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통보 350일 차를 맞은 나의 일상과 결실
25년 들어서 처음 쓰는 브런치 글이다.
24년 10월, 브런치 작가가 되고 나서 꾸준히 그리고 자주 글을 올리고자 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이제야 25년 첫 글을 올리게 되었다.
부끄럽지만 이 글은 이런저런 핑계에 대한 글임과 동시에 앞으로 브런치에 글을 열심히 쓰기 위해 한 번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그동안의 나의 노력에 대한 과정과 결실에 대한 글이다.
직장인, 그중에서도 나처럼 운이 좋고 혜택을 많이 받아 임원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은 항상 퇴직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고 나 또한 나름대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통보를 받고 나선 소위 멘붕이라는 감정이 왔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24년 8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50일 전에 퇴사 통보를 받고 나서 제일 처음 든 생각은 와이프에게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하는 것이었다. 드라마나 책에선 이런 상황에 대해 와이프에게 알리지 못하고 출근하는 척하며 등산을 간다던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다던지, 혹은 한스밴드의 노래처럼 오락실에서 딸을 만나기도 하는 상황을 많이 보았었는데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난 정면돌파하기로 결정했고 통보받은 그날에 바로 와이프에게 얘기했다. 그 장소는 다름 아닌 광안리 만화 카페. 당시 방학 중이었던 초등학교 2학년 딸이 졸라서 만화 카페를 와이프와 함께 갔었고 딸아이가 만화를 고르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전광석화와 같이 와이프에게 상황에 대해 알렸다.
와이프라고 별 수 있을까. 겉으로는 타격을 받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이 보였지만 와이프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걸 눈치챌 수 있었고 그 후로도 휴가가 끝나고 인수인계를 위해 해외 근무지로 복귀 전까지 (참고로 해외 근무 중이었고 휴가 중에 통보를 받음- 자세한 내용은 브런치 스토리 나의 글 중 유일하게 조회수 1만 회를 넘긴 '퇴사 통보 100일 차'를 참조하시라~) 거의 10일 간 우울 모드였다. (타이밍이 정말 거지 같아서 소중한 휴가를 망쳤다 ㅠㅠ)
24년 9월, 인수인계를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24년 연말까지는 여러 사정 상 부산 집으로 바로 가지 못하고 단기로 오피스텔을 얻어 향후 인생 제2막을 어떻게 개척해 나가야 할 지에 대해 고민하며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하면서 보냈다.
25년 2월, 드디어 부산 집으로 복귀(?) 했고 그다음 날부터 집 인근에 있는 스타벅스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스타벅스에서 보내면서 출근하는 직장인의 루틴을 유지하기로 했다.
나의 집무실을 아래와 같이 공개한다.
회사에 근무할 때 보다 훨씬 더 좋은 사무실이다!! (힘내라고 일일 일 박카스도~^^)
밝고 넓은 데다 일찍 오니 일정 시간은 이 넓은 사무실을 오롯이 혼자 쓰기도 한다!!
사실 원래는 스터디 카페나 도서관을 이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스터디 카페에 갔다가 항의 문자를 받았다.
책을 읽을 때 나도 모르게 약간 중얼거리며 읽는 습관 때문에 스터디 카페에서 공부하시는 분들로부터 항의가 들어왔었나 보다. (크게 소리내진 않았다. 정말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다 ㅠㅠ) 민감하신 분들이 많다. 여긴 아니다 싶었다.
인근 도서관을 가봤는데 스터디 카페만큼은 아니지만 여러 제약도 있었고 나랑은 맞지 않아서 결국 스타벅스 집무실로 결정!!
책 보고 공부하다 지루하면 일어나서 스타벅스 내부 공간에서 걷기도 하고 전화 통화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각종 샌드위치도 먹고 음악도 듣고, 노트북과 핸드폰 충전도 하고.. 여기가 최고다!!!
너무 장시간 있으면서 민폐를 끼치는 진상 고객은 아니냐고? 사실 눈치가 좀 보이긴 하다....
