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다운 사진
그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 당신은 사진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식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있습니다. "
" 그런 생각은 시대에 뒤떨어진 겁니다. "
나는 '사진은 사진다운 게 좋은 것 같다'고 말했을 뿐이다.
조심스레 내 의견을 말한 것인데, 그가 흥분해서 나를 공격했다.
마치 나를 케케묵은 가치에 매몰되어 다른 생각은 통 못하는 대책 없는 고집불통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캐릭터였다.
그 날 서로 처음 만난 자리여서 나는 더 놀랐고 당혹스러웠다.
그는 시인이었는데 사진 솜씨도 탁월했다.
혹은 ‘사진가인데 시를 아주 잘 쓰는 경우’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둘 다 그의 직업은 아니었지만, 시집을 내고 사진전을 열 정도로 진지했고, 실력도 전업작가 못지않았다.
평소 구성미가 뛰어나고 세련된 사진을 찍어서, 자작시와 함께 인터넷 사진동호회 게시판에 자주 올렸다.
당시 그는 느린 셔터속도를 이용해서 찍은 흔들린 사진(이미지)에 심취해 있었는데, 마침 그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추상화 그림 같은 사진에서, '핵심은 적당한 셔터속도를 찾아내서 사물의 형체가 뭉개지는 정도를 조절하는 부분'이라고 그가 말했다.
아마도 내 말은 '그런 사진은 사진답지 않다'는 식의 비판처럼 들렸을 것이고, 그게 그분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 같다.
아차! 싶었지만, 입 밖으로 꺼낸 말을 도로 담을 순 없었고, 그를 달랠 만한 변명의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멀리 있는 야생화 서식지에서 꽃 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도로정체가 심해서, 긴 시간동안 차에 갇혀 있었다.
좁은 차 안에서 그 분과 함께 머물렀던 내내 나는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를 감내해야했다.
눈치도 없이 입바른 말을 꺼낸 내 탓이라 원망할 데도 없었다.
덕분에 그 날 나는 내가 사로잡혀 있다는 그 '고정관념'을 되씹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사진답다'는 게 뭘까?
나는 왜 그런 (고지식한) 관념에 집착하고 있는 걸까?
아름다운 꽃 사진의 비결
야생화 사진 동호인들이 이른 봄에 멀리 있는 산속 서식지로 찾아가는 이유는 물론 '꽃을 남보다 먼저 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긴 겨울 기다린 뒤에 귀한 꽃을 만나서 반갑고 사진에 담아 소식을 전하면 마음도 뿌듯하다. 그리고 굳이 그 먼 곳까지 찾아가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아마 '거기에 꽃이 많이 피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분들은 사진가이고,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사진'이며, '멋진 배경 앞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 사진'이다. 야생화 서식지는 대부분 자연군락지라 (같은 종의 식물이 떼를 지어 자라고 있기 때문에) 거기 가면 많은 꽃을 만날 수 있다. 선택의 여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멋진 사진을 얻을 확률도 높아지고 그래서 장시간 차를 타고 이동해서 산에 올라가는 수고까지 감내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가서 보면, 사진의 피사체가 될 만한 좋은 꽃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꽃은 지천으로 피어 있지만, 좋은 꽃은 좋은 배경 앞에 피어있지 않고, 좋은 빛이 깃든 멋진 배경 앞에는 꽃이 없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물론 아름답고 완벽한 사진을 기대하는 사진가들의 까다로운 시각이 만들어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의 완성도에 대한 기대치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높아서, 그 분들이 원하는 장면은 일반 사람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솜씨가 좋은 사진가일수록 피사체를 선별하는 안목이 더 엄격하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웬만큼 운이 좋지 않으면, 꽃과 배경과 빛이 전부 조화롭게 맞아 떨어져서 흡족한 사진이 될 만한 장면을 만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면, 다들 '억지로 만들어내서라도 좋은 사진을 찍고 싶다'는 유혹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나도 그랬다. 일부러 멀리까지 찾아왔으니 어떻게든 성과를 얻어가고 싶은 것이다.
