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 간의 힘의 균형이 잡힌 세계질서를 준비했다는 점에 있어 스파이크먼은 지정학의 새로운 지평선을 개척했다 보아도 무방하다. 그의 저서로는 《세계 정치 속 미국의 전략: 미국과 힘의 균형(America’s strategy in world politics: The United stated states and the balance of power, 1942)》, 《평화의 지리학(The Geography of the peace, 1943)》 및 《지리와 외교정책(1938)》, 《아시아 민족주의의 사회 배경(1926)》 등 논문이 있다. 비록 스파이크먼은 50세 되던 해에 사망했지만, 그가 살아생전 미국 정계와 군부에 미친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의 지정학 담론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스파이크먼은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힘의 균형이라 봤다. 비록 이 같은 힘의 균형은 어디까지나 강대국 간의 힘의 균형이요, 약소국의 의지는 전혀 반영되지 못하는 기계적 균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후 미국과 소련, 중국, 영국과 같은 강대국이 힘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야 말로 가장 이상적인 세계질서라고 여겼다. 《세계 정치 속 미국의 전략: 미국과 힘의 균형》에서 스파이크먼은 미국과 세계 다른 지역 간의 지정학적 의존도를 분석하며, 근대 이래 미국이 직면한 지정학적 도전(예로 들면 나치 독일이 남아메리카에서 벌인 선전 작업)을 해소하기 위해 워싱턴이 기울인 정책적 노력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일례로 라틴아메리카 대륙이 미국에 가지는 경계심과 최대 채권국가 지위를 이용한 미국의 내정간섭, 이로 인한 미국과 이들 사이의 불편한 관계와 이를 이용한 영국, 나치 독일의 개입, 그리고 이를 알아차리고 자국의 정치·군사적 역량을 동원해 나치 독일의 팽창을 저지한 워싱턴의 정치적 노력을 거론하며, 미국이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패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메리카 대륙의 지역 패권을 기초로 균형 외교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했다.
그러나 또 한편 스파이크먼은 매킨더의 주장에 상당히 강한 반감을 표했는데, 그는 매킨더가 《민주의 이상과 현실》에서 주장했던 동유럽 완충지대론을 비판하며, 서유럽 국가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차라리 독일과 소련이 접경한 상황에서 독일이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압력을 가해야 모스크바가 비로소 서유럽과의 군사 협력을 생각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스파이크먼의 매킨더에 대한 비판은 《평화의 지리학》에서 보다 두드러지는데, 여기서 그는 미국에 실질적인 위협을 가했던 나치 독일, 일본 제국 모두 반월지대(Rimland) 조직화를 기반으로 대륙과 해양 진출을 시도했음을 상기시키며, 반월지대의 패자야 말로 세계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미국은 힘의 균형 전략을 통해 반월지대에서 미국을 위협하는 세력이 등장하지 못하게 막아야 할 뿐만 아니라, 심장지대를 장악한 소련에 압박을 가하기 위해서는 연안지대에서 심장지대로 통하는 여러 전략 루트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지정학적 전략지대를 구분 짓는 방법론에 있어 스파이크먼은 매킨더와는 다른 기준점을 제시했다. 하천을 중심으로 심장지대와 반월지대의 경계선을 확정했던 매킨더와 달리 스파이크먼은 산맥과 사막, 늪지대와 같은 군사적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자연 장애물이야말로 인간의 활동을 결정짓는 공간 요소라고 봤다. 그가 보기에 하천은 퇴적과 같은 자연환경 변화와 경제 발전으로 인한 수자원 이용 등 변수로 인해 가변할 수 있는 고로, 이상적인 자연 경계선으로 삼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생각에 기초해 스파이크먼은 알프스 산맥-카르파티아 산맥-히말라야 산맥을 심장지대-반월지대 경계선으로 확정했을 뿐만 아니라, 심장지대를 장악한 소련의 군사적 압박이 훗날 세계질서를 교란하는 주된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같은 군사적 효율성과 깊게 관련 있는 스파이크먼의 지리적 공간범위 인식은 1차 세계대전 직후 발생한 전쟁 패러다임 변화와 관련이 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이후, 공군의 중요성이 부각됐을 뿐만 아니라, 해상 전투도 항공모함과 잠수함의 출현으로 인해 함대함 결전에서 봉쇄와 반-봉쇄 진영 사이의 다툼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음을 지적했다. 이 때문에 스파이크먼의 글을 보면 공군 폭격기의 비행거리와 해상 물류와 연관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 장악 여부를 끊임없이 묻는다. 일례로 스파이크먼은 소련의 주요 도시들이 모두 폭격기의 비행 반경(800야드)에 들어갈 수 있음을 지적하며, 이를 가리켜 소련의 취약점이라고 지목했다. 유럽 대륙의 제해권 문제에 있어 영국이 제해권을 가질 수 있던 요인은 이들이 지브롤터 해협, 수에즈 운하와 홍해를 장악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며, 나치 독일이 지브롤터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 북해라는 유럽 삼각형 지대를 장악한 이상, 영국과 미국 해군의 해상 봉쇄에 대항해 효과적인 반봉쇄 작전을 펼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중국에 대해서도 스파이크먼은 하우스호퍼와 같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전후 중국이야말로 서구 열강의 태평양 권익을 위협하는 국가로 성장하리라 봤는데, 일례로 《세계 정치 속 미국의 전략: 미국과 힘의 균형》에서 그는 중국의 지리적 위치가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미국과 비슷한 포지션에 놓여있음을 강조하며, 중국군 폭격기가 블라디보스토크와 산둥반도에서 일본 본토로 날아가 공격할 경우, 일본은 허망하게 무너질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평화의 지리학》에서도 스파이크먼은 중국이 통신 기술 미발달, 공업 기술력 저하 등 문제로 인해 광활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지만, 만일 전후 국민정부 시대의 경제 성장을 지속한다면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떠오를 것이며, 일본은 이를 막지 못할 것이라 예고한 바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중국의 팽창을 막기 위해 스파이크먼은 태평양 도서에 여러 군사거점을 두어 중국이 태평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파이크먼의 지정학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균형의 지정학이라 말할 수 있다. 그는 효율적인 공간 확보를 위해 이용되던 기존의 지정학적 담론을 거부하고, 강대국 간의 힘의 균형이 이루어진 새로운 세계질서를 꿈꿨다. 지정학은 이 같은 힘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도구이자, 미국의 효율적인 구대륙 개입을 위한 방법론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지정학 담론은 또 다른 문제점을 야기했다. 비록 전쟁 목표 설정을 위한 학문으로 폄하되었지만, 하우스호퍼의 지정학은 약소국 또는 지역 강국이 세계제국이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유용한 학문이었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스파이크먼이 강대국 간의 힘의 균형론을 제시한 이래, 지정학은 거대한 영토를 확보한 미국, 소련, 중국과 같은 강대국의 전유물이 되었으며, 다른 나라들은 강대국이 세계질서라는 체스 판 위에 움직이는 장기 말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연히 이 같은 힘의 균형을 중시하는 지정학 담론에서 한국과 같은 나라가 국익을 도모할 학문적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에게는 오로지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미국을 위시한 해양세력에 편입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을 위시한 중화제국 질서에 편입되는 길이다. 그리고 이조차 한국은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더 정확히 말해 스파이크먼 이래 지정학은 한국이 선택할 권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적어도 2차 세계대전 이후 확립된 지정학 담론 속에서 우리는 워싱턴과 베이징이 협상하는 과정에서 주고받는 장기말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