그래서 오전 커피 한잔, 오후 커피 한잔, 점심때 샌드위치 등등 해서 이래 저래 2만 원에 조금 못 미치는 비용을 쓰면서 진상 고객은 아니라고 혼자 생각 중이다... (눈치 좀 덜 보기 위해 커피는 최고급 콜드브루 그란데 사이즈로 시킨다~^^)
퇴사 통보 이후 고민을 거듭하며 내린 결론은 이제 평생직장이 아닌 평생 직업을 찾아야겠다는 것이었다. 50대 중반에 직장 생활을 더해봐야 몇 년을 더 할까 싶었고 인생 제2막은 가능하면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결부시켜 지내고 싶었다.
30년간 직장 생활동안 내가 한 일은 해외영업과 스포츠마케팅인지라 이를 기반으로 고민했다. (해외 쪽 일 + 영어 쓰는 일 + 스포츠와 연관된 일)
이런 고민을 거듭하며 스타벅스에서 보낸 6개월 동안 이루어 낸 현재까지의 결실은 다음과 같다.
1. 출판번역 작가가 되기 위한 준비
번역 일은 평소에도 하고 싶었다. 나이 들어 은퇴하고 나서도 경력과 소질을 살려 번역 작가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던지라 번역 에이전시에서 개최하는 설명회에 참석한 후 번역 에이전시 대표님에게 용감하게 질문했다. "대표님, 번역 일은 여성분들이 훨씬 많고 더 잘하시는 거 같던데 저처럼 50대 중반의 남성도 가능할까요?"
대표님 왈, "번역사들 중에 여성분들이 많고 잘하시기도 하지만 오히려 50대 남성분들처럼 엉덩이가 무겁고 직장 경력이 좀 있으신 분들이 더 잘하시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말에 용기를 얻어 과감하게 출판 번역 강좌에 등록했다. 6개월 간 입문반과 심화반을 잘(?) 마무리 짓고 9월부터는 실전반에 들어갈 예정이다.
30년 간 영어를 활용해서 밥 먹고 살아온 터라 나름 자신감도 있었지만 번역은 또 다른 세계였다. 우리말을 쓰는 기초부터 새로 쌓아가야 했다. 번역서를 읽을 독자들에게 가독성이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영어뿐만 아니라 우리말에 대해서도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번역 강좌를 듣게 되면 매주 숙제가 있다. 번역 양도 많고, 문장의 수준도 높고, 시와 소설 번역은 특히 어려웠다. 숙제를 내고 나서 잘했다는 평가를 받았을 때도 있었지만 가혹한 질타를 강사님들께 받기도 했다. 그럴수록 마음을 다 잡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실전반까지 마무리 짓고 나서 실력을 인정받게 되면 번역 에이전시 소속 번역가로 일감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향후 재취업 여부와 상관없이 평생 할 일이라 생각하니 애정이 가고 과정도 즐겁다.
2. 영어 TESOL 자격증 취득
TESOL은 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의 줄임말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습자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국제공인자격증이다.
대학원에서 정식으로 배워 TESOL 석사 학위를 따기도 하지만 나처럼 나이도 좀 있고 시간도 부족한 사람에겐 단기로 온라인에서 취득할 수 있는 과정도 있어서 캐나다에 위치한 TESOL 전문 College에서 온라인 과정을 들었다. 외국 전문 기관의 외국인 강사가 가르치는 과정이라 나름 Quality도 있고 주위에서 인정받은 강의라서 하면서 재미있고 즐거웠다. 동영상 수업과 Quiz, 중간고사, 기말고사, 그리고 영어로 강의 계획을 짜는 Final Test까지 6주 과정 내내 계속되는 건강한 스트레스와 압박감 끝에 Diploma를 취득했다.
이 Diploma가 있다고 해서 바로 영어 교사로 취업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요즘 수요가 많은 방과 후 영어 교사, 영어유치원 교사, 학원 교사 등으로 취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꼭 이 분야로 나가야 되겠다고 정한 건 아니지만 그동안 밥벌이를 하게 해 준 영어를 다시 한번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계기로 삼는 명분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보람 있는 과정이었다.
