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시립현대미술관
약 5년 동안 화실을 다녔었다. 화실에는 그림을 평생 동안 그리고 공부하신 젊은 할머니가 계셨는데, 미술사에 대해서는 웬만한 미대 교수님만큼 해박한 지식을 갖춘 분이었다.
어느 날, 파란색 시원한 무늬가 그려진 스커트를 입고 화실에 갔는데, 그분이 ‘어머, 스커트가 라울 뒤피 그림 같아’ 하셨다. 그때 처음 알게 된 ‘라울 뒤피’의 작품들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이렇게 밝고 경쾌할 수가. 뒤피의 예술이 반드시 심각하고 무거울 필요는 없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동시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후원자이자 작가였던 거트루드 스타인도 뒤피의 매력을 알아봤다.
“One must meditate about pleasure. Raoul Dufy is pleasure.”
그녀는 무겁거나 철학적으로 과장되지 않은 뒤피의 작품에서 기쁨, 즐거움, 삶의 쾌적함 같은 순수한 감각적 즐거움을 핵심으로 봤다. 세잔처럼 구조를 탐구하는 방식도 아니고, 피카소처럼 분석적이지도 않지만, 색채 자체가 만들어내는 리듬과 기쁨에 충실한 스타일은 뒤피가 독보적이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라울 뒤피의 대표작, 높이 10m, 길이 60m에 달하는 대작《전기 요정》이 이곳 파리시립현대 미술관에 있다.
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파리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어제까지 여름 날씨였는데 가을처럼 추워졌다. 파리지앵들은 모직 재킷 또는 코트를 입고 나왔다. 버스에 내려 미술관에 가는 길에 오들 오들 떨리는 와중에 오렌지불빛이 반짝이는 블랑제리가 눈에 들어왔다. 잠깐 들러 크로와상과 따뜻한 카페 라떼를 한잔 마셨다. 몸이 훈훈해져서 힘이 났다.
미술관 출입구와 연결된 홀에서 바로 라울 뒤피의 전기 요정이 걸린 방이 연결된다. 실물로 보니 더 좋았다. 유화라고 하기에 믿기 어려운 맑고 화사한 컬러의 경쾌한 변주가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붓 터치가 참 좋았다. 담율이는 색깔이 꼭 4계절을 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전기 요정》은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제작된 초대형 장식 벽화이다. 제목 그대로 ‘전기’를 의인화해 빛과 과학, 인간 진보의 역사를 찬양하는 작품이다. 뒤피는 전기를 하나의 “요정”처럼 상상하며, 인류 문명의 발전을 환상적이고 화려한 색채로 표현했는데, 고대부터 20세기까지 과학과 전기의 발전을 이끈 약 100명 이상의 과학자와 발명가가 등장한다. 두서없이 여러 소재들이 섞여 있는 것 같지만 구획에 따라 주제가 흘러가고 있다.
1. 왼쪽 – 고대부터의 과학 발견
• 고대 철학자부터 근대 과학자까지
약 100여 명의 인물이 등장
• 전기 발견과 관련된 과학자들도 포함
(예: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에디슨 등)
2. 중앙 – 전기의 여신(요정)
• 밝게 빛나는 여성 형상이 상징적 존재로 등장
• 자연의 힘과 전기의 에너지를 상징
3. 오른쪽 – 현대 산업과 도시
• 발전소, 전선, 조명, 기계 등
• 전기가 바꾼 현대 사회의 모습
입구의 라울 뒤피 그림을 즐겁게 감상하고 난 뒤, 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은 파리 시에서 운영하는 전시장으로 20세기 이후 현대미술을 중심으로 8,000점 이상의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는 거대한 미술관이다. 모딜리아니, 마티스, 베르나르 뷔페, 마리 로랑생 등 국내 전시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화가들의 그림이 가득이다. 몇 년 전, 오페라하우스 한가람미술관에 마리 로랑생 전시가 왔을 때, 표를 사는 줄조차 너무 길어서 그냥 돌아 나온 적이 있다. 그래서 이 파스텔톤의 여인 초상화가 더 반가웠다. 가장 재미있는 그림으로 고른 것은 빅토르 브라우너. 리듬체조에 푹 빠져 있는 아이는 그림 속 괴생명체는 옆돌기를 잘할 수 있겠다며 지구 끝까지도 돌겠다고 했다. 베르나르 뷔페의 대형작품들도 많았었는데, 뾰족뾰족한 선들과 무표정한 등장인물의 표정에서 전후 세대의 암울함이 그림을 넘어 그대로 전달되었다.
대부분의 미술관은 작품보호를 위해 창이 없는 '화이트 큐브' 형태이지만, 이곳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의 전시장에는 큰 창이 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길게 난 창 사이로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데, 바로 옆 팔레 드 도쿄와 에펠탑이 보인다. (에펠탑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장소로 잘 알려진 트로카데로 광장까지 도보로 10분이면 충분하다.) 이곳은 입장료가 무료! 임에도 오르세, 오랑주리 미술관보다 쾌적한 전시환경과 적은 관람객이 관람을 더욱 즐겁게 한다. 때마침 미술관과 팔레 드 도쿄 사이 안마당에서 패셔너블한 인플루언서가 릴스를 찍고 있었다. 줄리앙 오피의 영상작품 마냥 재미있게 구경하다가 또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의 또 하나의 대표작을 뽑으라면 앙리 마티스 《춤 》이 아닐까 한다.
앙리 마티스의 이 작품은 미국 반스 재단 건물에 설치하기 위해 제작된 벽화라고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티스의 작품 <춤>- 파랑 바탕에 사람들이 손을 잡고 돌고 있는 그 작품보다 20여 년 뒤에 그려진 작품인데, 파란색 <춤>과 비교하면 몸의 형태가 점점 더 단순해지고 구도가 리드미컬해졌다. 전시장에는 무채색 버전과 색이 들어간 최종 버전이 있는데, 무채색 버전은 형태와 구도를 여러 번 수정하며 제작 과정을 연습해 본 습작이었다. 그래서 연필 자국도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다음 공간으로 넘어가면 컬러가 들어간 완성본이 나오는데, 공간에 실제로 설치될 최종 벽화 버전이다. 실제 반스 재단 건물과 설치하게 될 구조에 맞추기 위해 축소 모형을 걸고 사진을 찍어가며 실험했고, 완성 후에도 캔버스를 잘라 다시 이어 붙이며 설계, 수정, 재구성의 과정을 거쳤다.
"엄마, 마티스처럼 유명한 화가도 이렇게 연습을 많이 하고 그림을 그려?"
"그럼! 연습 없이 얻을 수 있는 건 없어"
재미있는 관람을 마치고, 아쉬워서 한번 더 들른 라울 뒤피의 <전기 요정> 그림 앞에서 담율이는 자기만의 그림을 그렸다. 전에 그린적 없던 새로운 구도에 디테일한 요소들이 가득 들어간 귀엽고 사랑스러운 그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