배경과 전경에 적당한 사물을 배치하고 꽃과 꽃이 핀 주변을 잘 정리하면 해결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촬영거리가 가깝고 사진에 담기는 공간의 범위가 좁아서 가능한 일이었고, 같은 이유로, 앵글 변화나 심도 표현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도 커서, 실제로 많은 사진동호인들이 그런 수법들을 활용하고 있었다. 그 분야에서는 현장에서 (자연과 경관을 훼손하지 않는 수준에서) 정교하고 치밀한 촬영세트장을 꾸미는 솜씨가 사진을 잘 찍는 비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비법'은 '트릭이나 꼼수'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떠벌일 필요는 없겠기에)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심지어 꽃을 뽑아서 좋은 빛이 드는 멋진 배경 앞에 옮겨 놓고 사진을 찍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하긴 '여기 꽃만 한 송이 있었더라면' 하고 아쉬운 탄식을 내 뱉었던 경험은 나도 종종 있었다. 아름다운 사진을 위한 사진가들의 노력은 눈물겹고도 가증스럽다.
그려 넣는 것과 집어넣는 것의 차이
사진을 액자에 넣어서 벽에 걸어두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형식적 완결성'이 필요한 법이다. 사진 속 장면은 (마치 원래부터 그 틀 안에 있었던 것처럼) 안정적이고 짜임새가 있고 조화롭게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인터넷에 올릴 때나 책이나 신문 잡지 등의 종이매체에 사진을 실을 때도 마찬가지다. 거기 무엇이 찍혀있든, 산만하고 혼란스럽고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거나 틀이 비뚤어진 조잡한 사진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형식면에서 보면, 사진은 어차피 '그림'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회화에서 요구되는 조형의 조건들을 어느 정도 갖춰야 한다.
다시 말해, 틀 안의 세상은 시각적 무게중심이 잡히고 균형이 맞아야 할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이루어 적정한 구성미를 보여줘야 한다. 다른 예술작품들처럼 정서적 호사를 누리게 해 줄 만큼 풍부한 감각 정보까지 담긴 완벽한 조형미를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그 정도는 '기본'이고, 내용이나 의미 이전에, 사진이 우리 눈앞에 등장할 때 갖춰야 할 일종의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진의 피사체가 되는 세상은 원래부터 사진을 위해서 준비된 장소가 아니다. 그래서 사진가에게는 그 최소한의 과업조차도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조형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상의 모습은 '거의 하자 투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건 '멋진 사진을 찍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어디든 나가서 사진을 찍어 보면 알 수 있다. 세상의 일부분을 잘라서 사진 프레임 안에 넣었을 때 (마치 화가가 캔버스에 그린 그림처럼) 미적 요건들을 갖춰서 조화롭게 들어맞는 경우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림은 처음부터 캔버스 틀을 전제로 해서 '그려 넣은 것'이지만 사진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은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것을 새삼스레 네모난 틀 안에 '집어넣는 일'이다. '그려 넣는 것'과 '집어넣는 것'은 다르다.
사진의 피사체는 아마도 사진틀에 비해 크거나 작을 것이고 구조상으로 잘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이 쪽을 맞추자니 저 쪽이 안 맞는 꼴이 되고 명암의 분포 상태나 색상도 취향에 맞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억지로 욱여넣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어떤 것은 어색하게 잘려 나갈 것이고 다른 것은 구조가 틀어져서 불안정할 것이며 산만하고 짜임새가 없어서 구성이 마음에 차지 않을 것이다. 사실 사진적 조화로움은, 흔하고 당연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특별하고 예외적인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 그 부분은 사진가들이 애써 성취한 결과라고 봐야 한다. 실제와 사진 간에는 괴리가 있으며, 사진가들은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 노력하고, 그게 그 분들의 역할이기도 하다.
