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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May 03. 2024

좋은 시민과 좋은 사진가

사진솜씨에 대한 변명

나는 늘 ‘내가 좋은 시민이 될지 좋은 사진가가 되어야 할지’를 두고 고민했다.


서울숲 튤립정원


누가 내 블로그에 걸린 사진을 보고 ‘사진이 별로잖아’라고 말하면, 나는 좀 억울한 마음이 들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실제로는 내가 사진을 좀 더 잘 찍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기 작품을 남에게 보여줄 때는 최선을 다해서 얻어낸 성공작만 골라서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건 아직 내 솜씨를 제대로 발휘해서 찍은 사진이 없어서다. 그리고 솜씨를 완전히 발휘할 수 없었던 주된 원인은 ‘내가 남을 배려하는 착한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특히 피사체를 향한 경쟁이 치열한 요즘 같은 시절에, 양보와 배려는 미덕이 아니고, 착한사람은 절대로 좋은 사진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사진가는 자기 앞의 화단을 노려보며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좌우로 약간 걸었고, 앉거나 일어섰고, 간혹 앞뒤로 이동해서 거리를 조절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눈은 계속 화단을 향했다. 다만, 수시로 카메라를 들어 올려 뷰파인더 안을 들여다보며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몰두해서 사진을 찍느라, 그는 자기 주변상황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은연중에 남들에게 폐를 끼치고 있었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고,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어떤 사람 옆에 나란히 서거나, 등에 진 배낭으로 남을 툭툭 치고 다녔다. 자기가 그러는 걸 까맣게 몰랐지만 나는 그 광경을 다 보고 있었다. 나는 ‘모르는 그’가 안타까웠다.     


그 분은 분명 뭔가에 꽂혀있었다.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화단 앞에 쪼그려 앉은 채, 몇 분이 지나도록 꼼짝하지 않았다. 앞에는, 호수 건너 풍경을 배경삼아, 튤립이 여러 송이 피어 있었다. 탁 트인 배경 앞에 역광으로 빛이 들어 환하게 밝혀진 꽃송이가 눈길을 끌었다. 바람이 불면 꽃이 흔들렸고 바람이 잦아들면 흔들림이 멈췄다. 그가 원하는 장면이 흔들리는 꽃송이인지, 흔들리지 않는 꽃송이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광경은 누가 봐도 매혹적인 풍경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나직하게 탄성을 질렀다. 그 중 몇몇은 자기들도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기다려도 그는 일어날 낌새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포기하고 그냥 갔다. 나는 누군가 그에게 다가가서 ‘왜 혼자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느냐?’며 항의할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오래전에 생긴 일종의 ‘사회현상’이지만, 사진은 이제 각광받는 레저활동으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알려진 촬영지에 가보면, 너무 많은 사진가가 몰려와서 붐비는 통에, 차분하게 뭘 할 수가 없다. 주말과 공휴일에만 그런 것도 아니고, 성수기나 비수기도 없는 것 같다. 성별과 나이도 다양해서, 젊은 층도 있고 나이든 분들도 많이 보인다.     


삶에서 포기하고 지냈던 것들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다. 생활에 여유가 생겼거나 아니면 남은 시간을 헤아리다가, 어떤 절박감을 느꼈을 때 그럴 것 같다. 그러면 뒤늦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할 만한,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아마 그 때 제일 쉽게 선택하는 종목이 바로 ‘사진’인 것 같다.     


기예(技藝)에 속하는 대부분의 활동에는 제법 높은 진입장벽이 세워져 있다. 그 놀이를 즐기려면, 일정한 수련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놀이에 맞는 몸을 만들고, 필요한 지식을 머리에 새겨야만 비로소 즐길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쉽게 떠오르는 예로, 악기연주나 그림그리기나 글쓰기 등이 그렇다.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즐길 수가 없고, 미리 준비된 경우가 아니면 익히기도 힘들다. 끈기있는 노력과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하모니카를 시작했다가 포기했듯이, 삶을 풍요롭게 해줄 대부분의 기예활동들은 문외한이나 나이든 사람들이 새로 시작하기에 쉽지 않다. 하지만 사진은 그렇지 않다. 장비를 갖추고 그 사용법만 익히면 누구라도 곧 바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내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선택하는 이유는 (퇴직한 직장인들이 너도나도 프랜차이즈 치킨 집을 차렸듯이) 진입장벽이 낮아서 일 것이다. 아마 그래서 사진인구도 급속하게 늘어났지 싶다.     