3. FIFA Football Agent License 취득
82년 프로야구 출범, 83년 프로축구 출범 시절을 겪으면서 스포츠를 애정하며 살아왔고 운 좋게도 30대 시절에 계열사였던 프로축구단 프런트로 일할 수 있었다. 스포츠 마케터가 되고 싶었던 꿈을 마침내 이루게 되어 내 인생의 화양연화 시절이었다. 이후 다시 본사로 돌아와 열심히 살았고 몇몇 회사를 더 거쳐 임원으로 퇴직했다. 화양연화 시절이 그리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게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3월 어느 날 아침에 잠이 일찍 깨 습관처럼 휴대폰을 쥐고 이런저런 뉴스를 보던 중 FIFA Football Agent 시험이 6월에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스포츠 중에서도 축구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고 FIFA는 그중에서도 가장 권위 있고 큰 스포츠 기구이다.
FIFA Football Agent, 쉽게 설명하자면 메시, 호날두, 손흥민 같은 선수들 (물론 유명하지 않은 선수들도 당연히 포함)을 대리하여 계약 조건 협상 및 각종 Sponsor 계약 협상 등을 전담한다. 이 외에도 맨시티, 바르셀로나, 토트넘 등 유명 구단을 대리하여 축구 산업 관련 대규모 계약 체결을 주선하기도 한다. 구단에서 근무 시 에이전트들을 업무 상 접하기도 했었고 협상 파트너로 일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스포츠 시장도 저변이 확대되었고 할 일도 엄청나게 많아졌다.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시험에 응시해야겠다고 결심했고 800 페이지에 달하는 영어로 된 시험 교재와 영어 시험도, 세 달도 채 남지 않은 시험 기간도 문제 되지 않았다. 마침 현직 FIFA Football Agent 분을 강사로 모시고 시험 관련 강좌가 있어 등록한 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6월 중순 시험을 쳤고 프로축구단 근무 시절의 관련 업무 경험, 해외영업인으로서 계약 관련 업무 종사 경험이 도움이 되었는지 7월 3일, 마침내 합격 통보를 받았다. (담담하게 썼지만 많이 기뻤다!)
이어서 license fee를 지불하고 나니 아래와 같은 FIFA Football Agent License가 나왔다.
30대 시절 프로축구단에서 근무할 당시 동료, 선후배님들이 이제 각 구단에서 단장, 감독, 팀장 등 주요 보직에서 활동하고 계신 점이 어느 정도는 든든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당장 이 업에 종사할지 아닐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좋아하는 일에 대한 자격증이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평생 소지할 수 있는 자격증이라 즐겁고 행복하다. 많이 발전한 관련 업계 업무에 대해 천천히 동료 선후배님들도 만나뵙고 자문도 구하면서 준비할 예정이다.
최근 브런치 스토리의 인기 작가이자 '영화로 만나는 우리들의 슈퍼스타' 저자이신 '미친 PD' 이석재 작가님의 북콘서트 및 뒤이어 이석재 작가님이 주선해 주신 브런치 스토리 작가님들과의 번개 모임에 다녀왔다.
방송을 통해 워낙 이석재 작가님의 팬이기도 했지만 '영화로 만나는 우리들의 슈퍼스타' 책과 북콘서트, 그리고 이어진 브런치 스토리 작가님들과의 번개 모임을 통해 만난 이석재 작가님은 '박학다식' 그 자체셨다. 번개 모임을 주선하신 실행력 또한 '갑'이었다.
번개 모임에 참석하신 브런치 스토리 여러 작가님들 또한 정말 모두 필력도 우수하시고 좋은 분들이셔서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번개 모임 때 간단한 자기소개를 각자 했는데, 고작 다섯 편의 글만 올린 나로서는 브런치 스토리 작가라고 소개하기 정말 창피했다. 앞으로는 열심히 글을 쓰겠다고 여러 작가님들 앞에서 약속했다. 이 글은 그 약속의 시작이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일들이 인생 제2막의 삶에 어떻게 작용할지, 앞으로 내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잘 모르지만 지금처럼 행동해 나가면서 하나둘씩 무언가를 이루어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