불가피한 피사체 경쟁
사진은 피사체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서 찍는 방식으로 제작되기에, 사진의 외형은 피사체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승계한다'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 멋진 풍경사진이 되고, 우아한 모델이 앞에 있으면 좋은 인물 프로필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사진기자의 경우, 쇼킹한 사건사고 현장에 있다면 특종을 찍게 될 것이다. 그렇게 피사체가 충분히 바람직한 상태에서 일이 쉬워지고 사진가의 역할도 줄어든다. 그러나 반대로 피사체가 기대에 미치지 못 할 경우에는 일이 좀 더 힘들어진다. 예를 들어, 풍경이 완벽하게 아름답다면 그는 그저 풍경을 향해서 셔터를 누르면 된다. 그러나 눈앞의 풍경에 어딘가 미흡한 구석이 보인다면 사진가는 뭔가 조치를 해야 한다. 더 나은 풍경을 찾아갈 수도 있겠지만, 주어진 풍경으로 최선의 사진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게 먼저다.
최소한, 방해물이 있으면 피해야 하고 앵글과 프레임을 잘 조절해서 괜찮은 구도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외에도 (야생화사진 동호인들처럼)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서 그런 일들에 더 많은 공을 들이게 된다. 풍경사진가라면 사진을 고치고 색을 칠해서라도 마음에 드는 풍경사진을 만들려고 애를 쓸 지도 모른다. 또한 흠이 많은 고객을 만난 상업 사진가라면, 사진을 찍을 때 더 많은 기교를 부려야 할 뿐 아니라 현상/인화할 때도 품이 더 들 것이다. 사건사고 현장에 없었던 사진기자는?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사진이 피사체에 종속적이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좋은 피사체가 곧 좋은 사진이 된다. 반대로 피사체의 상태가 미흡할수록 사진가에게는 더 많은 노역이 부과되고 부담이 커지며 더 높은 기술이 필요하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실패할 확률까지 높아진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카메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제한적이라, 사진가는 운신의 폭이 매우 좁기 때문이다.
사진 촬영기술은 '만능'이 아니며, 상당 부분, 장치의 기계적인 한계 안에서만 허용된다. 현상/인화하는 과정에서도, 원칙적으로, (결점을 보완하는 수준의) 소극적인 조치가 가능할 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사진가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것이다. 아마 그래서 다들 피사체 경쟁에 뛰어들게 되는 것이지 싶다. 오로지 더 나은 피사체를 만나는 것만이 원하는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 서로 앞 다투어, 더 좋은 곳으로 찾아가고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들게 된다. 더 아름답고 새롭고 신기한 것들을 탐색하는 일에 열중하게 된다. 한데 그렇게 사진의 피사체가 되는 '현실세계'를 붙들고 고군분투하다 보면, 피사체에 대한 불만이 싹틀 때가 있다. 정확하게는 '피사체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 '피사체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그 상황이나 처지에 대한 불만일 것이다.
처음에는 별로 그렇지 않지만, 사진기술에 익숙해지고 사진을 보는 눈이 높아지고, 완벽한 사진에 대한 갈망이 커지면서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남들 사진과 비교하면서, 놀랍고 만족스러웠던 내 사진에서 점차로 미흡한 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새롭고 창의적이라고 생각되었던 사진들마저 마냥 진부하게 보인다. 그래서 계속해서 더 참신하고 보다 완벽한 피사체를 갈망하게 된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새롭고 완벽한 피사체는 드물기도 하지만, 장소와 시간이라는 물리적 제약과 법과 도덕을 비롯한 여러 현실적 장애물들이 가로막고 있어서, 카메라를 들고 접근하기에도 만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상상력과 창의력은 별 쓸모가 없고, 그 대신 자원이 필요하거나 심지어 세속의 자격이나 권력이 요구될 때도 있는 것이다. 사진적 성공을 보장하는 좋은 피사체를 만나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할 수도 있다는 얘긴데, 아마 처음에는 사진의 그런 면을 예상하진 못했을 것이다. 혹은 '내가 잘 하면 된다'는 식의 관념에 치우친 나머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화가가 되고 싶은 사진가