때로, 사진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기회’라고 봐야 한다. 기술은 기회를 확보한 다음에나 작용할 수 있고, 그마저도 상당부분 장치에 흡수된 채 자동화되어 있다. 따라서 숙련되지 않은 사람이라도, 좋은 피사체(기회)를 만나기만 하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 가능성이 많은 사진가들을 열정에 들뜨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피사체를 선점하고 좋은 위치를 차지하려는 경쟁이 생길 수밖에 없고, 참여하는 인구가 늘면서 경쟁도 치열해졌다.     


늘 그렇듯이, 과도한 열정과 경쟁은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다. 이제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좋은 사람이기는 포기해야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된 것 같다. 이런 와중에, 나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사진은 포기하는 축에 속한다'고 스스로 믿는다. 물론 이 말이 사실인지 나는 잘 모른다. 확인하려면 남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이야기의 요지는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고, 그 때문에 내 사진이 미흡하다고 스스로 믿는다는 점이다.     


사람이 붐비는 사진촬영지에 가면, 나는 차마 다른 사진가들 사이에 무리해서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다. 남들 앞으로 나서면, 시야를 가로막게 될까봐, 앞쪽으로 나서지도 못한다. 그래서 주변을 빙빙 돌다가 자리를 찾지 못해, 포기하고 다른 포인트를 알아본다. 하지만 그 자리에 사람이 붐비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내가 찾은 다른 장소가 그곳보다 더 나은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지 않다면, 맛 집에 줄을 서듯, 거기 그토록 심하게 사람이 붐빌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인터넷에 모든 정보가 공개되어 좋은 촬영포인트를 독점하는 일도 거의 불가능한 시절이다.     


내가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옆에 누가 다가오면, 충분히 찍지 못했어도, 나는 일단 물러난다. 혹시 그 사람도 나와 같은 걸 찍고 싶어 할지 몰라서다. 내게 좋은 것은 남에게도 좋을 것이고, 그런 걸 내가 독점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혹시 남들이 사진을 찍는데 내 행동이 방해가 되지는 않는지 주변을 살피느라 오래 집중하지 못한다. 그렇게 남의 의사와 심기를 살피면서 배려하고 눈치를 보다보면, 사진은 바쁘게, 적당히, 대충 찍게 된다. 나는 ‘좋은 사진을 찍는 것’보다 ‘남들에게 욕을 먹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한 것 같다.     


아무튼 나는 경쟁을 포기한 셈이고, 원하는 사진을 찍지 못했고, 거의 항상 차선의 사진만 찍어왔던 것 같다. '경쟁'은 물론 기회를 얻기 위한 경쟁이고, '기회'란 좋은 피사체를 좋은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말한다. 사진에서 ‘기회의 문제’가 내 마음 속에서 유난히 부각되었던 건, 사진을 찍을 때마다, 늘 그 부분이 가장 아쉬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눈으로는 멋진 광경을 보면서 정작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지 못했을 때, 나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혹은 ‘더 좋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며 속으로 안타깝게 되뇌었다.  

   

좋은 피사체 앞에서 완벽한 위치를 잡고, (장치와 빛을 위시한) 제반 조건들을 충분히 검토해서, 사진을 찍는 기회를 잡을 수만 있었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진가와의 피사체 경쟁에서 물러섰을 뿐아니라, 피사체가 될 인물이나 주변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미적거리다가 좋은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고는 지금 그 탓을 하면서 사진을 못 찍는 데 대한 변명거리로 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늘 ‘내가 좋은 시민이 될지 좋은 사진가가 되어야 할지’를 두고 고민했다. 사실 사진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피사체를 향한 집중력과 끈기는 사진의 미덕이고, 좋은 사진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피사체에 몰두하다 보면, 사진가는 남이 사진을 찍는 것도 모른 채, 그 사이로 불쑥 끼어들기도하고, 남의 카메라에 뒤통수를 찍힐 수도 있다. 옆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른 채, 뻔뻔스럽게도 좋은 자리를 오랫동안 차지할 수도 있다. 그건 사진촬영에 몰두하다보면 주변을 의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눈에는 피사체만 보이고, 의식은 오로지, 곧 사진으로 태어날, 눈앞의 그림을 아름답게 구성하는 문제로 여념이 없게 된다. 집중해서 관찰하다보면 시간의 흐름조차 잊어버리기 십상인 것이다.

