그 사람들이 '의도에 따라 제작한 형식'이라고 주장하는 사진을 들여다 봐도, 나는 그 안에서 어떤 내용도 볼 수 없었다. 의도는 빤했고(역시 형식미), 내용은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결국 사진은 ‘형식을 찍어서 내용을 보여주는 식’이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내용이 필요하다면, 사진의 내용은 어차피 뒤에 따로 부여할 수밖에 없는 문제일 터였다.
심지어 이런 의심도 들었다. ‘형식+내용’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진을 두고 그렇게 말하는 걸까? 혹시 기본적인 분류조차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모든 사진을 뭉뚱그려서 말했던 게 아닐까? 물론 거기서 염두에 둔 사진은 ‘예술작품으로서의 사진‘일 것이다. 기록물로서의 사진이라면 사진가가 내용에 대해 운운할 이유는 없다. 그 때는 내용을 인위적으로 건드리면 위조나 변조가 될 뿐이다. 한데 그렇게 한정하지 않고, 사진을 일반화해서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혹시 그건, 일부러 논지를 흐릴 목적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래서 ‘아마추어사진가나 비전문가들과 자기들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다‘는 불순한 동기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 온몸과 마음을 다해 사진의 본질 즉 예술의 본질에 가 닿으려고 노력을 해보았거나 닿아본 사람만이 형식과 내용을 일체화하는 법을 전수해 줄 수 있습니다. 도제교육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형식이 훈련된 언어라면 내용은 비명 같은 구음이기 때문입니다. 구음은 어느 민족에게나 통하는 또 하나의 언어입니다. 이것은 이심전심으로 전해집니다. (김홍희. 사진 잘 찍는 법. p19) ]
‘좋은 사진 = 형식+내용‘ 이라는 논리는 통념에 속해서,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런 관점에는 ’사진을 부정하는 논리‘가 끼어있다고 믿는다. 형식과 내용이 일체가 되려면 형식을 만들 때 내용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갖다 붙이기‘ 식이 되어, 둘이 서로 잘 붙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 말은 '사진을 찍을 때, 내용도 고려해야 된다'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한데 문제는 ‘실제로 그게 가능하냐‘는 데 있다.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그게 근본적으로 사진에 ‘잘 맞지 않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그런 방식은 도무지 사진답지 않은 것 같다. 뿐 아니라, 나는 아직 남의 사진에서 ’비명 같은 구음‘ 같은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물론 사진은 세계에 대한 함축적인 메시지를 담을 수는 있다. 좋은 사진은 질문을 유발한다. 굶어 죽어가는 사랑스러운 아기사진을 보면 누구나 충격을 받는다. 이 풍요로운 세상에서 왜 아이는 저렇게 방치 될 수밖에 없는 걸까? 하지만 우리를 자극하는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사진이 아니라 사진에 찍힌 그 현실이 내포한 내용일 뿐이다. 예술사진은 그렇게 구체적 현실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예술품은 인간이 만들어낸 창작물이지 어디에 있는 걸 가져온 건 아니다. 예술사진은 예술이 되기 위해 현실을 버린 사진이다. 현실이 제거되면 남는 것은 환영(幻影)뿐이다. 우리의 정서를 자극하는 현실세계에 담긴 메시지가 사라지면서 '그림'이 남는 것이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제작된 그 그림에는 생명력을 느낄 수가 없다. 구체적인 현실세계를 표방하지도 않는 사진에서 어떻게 '비명같은 구음'이 가능할까?
혹시 모호성에 기댄 것은 아닐까? 이른바 ‘신비주의’같은 것이다. 보도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사진처럼 사진의 내용이 카메라 앞에 놓인 현실 그대로의 것이라면, 굳이 (형식+내용처럼) 그렇게 모호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반대로 그림(사진이미지 그 자체)에 내용이 담겼다고 주장하려면, 사진에 작가의 의도가 충분히 반영되어야 하고 그런 방식으로 사진이 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방식(예를 들어, 개념예술로서의 사진이나 그리고 만드는 방식으로 제작되는 사진)은 대게 사진 본연의 속성에 잘 어울리지 않고, '대체 무엇이 사진인가?' 식의 또 다른 질문만 불러들인다. 연출이나 아이디어가 핵심이 되고, 사진은 결국 뒷전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은 사람들이 그런 개념을 잘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왠지 나는 그게 약간 '어긋난 현상'처럼 보인다.
아무튼 누군가 모든 사진을 뭉뚱거려서 '형식+내용'을 강조하면, 나는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의심하게 된다.
‘어떤 사진은 형식뿐이고, 어떤 사진은 내용뿐이다.’
그리고 또 다른 사진은
‘형식과 내용이 있지만 그 둘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
'만일 그 둘을 이음새 없이 매끄럽게 엮어낼 필요가 있다면, 그런 능력은 사진과 크게 관계가 없는 별개의 것이다.'
이게 지금까지 사진에 대해 내가 가진 식견의 수준이고, 내 사진의 현주소일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잘 엮을 줄 모르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의도를 사진에 표현해 내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