사진의 피사체가 되는 세상의 모습은 다양한 반면 사진가가 가진 수단(카메라)은 너무나 단순하다. 근본적으로는 이런 점이 사진가를 힘들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화가는 자기 눈앞의 사물들을 이리저리 짜 맞추고 색과 명암을 마음껏 조절해서 상상했던 그림을 완벽하게 그려낼 수 있다. 그러나 사진가가 사진을 찍는 방법으로 그렇게 하는 건 불가능하다. 셔터막이 열리면, 빛은 동시에 확산되어 흔적을 만들고, (사진이 제작되는 중에는) 그 분포상태를 부분적으로 조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눈 깜박할 사이에 일어나는)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최종적인 사진의 모습이 결정되고 (원칙적으로) 시행착오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진가의 머릿속 그림이 화가의 그것보다 못하라는 법은 없고, 완벽한 작품을 향한 집착과 열정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진가들이 자기가 찍은 사진에 불만을 느끼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바람직하지 못한 피사체의 특성마저 그대로 사진에 담길 것이고, 그는 자기가 찍은 사진에 하자가 있는 것을 참지 못한다. 사진이 조형적으로 산만하거나 형태가 비뚤어지고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치우친 상태를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머릿속에 떠올렸던 이상적인 그림과 완전히 다른 형태로 구성되고 개인적 취향과도 전혀 맞지 않는 색을 띤 사진이 마음에 들리가 없다. 그건 비록 피사체가 그런 상태이다 보니 사진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경우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형태와 조화로운 색채를 향한 그의 열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 작품에) 완벽을 기하려고 들게 된다. 그리고 이런 저런 편법(?)을 써서라도, 원하는 사진을 얻어 내고야 말겠다는 식의 유혹을 느낀다. 만약 그가 예술적 동기를 품고 사진을 시작한 경우라면 더 쉽게 그런 유혹에 빠져들 것이다. 예술적 취향이 뛰어나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완벽한 사진에 대한 열정이 클수록, 미흡한 사진에 대한 불만도 더 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진가는, 그림에 자꾸만 덧칠을 하는 화가가 되어간다.
사진에서는 붓과 나이프로 그릴 수도 없고 덧칠도 할 수 없지만, 그 대신 이런 방법들이 가능하다. 카메라를 흔들어서 사진을 몽환적인 그림으로 만든다거나 느린 셔터로 촬영해서 움직이는 물체를 깔끔하게 뭉갠다. 혹은 카메라의 다중노출 기능을 이용해서 여러 장면이 겹쳐진 이미지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런 수법을 사용하면 형상과 색이 뒤섞여서, 마치 추상화 그림처럼, 미감이 돋보이는 얼룩이 담긴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원래 디테일(세부묘사)이 많으면 흠도 있기 마련이다. 디테일이 사라지면 피사체의 모습 역시 왜곡되거나 사라지겠지만, 조형적으로는 완벽한 이미지를 얻기가 쉽다. 혹은 연출을 통해 피사체의 상태를 통제하거나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원하는 피사체를 제작해서 사진을 찍으려고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안 되면, 특수한 인화기법을 쓴다거나 포토샵 등을 활용해서 사진을 그리는 방법까지 고려할 수도 있다. 사진을 캔버스 위에 그린 유화처럼 만들거나, 마치 콜라주처럼, 여러 장의 사진을 합성하고 색을 입히고 명암의 톤을 재구성해서 새로운 그림을 창조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그는 점점, 애초에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잊어버린다. 출발은 사진을 찍으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나 영상을 제작하는 연출자가 된 게 아닌지, 의심스러운 상황이 된 것이다. 물론 촬영할 장면을 연출한다거나 피사체를 제작하는 행위 또는 사진을 수정하고 합성하는 행위 등의 활동들이 그 자체로서 어떤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니다. 다만 나는 사진가들이 그런 일에 과하게 몰두한다면, 그게 또 다른 창작활동에 속하며, 정작 그 부분이 사진보다 오히려 비중이 더 클 수도 있겠다고 보는 것뿐이다. 아마 그래서 ‘사진답지 않다’는 식의 생각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형식주의일까?