    

여럿이 모여 사진촬영지에 갔을 때, 약속한 시간에 돌아오지 않아 욕을 먹는 사람이 항상 좋은 사진을 보여준다는 얄궃은(?) 경향도 있는 것 같다. 만약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로 남을 배려하느라, 정작 사진은 제대로 못 찍는 축이다. 단체행동을 할 때는 약속시간을 지키는 일이 사진을 잘 찍는 일보다 먼저라고 믿는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 만족스럽지 않은 사진을 열어볼 때는 그런 내 행동이 후회스러울 때도 있다. 피사체를 제대로 확보하지도 못한 채, 남들 눈치를 보며, 주변에서 쭈뼛거렸던 내 모습이 ‘찌질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남들에게 무례를 범하더라도, 조금 더 적극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한편으론, ‘내가 사진에는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   

  

기회에 대한 아쉬움을 느낄 때, 나는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보았다. 만약 정직하고 선량한 사진가임을 증명하는 국가공인 라이선스가 있어서, 자격을 취득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언제든지, 자유롭게 촬영할 수 있게 허용하는 제도가 있다면 어떨까. 물론 제도가 잘 되려면, 사회구성원들이 전부 인정하고 공감하는, 사회 분위기가 중요할 것 같다. 공인받은 사진가가 사진을 찍으려고 나서면, 모든 사람들이 그가 사진을 잘 찍을 수 있게 기꺼이 양보하고 물러서서 기다려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사진 활동을 위해 ‘양보하고, 희생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이라 여기고 아무도 그를 경계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항상 모든 것에 우선해서 사진을 찍을 수 있고, 늘 자기가 원하는 위치에서 좋은 대상을 피사체로 삼아, 충분히 집중해서 사진을 찍게 된다. 마치 영화를 촬영하는 카메라 감독처럼, 온 세상이 그를 위한 세트장이 되는 것이다. 어디든 접근할 수 있고, 무엇에든 카메라를 겨눌 수 있으며,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 기술과 정서적 능력을 발휘해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는 사진을 찍으면서, 혹시나 나쁜 사람으로 비칠까봐, 자기검열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도의적으로 가책을 느낄 일도 없다. 오직 집중해서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것만이 유일한 미덕이 된다. 그러면 아마 자기 솜씨가 100% 발휘되고 감수성이 듬뿍 담긴, 완벽한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진의 성패가 주로 ‘사진 찍을 기회를 얻을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렸다면, 사진가의 능력은 상당부분 ’사회적 수완‘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진의 피사체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고, 대부분 혼자 마음대로 전유(專有)할 수 없다. 따라서 거기 접근할 기회를 얻는 문제는 어차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성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떤 피사체에 접근해서 사진을 찍기 위해 누군가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지위나 능력이, 그리고 남에게 욕먹지 않고 일을 잘 처리할 줄 아는 수완 같은 것들이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는) 중요한 능력이 된다. 물론 그런 능력이 부족하다면, ‘좋은 사람’이기를 포기하면 되는 문제이긴 하다.     




사실 나는 몰상식한 사진가였다. 오래 전에 장미축제가 열리는 어느 공원에서 장미꽃 사진을 찍고 있었다. 매크로렌즈를 끼운 SLR카메라를 든 채, 울타리에 피어있는 하얀 장미에 꽂혀있었다. 울타리 사이로 스며든 부드러운 햇살이 하늘하늘한 꽃잎을 희롱하는 모습에 나는 완전히 빠져들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고, 햇살이 오락가락하는 통에 빛이 비치는 상태가 시시때때로 변했다. 그 바람에 나는 한 자리에 제법 오래 머물면서 사진을 여러 컷 찍었던 것 같다. 꽃은 흔들리는 데, 셔터속도가 감질나게 모자라서, 사진이 제대로 찍혔다는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 때 어떤 여자가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혼자 그렇게 오래 있으면 어떻게 해요! 십 분이나 기다렸잖아요.”   

  

내가 미안하다면서 비키자, 여자는 바로 휴대폰으로 셀카를 한 장 찰칵 찍더니, 나를 툭 치고 지나갔다. 가면서 뭐라고 투덜거렸지만, 뭐라고 말했는지는 못 알아들었다. 분명히 욕을 했겠지만, 너무 심한 욕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와 비슷한 일은 종종 있었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유사한 상황이 자주 있었지 싶다. 물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나를 비난하면서, 그 자리를 포기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나는 사진을 찍을 때 좀 더 조심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욕먹은 경험을 통해 길들여진 셈이다. 그렇게 된 게 다행인지 아닌지 지금 혼란스럽다. 왜냐하면 나는 ‘사진가’이지만, ‘좋은 사진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좋은 시민'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좋은 사진가'가 되긴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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