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브뤼셀
글에서 구구절절 묘사할 순 없겠지만, 한국에서 돌아온 이후로 난 브뤼셀에서 꽤 힘든 시기를 보냈다.
매일 외로운 시간들을 버텨내야 했고, 그와 동시에 타지에 사는 피로감도 이제는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곳 생활에 너무 지쳐버린 것이었다.
이제는 벨기에를 떠나고 싶었다. 이 도시의 어느 한 부분도 정겹게 느껴지지 않았고, 매일 버텨내는 하루들은 그저 고역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지 묻는다면 거기에는 또 쉽게 답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힘들게 해외로 나와 지금까지 이어왔던 여정에 종지부를 찍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물론 그동안 아무런 후회도 남지 않을 만큼 열심히 달려왔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쉽게 결정하기에는 너무 큰 결심이었다.
석사를 졸업한 그 해 여름에는 많은 지인들이 유럽에 방문해 주었다. 한국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부모님, 그리고 재영이까지 순차적으로 벨기에로 놀러 왔고, 우리 집에서 같이 머물며 브뤼셀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기도 했다. 프랑스 파리와 암스테르담, 독일, 런던 그리고 이탈리아 등, 그렇게 유럽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그들에게 좋은 곳들을 가이드해주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가 살던 유럽이 사뭇 다르게 보였다. 그동안 너무 익숙해서 느끼지 못했던 풍경들과 여유로움, 그리고 낯선 곳을 여행하며 그들이 느끼는 환희와 감탄들을 옆에서 같이 느끼고 공감하다 보니 다시 이곳의 매력을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곳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처럼 그들과 함께 여행한 약 3개월은 그동안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나를 다시 회복시켜 주었고, 새롭게 기운을 내서 시작할 수 있는 원기를 채워주었다.
그리고 9월, 한국으로 돌아간 재영이와 긴 통화 끝에 나는 한국이 아닌 파리행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연히 한국으로 오라고 말할 줄 알았던 재영이는 의외로 담담하게 파리로 가서 내가 원하는 뜻을 펼쳐보라 얘기해 주었고, 그 말이 나의 다음 챕터를 결정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결국 발렁스 학교에서 쫓겨나 궁여지책으로 벨기에에 도망(?) 쳐온 지 어언 4년 만에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우선은 프랑스 비자를 다시 얻기 위해 다녀야 할 학교 기관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학비가 비교적 비싼 어학원을 다시 등록할 생각은 없었고, 무작정 파리 소르본 대학교에 석사 신청을 했다. 이미 석사 학위를 받은 상태에서 학교를 다시 다닐 계획은 아니었지만, 비자가 필요했으므로 나름 신중하게 학업계획서와 자기소개서, 포트폴리오들을 정리해서 제출했다. 1년 사이에 내 자기소개서에는 상당한 전시 이력과 꽤 좋은 학력들이 채워져 있었고, 몇 주 뒤 생각보다 간단하게 소르본 대학교 석사과정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다닐 학교가 정해졌으니, 비자를 새로 신청하기 위해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처음 프랑스로 가기 위해 겪었던 비자 발급 과정들: 캠퍼스 프랑스에서 면접을 치르고, 프랑스 대사관에 약속을 잡은 뒤 비자를 발급받고, 외교부에서 서류에 아포스티유를 받는, 그 일련의 과정들을 다시 전부 똑같이 진행하다 보니, 그저 설렘 하나만으로 이 모든 것들을 준비하던 5년 전 그때가 생각이 났다. 정말 햇병아리 같던 시절 인터넷으로 하나하나 정보를 찾고, 모르는 불어를 열심히 번역해 가며 서류를 준비하던 그때에 비해 뭔가 한결 덤덤하고 능숙해진 지금의 내가 신기해서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불허전 프랑스식 행정 덕에 준비과정에서 몇 번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5년 전 비행기를 타고 아무것도 모른 채 프랑스 리옹으로 떠났던 2012년 12월. 그때보다는 더 성숙하고 담담하게, 하지만 여전히 기분 좋은 설렘과 흥분을 간직한 채 2017년 12월,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계속 살고 있는 애증의 도시,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파리에 사는 브랜드 디자이너, 다양한 Inspiration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