나는, 촬영할 장면을 연출하고 사진가가 직접 피사체를 제작하는 등의 활동을 볼 때면 행위예술가들의 퍼포먼스가 떠오른다. 그런 활동들에서, 핵심은 제작된 결과물과 메시지가 담긴 그 행위의 과정이고, 사진은 단지 기록을 남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사진촬영 그 자체에서는 기예(技藝)라고 볼 만한 게 발휘된 바도 거의 없다. 또한 포토샵 등으로 사진을 수정하고 합성하는 것이 화가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사진은 밑그림으로 쓰였을 뿐 완성된 건 그림인 게 분명하다. 게다가 사진가들이 흔히 하고 있는, 그런 연출이나 수정작업 등이 가지는 의미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나는 매우 궁금하다. 혹시 그분들의 ‘의도’가 오로지 ‘형식미가 전부’인 건 아닌지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 훌륭한 사진은 사진가의 의도와 목적을 궁금해 하는 퍼즐이 아닙니다. 훌륭한 사진은 황금 비율 같은 디자인과 균형의 다양한 보편 법칙들을 가지고 선이나 모양을 만든 것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순수 사진가 랄프 클레벤저의 인터뷰 - 크리스 오르위그. 소울포토 p285) ]
‘좋은 사진이란 구성과 디자인의 법칙에 따라 만들어진 아름다운 사진이다. 사진은 그 안에 매혹적인 선과 명암 톤과 우아한 색상과 리드미컬한 패턴 등이 들어있는 조화롭고 균형이 잘 잡힌 아름다운 그림일 뿐이다.‘
나와 내 아마추어 사진동무들이 사진을 대하는, 이런 태도를 두고 예술비평에서는 ‘형식주의’라고 부른다. ‘형식주의’는 예술작품의 형식, 즉 만들어진 모양새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태도를 말한다. 예컨대 영화에서 형식주의는 내용이나 스토리보다 기법과 스타일을 중요시한다.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영상이 스크린에 펼쳐지지만, 내용은 별 게 없는 식이다. 본질적으로 형식과 내용은 불가분의 것이고, 따로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은 아니다. 통념상, 자연 상태의 물질이든 인간이 만든 물건이든, 모든 사물에는 형식과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예술작품도 마찬가지다. ‘글’이 단순히 ‘글자’만은 아니고 ‘내용’을 포함하듯이, 형태가 있으면 내용도 있기 마련이다. 사진도 ‘인화지 위의 그림’인 그 형식에는 '카메라 앞의 피사체에 담긴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형식주의는 작가가 형식에 집착한 나머지, 대상이 가진 내용을 무시할 때 가능해진다. 예술가들에게는 형식면에서 완벽을 기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있는 것 같다. 아름다운 모양새를 만들고자 하는 본능적 집착은 흔히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아마 그런 집착이 형식주의로 치닫게 만드는 것 같다. 형식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완벽한 형식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내용을 아예 지워버리거나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게 되고' 그러면 형식주의가 된다. 형식주의를 추구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작가가 대상이 지닌 특정한 속성, 성질 또는 관계를 추상화하거나 배제해 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진가가 카메라를 흔들어버리면, 사진에서 내용이 사라지고 형식만 남게 된다. 그 때 사진은 형식면에서 아름다움을 달성할 수도 있겠지만 내용은 텅 비게 된다. 어쩌면, 미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선과 색채가 새로운 의미를 띨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감정이 아름다움에 반응하면 우리는 나름의 해석을 통해서 의미를 창안해 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아름다운 얼룩은 사진가가 카메라를 이용해서 제작한 그의 창작물이다. 이 때 그는 자기 작품에 대해 뭔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고 보는 사람들도 각자 나름의 해석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당초 카메라 앞의 피사체에 담겨있던 것이 아닌, 새로운 내용이 부여되고 사진은 영상물(映像物)로 바뀐다. 한데 나는 여기서 이런 의문들이 발목을 잡으면서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이러려고 그랬던 걸까?’
‘혹시 마지못해 이렇게 된 건 아닐까?’
'나는 애초에 무엇 때문에 카메라를 들었던가?’
