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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신발은 준비 되어있다

머피라는 녀석이 없다면 말이다

by 미니멀파슈하

여러분은 본인의 MBTI를 잘 아시는지?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는 네 가지 이분법(외향/내향, 감각/직관, 사고/감정, 판단/인식)을 기반으로 성격 유형을 도출하는 검사다.


물론, 이 테스트에 한계도 명확하다. "심리전문가도 아닌 소설가가 만든 테스트를 믿을 수 있겠어?"라든지, "스스로 답을 고르는 거라니, 이게 정말 객관적일까?"라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런 잡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람과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엔 역시 MBTI 만 한 게 없다. (혹시 "난 그런 거 안 믿어"라고요? 음… ISTJ인가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네 가지 알파벳 중 한두 개가 겹치기만 해도 괜히 내적 친밀감이 생긴다. 반대로 다른 유형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그걸 계기로 상대방을 배려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나는 특히 네 번째 알파벳, <인식형(P)>인지 <판단형(J)>인지에 관심이 많다.


P는 계획보다는 그때그때 상황과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유형이고, J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기는 유형이라 한다. 그런데 나의 성격은 묘하게 두 가지를 넘나 든다.


큰 결정은 그날의 기분에 맡기지만, 그 안의 세부 사항은 치밀하게 준비해야 직성이 풀린달까. 그래서 나는 나를 이렇게 소개하곤 한다.


"P를 꿈꾸는 J"



예를 들면 이렇다.

오늘 하루 나에게 자유시간이 주어진다면?


오늘 무엇을 할 것인지는 현관문을 나서며 그때의 기분에 따라 결정한다.


만약 카페에 가기로 결정한다면 내가 가보고 싶은 카페들의 리스트가 이미 지도에 저장이 되어있고, 카페에서 해야 할 일들이 정해져 있고, 카페에서 읽을 전자책이 준비되어 있고, 마시고 싶은 음료가 없을 때를 대비해 <따뜻한 라떼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해 두는 것과 같다.






정리정돈 이야기에 꼭 빠지지 않는 한 구역이 있다면 역시, 신발장일 것이다. 보통 '사람은 발이 두 개뿐이고, 나는 지네도 아닌데...'로 시작되는 이곳의 정리정돈 이야기는 항상 재미있다.


운동용품, 우산, 공구, 장바구니, 쇼핑백, 마스크 등등이 있지만 신발장 정리의 꽃은 역시 <신발>이다. 수많은 신발장 정리 후기를 읽고 시청한 뒤 나 역시 강경한 신발장 정리에 들어갔는데, 그 결과 남은 신발의 개수는 3켤레였다.




운동화

플랫슈즈

샌들(겸 슬리퍼)



샌들은 여름에 신고, 플랫슈즈는 경조사 때 신는다. 그 외의 경우에는 전부 운동화 하나로만 지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갑자기 날씨가 좋고 컨디션이 좋아서 걷기 운동을 할까 싶을 때, 마트에 갈 때, 놀이동산에 갈 때, 여행 갈 때. 전-부 운동화 하나면 해결이 된다.


일부러 때가 잘 묻지 않을 만한 재질의 검은색 운동화를 골랐더니 세탁을 자주 하지 않아도 잘 유지가 되었다. 그렇게 한여름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은 운동화 하나로 보내던 중.



갑자기 러닝 열풍이 불었다. 마침 둘째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해서 오전시간이 조금 한가해졌고, 마침 집 앞에 공원이 있었다. '나도 러닝이란 걸 해 봐야지.' 마음만 먹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뛰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공원을 달려보았다. 신발을 따로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운동화를 신고 있었으니까.


아주 천천히 가볍게만 뛰었는데도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은 뿌듯함은 덤이었다. 이제 내게도 평생을 함께 할 새로운 취미가 생긴 것 같아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 까지는 말이다.



내가 가진 건 당연히 운동화 딱 한 켤레였으므로, 이 신발을 신고 헬스장에 갈 수는 없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다가 결국 헬스장용 운동화를 한 켤레 구입했다.(이 무렵 충동구매처럼 레인부츠도 마련했다)


그랬더니 장마가 끝났다. 이제 한 번 달려볼까, 했더니 초등학생 1학년 첫째의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흠. 헬스장 등록은 조금 뒤로 미루기로 하자.


방학이 끝나고 나니 8월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헬스장을 등록하면 조금 아까울 것 같아 깔끔하게 9월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날씨가 좀 서늘해지는 것이 아닌가. 역시 헬스장 러닝머신 위보다는 공원을 달리는 편이 좀 더 상쾌할 것 같아서 헬스장 등록은 포기했다.


그랬더니 뒤늦은 폭염이 시작되었다. 이 날씨에 뛰었다간 병원부터 갈 판이다. 폭염이 끝나고 완연한 가을날씨가 되자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떠나지를 못했다. 나도 함께 놀이터에서 두세 시간을 버티려면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즉, 오전에 운동을 하지 못하겠단 소리다.


그리고 때 이른 폭설이 오고... 그렇다. 결국 겨울방학까지 찾아온 것이다.



나에겐 징크스 같은 것이 있다. 미리미리 해야지, 싶어서 준비를 착착 해 두면 이상하게 일이 진행이 안 되는 것이다. 오랜만에 J의 면모를 발휘해서 신발까지 준비해 두었는데 자꾸 일이 꼬이면서 이제 러닝 하던 그때의 그 모습이 추억으로 바래져 버렸다.


어쩌면 나는 계획을 세워도 잘 안 되는 거, 내 마음대로라도 살아보자 싶어서 P의 삶을 동경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그런 위안을 주고 싶었는지도.


물론 운동의 중요성은 아주 잘 알고 있기에,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것이다. 어차피 그때에도 나는 운동화를 신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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