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서울
부산 디자인 페스티벌이 끝나고, 11월이 된 서울은 급격히 쌀쌀해졌다.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내 전시 일정에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을 준비하는 동시에, 평일 낮에는 신사동에 있는 주얼리 브랜드에서 웹디자인 일을 계속 이어갔다. 나름 강남의 패션/액세서리 분야에서 잔뼈가 굵었던 브랜드 실장님은 다행히 내 디자인 작업을 좋게 봐주셨고, 그 덕분에 웹디자인 일을 넘어 스튜디오 사진 촬영, 룩북 제작, 에디토리얼 작업처럼 다양한 경험을 쌓아볼 수 있었다. 나름 한국에서 프로들만 살아남는다는 압구정, 청담 쪽에서 이런 크리에이티브 분야에 발을 한번 담가볼 수 있었던 건 상당히 뜻깊은 경험이었다.
겨울은 생각보다 금방 찾아왔다. 그해 서울은 길거리 곳곳에서 박근혜 정권 퇴진을 외쳤고, 나라 안팎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매섭게 불어오기 시작하는 겨울바람을 버텨가며 나는 여전히 동대문, 방산시장을 제집 드나들듯이 돌아다녔고, 전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설치장비와 브랜드 제품들로 슬슬 한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부산 디자인 페스티벌, 그리고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을 준비하는 동안 학교 석사 프로젝트였던 내 브랜드는 어느새 그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나름의 개인 사업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아직 미숙한 수준이었지만 벨기에에서 학생이었던 내 직함은 이곳에서 디렉터가 되어있었고, 투자 유치, 콜라보 제안, 제안서 작성 등 어느새 회사 대표가 할만한 일들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12월,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없었던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이 끝나고, 그 열기와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았을 무렵, 나에게 더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오랜 시간 해외 자취생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었을까? 어느새 나와 부모님의 라이프 스타일은 예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고, 한국에 머무는 시간들이 한 달, 두 달 길어지며 사소한 부분들이 계속 충돌을 빚어냈다. 결국 쌓아뒀던 갈등들이 폭발했고, 큰 다툼으로 이어졌다. 그게 꽤나 깊은 상처로 남았던 나는 출국까지 앞으로 두 달 정도 남은 상황에서 결국 짐을 싸고 고시텔에 들어갔다. 왜 하필 고시텔이었냐고? 사실 예전에 재수를 할 때도 집을 나와 고시원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는데, 그 기억이 아직까지도 크게 남아있었기에 마치 몸에 밴 관성처럼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된 것 같다. 어쨌든 보증금 같은 복잡한 과정 없이 2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내기에는 그곳이 가장 심플하고 최적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8년 전 재수생때와 다를 것 없는 단칸방에 들어와 짐을 풀고 침대에 풀썩 앉아있는데 지난날 보내왔던 영광의 시간들이 전부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전시장에서 내 브랜드를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개하고, 디렉터의 이름으로 인터뷰를 하고, 투자 유치를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열변을 토하던 그 시간들 말이다. 그 모든 노력 끝에 내가 돌아온 곳은 결국 8년 전 그날처럼 여기, 고시텔 단칸방이었다. 그나마 달라진 건 그때는 갖지 못했던 작은 창문하나와 개인 화장실 옵션이라니, 씁쓸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안타깝게도 불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고시텔로 옮기고 나서 고작 며칠 뒤, 크리스마스가 되기 하루 전인 이브날 나는 오랜 시간 사귀었던 여자친구에게 이별통보를 받았다. 납득되지 않는 부분들에 대해 따지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그 당시 집을 나오면서 이미 무너져버린 내 마음은 그 어느 희망에도 기대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다 떠나버려라'라는 한심하고 못난 생각으로, 나는 그저 마음을 굳게 닫아버렸다. 근처 카페에서 만나 모든 걸 정리하고 고시텔로 혼자 걸어 돌아오던 그 길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날 만큼 잔인하리 마치 추웠다.
그 어느 때보다 화려했던 2016년이 끝나고 2017년을 맞이하는 12월 31일, 나는 1.5평의 고시텔 방에서 불꽃 소리를 들으며 혼자 새해를 맞았다. 모든 영광이 한여름밤의 꿈처럼 허무하게 사라진 후, 나는 남은 두 달을 '공허'라는 감정과 질길정도로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텅텅 비어있지만 한없이 무거운 그 감정을 그렇게 온몸으로 느껴본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벨기에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었다. 예전과는 모든 것이 달라져있을 벨기에에서 혼자의 시간이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다.
출국날이 다가오고, 오랜만에 엄마를 만나 잠시 같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영화를 보고, (라라랜드를 봤다. 보기 전까지 이별영화인줄 몰랐다.) 점심으로 횟집에 갔다. 엄마는 나를 위해 소주를 한병 주문했고 나는 아무 말 없이 한잔씩 술잔을 비웠다. 고시텔까지 데려다주는 길, 조용한 차 안에서 엄마는 갑자기 뜬금없이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를 했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너 몸 하나만 챙기면 되는 나이에 뭐가 그리 걱정이냐고, 내 상황을 꿰뚫어 본 것 마냥 밑도 끝도 없는 그 얘기를 듣는데, 갑자기 마음이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가벼워졌다. 벨기에로 돌아가서 앞으로 겪어야 할 일들, 또다시 혼자서 마주해야 할 수많은 벽들 하나하나가 너무 두렵고 걱정됐지만 난 그저 나 하나만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닌가. 책임져야 할 누군가가 있는 다른 이들의 무게를 생각해 보면 나는 불안하지만 아직 젊고, 막막하지만 가볍다. 그렇게 생각하니 걱정되던 막연한 일들이 그저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아니, 사실 보잘것없지는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또다시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이 공허할 것이고, 얼마나 이어질지 모를 긴 외로운 시간들을 버텨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들을 헤쳐나갈 수 있는 용기를 얻고 현실을 마주하기로 했다.
그리고 2월 1일, 나는 5개월간의 모든 한국 일정을 마치고 다시 벨기에에 입국했다.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