게다가 카메라를 메고 세상을 탐색하다 보면, 내가 정작 좋아하는 것들은 사진적 표현방식에 잘 맞는 형태를 갖췄다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러면 ‘차라리 그림을 그리는 편이 낫겠다’는 식의 생각까지 할 수도 있다. 카메라가 나의 상상력과 창조적 능력을 구현하는 데 있어서 걸림돌이 되어, 굳이 ‘사진’을 고수할 이유가 무엇인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카메라는 펜이나 붓이나 유화용 나이프처럼, 회화를 위한 여러 도구들 중 하나로 전락하고 사진가는 화가가 된다. 혹은 피사체를 아예 만들어 낼 궁리를 할 수도 있고 그 때 사진가는 카메라를 약간 활용하는 설치미술가나 행위예술가가 될 것이다. 물론 사진은 그림(회화작품)이나 예술작품이 된다. 이것은 사진가가 미적 의도를 내세우는 한, 저절로 진행되는,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 같다. 예외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이 그냥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의도와 목적을 궁금하게 하는 퍼즐
누군가는 사진이 그림이 되고 자신이 화가나 예술가로 불리면 오히려 영광(?)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진이 회화나 다른 예술 활동들과 독립해서 따로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사진을 유난히 좋아하거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일 수도 있고 어쩌면 (지위를 위해) 필요해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사람들은 카메라와 사진이 가진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고수할 이유를 찾아내려고 들 것이다. 그러면 그 때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피사체와의 관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누구나 처음에는 ‘어떤 것이 너무 아름답다거나 너무 소중해서’ 사진을 찍게 되었을 것이다. 그건 애초 관심의 방향이 사진의 피사체가 되었던 '실제 세상'을 향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진에 대한 열정과 애정도 결국 그 세상을 향한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쨌거나, 사진은 계속해서 ‘그것’을 가리키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사진이 더 이상 피사체를 가리키지 않게 되었다면, 최소한, 사진가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 생각에 사진이 그림과 다르고 다른 예술과도 차별화되는 점은 딱 하나뿐이다. 바로 그 안에 ‘피사체를 바라본 사진가의 시각(視覺)’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사진이 시작되면서 이전에는 없었던 수많은 시각들이 탄생되었다. 그건 사진사(史) 책을 열어서 거기 실린 사진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거기 있는 사진들은 전부 어떤 시간과 공간(피사체)을 바라본 시각들의 기록이다. 덕분에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걸 볼 수 있게 되었고 관심이 없었던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보는 법도 배웠다. 몰랐던 걸 알게 되고 평범한 것들도 특별하게 볼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고는 새삼스레 사랑하게 된 적도 있었을 것이다.
사진은 그렇게, ‘시각을 창조하는 일’이다. 그리고 시각(視覺)은 '피사체가 된 카메라 앞 실체'가 사진 속에 그대로 존재할 때만 남아있다. 그게 지워지면, 사진은 더 이상 피사체를 가리키지 않게 되어, ‘시각’은 사라지고 읽을 수가 없게 된다. 따라서 사진가의 창작물은 '사진'이 아니라 바로 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관객이 보는 것도 시각이고 사진을 통해서 의미 있게 전달되는 것도 시각이다. 만약 어떤 사진이 한 장 사라진다 해도 아마 그 안에 담겨 있던 시각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 사진적 시각은 특별하고 창의적이야 하며 그 안에 특별한 의미와 내용이 깃들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창의적인 시각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사진을 찍는 목적과 의도가 분명하다면 의미와 내용은 저절로 따라붙기 마련이다.
따라서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가?’ 사진은 이런 질문을 불러일으키면서, ‘사진가의 의도와 목적을 궁금하게 만드는 퍼즐’이다. 사실 '사진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식의 관념이 포함된, 이런 주장은 요즘 고지식하기 짝이 없다. 형식에 개의치 않는, 현대의 '열린 사고'로 바라보면, 관점이 너무 옹색해 보인다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피사체를 가리키지도 않으면서, 더 이상 ‘의도와 목적을 궁금해 하는 퍼즐’도 아닌, ‘사진그림’의 옹색함도 만만치는 않은 것 같다. 혹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온 힘을 쏟아서 작품 활동을 한 다음 그 과정을 기록하려고 사진촬영을 곁들였다는 것을 명분삼아, 사진 쪽에 발을 걸친 예술가들이 있다면, 그 분들의 입장 역시 옹색하기로는 만만치 않아 보인다. 그래서 고민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어쩔 수가 없다
그는 ‘사진답다는 게 대체 뭔데?‘ 라고 반문했지만, 그 날 나는 쉽게 대답하지도 못했다. 이제 와서 찬찬히 생각해보면,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사진가들의 연출행위와 이런저런 사진기법들과 인화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거의 대부분, ’아름다운 형식미를 얻기 위한 목적에서 빚어진다‘고 의심한다. 다른 분야의 예술 활동으로까지 번지는 경우는 드물고, 좀 더 완벽한 사진을 얻으려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한데 그런 노력이 과도한 경우 (처음 의도와 달리) 사진이 변질되어 그림(繪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사진을 그림과 비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진은 그림이 아니고, 따라서 최소한 사진이 그림처럼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림의 속성은 사람이 구도나 색채 등을 자유롭게 구사해서 표현한 '조형미'라고 할 수 있다. 그건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 것'이다. 사진은 형식면에서 그림과 유사하지만, '사진고유의 속성'도 있는 게 분명하다. 사진은 최소한, '만들어낸 것'은 아니고 '있는 것'이다.
'사진답다'는 말은 아마도 그 '사진고유의 속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사용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림과 다른, '사진고유의 속성'이란 바로 카메라 앞에 놓여 있었던 그 '피사체와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문제일 터였다. 사진은 렌즈를 통해 들어온 빛이 필름이나 센서에 남긴 흔적을 정착한 것이고, 그 빛은 바깥세상의 형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 따라서 사진은 언제나 피사체를 가리키고 있으며, 그게 바로 사진 만이 가진 고유한 속성이다. 사진의 형상에는 피사체를 보았던 사진가의 시각이 담겨있고 그건 사람이 창작해서 만들어낸 그림(繪畵)에는 아예 없거나, 최소한 거의 없는 속성이다. 그 속성을 잃으면, 더 이상 '사진'이 아니다. 사람이 제작 과정에 과도하게 개입해서 사진이 피사체를 가리키는 힘을 잃게 되면, 그 때 사진은 '그림'이 되고 만다. 나는 이게 '사진의 생존'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했고, 내가 말한 '사진답다'는 말도 바로 그런 뜻이었던 것 같다.
그림은 세상에 대한 화가의 '해석'이고, 그가 창조한 작품은 모델이 된 세상을 직접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진은 피사체를 직접 가리키고 있으며, 피사체를 등지면 오히려 그 힘을 잃게 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사진이 언제나 피사체를 가리키고 있다’는 세상의 인식이 너무나 공고하기 때문인 것 같다. 사진은 자동적으로 만들어지고 그 제작과정에 사진가의 해석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 누구나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므로, 사진을 보는 사람들도 거기 담긴 피사체를 보려고 들 뿐, 사진가의 해석을 보려고 하지는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사진을 볼 때, ‘이게 누구예요? 여긴 어딘가요? 뭔가요? 어떤 일이 있었는가요?’ 식의 질문들을 한다. 관심이 촬영 당시 카메라 앞에 있었던 그 존재와 사건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림을 볼 때는 그렇게 질문하지 않는다. 화가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면서 그림을 그런 식으로 그린 의도(화가의 해석)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나는 사진이 사진으로 남으려면, 바로 이런 점을 인정하고, 여기서 일정한 '선을 그어야만 한다'고 믿는 것이다.
어쨌거나 사진은 피사체를 가리키고 있어야 하고, 그 핵심은 ‘가리키는 방식’에 있으며, 그게 곧 ‘사진가의 시각’이다. 그게 지워지면 사진도 사라진다. 시각은 '해석'이라기보다 '발견'에 더 가깝다. 그것은 언젠가 카메라 앞에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지 창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사진가가 자기 자신의 창조적(또는 예술적) 능력을 보여주고 싶다면 ‘시각’을 통해서 보여줄 수는 있을 것이다. 사진의 역사에 기록된 모범적인 사진가들의 사례를 봐도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는 방식은 사진답지도 않지만, 더 중요한 건, 그런 사진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진의 대상이 되는 피사체를 창작하는 방식이 사진의 영역 안에 들어오려면 '합당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꼭 '실제 세상' 만이 사진의 피사체가 될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어떤 작품들은 사진보다 피사체를 창작한 의도가 훨씬 더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매우 편협하고, 나의 편협함에 대해서는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발목 묶고 달리기는 답답하고 비능률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끈을 풀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진가도 비슷한 입장인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