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여름밤은 BBC PROMS와 함께

by 풸롱

켄싱턴 가든을 가로질러 BBC PROMS가 열리는 로열 앨버트홀로 향했다. 담율이는 공원을 가로질러 오면서 도토리를 잔뜩 주웠다. 런던의 가을은 빨리 찾아오는지 크기가 아주 크고 잘생긴 초록 도토리들이 바닥에 잔뜩 떨어져 있었다.

도토리를 주우며 앨버트홀 가는길

주워온 도토리를 손에 들고 프롬스 입장 게이트 앞에 늘어선 줄에서 입장 시간을 기다렸다. 뒤에 선 아저씨가 담율이에게 “너 도토리 모으니?” 하며 말을 걸었다.

‘제이 Jay’라는 작고 귀여운 새가 있는데, 그 새가 너처럼 도토리를 모으지 하고 얘기해 주신다.

그 이야기를 듣고 담율이가 자기 영어 이름을 이제 제이로 바꾸겠단다.

바이올렛- 스파클링-제이까지

구글링해 본 ‘제이’라는 새는 정말 작고 귀여운 파랑새였다. 도시 곳곳에 풍성하게 펼쳐진 공원과 집집마다 정성스레 가꾸는 정원 문화 때문일까. 자연 감수성이 높은 그들의 삶이 근사해 보였다.


도토리를 치마폭에 모으는 아이와 도토릴 모으는 블루 제이



한 달 내내 매일 이어지는 프롬스 공연 스케줄이 오픈되었을 때, 미리 시간과 주제가 적당한 공연을 골라 예약해 놓았다.



BBC Proms는 매년 여름 런던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클래식 음악 축제다. 1895년에 시작되어 8주 동안 (보통 7월 중순 ~ 9월 중순) 이어지며, 주 공연장은 로열 앨버트 홀 Royal Albert Hall이다. PROMS라는 이름은 ‘Promenade’(산책)에서 유래하였는데, 서서 자유롭게 듣는 저렴한 입석 티켓과 ‘Last Night’의 축제 분위기로 특히 유명하다.


프롬스 공연에서는 이름에서 유래된 것처럼 공연 전날 열리는 스탠딩 좌석이 가장 유명하긴 하다. 5파운드라는 저렴한 가격에 가장 무대와 가까운 중앙 홀에서 ‘서서’ 공연을 자유롭게 관람한다.

2007년 프롬스에 처음 가보았을 때, 이런 자유로운 클래식 공연 분위기가 충격적이었다. 사람들은 하이힐에서 내려와 클래식 선율에 몸을 자유롭게 흔들었다. 나도 꼭 저 속에서 같이 리듬을 타보리라.

그런데, 사람들 마음은 다 똑같나 보다. 스탠딩석 티켓팅이 생각보다 치열하고 꽤 복잡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아이도 함께하니 적당한 좌석을 미리 예매해야겠다 싶었고, 그래서 무대 뒤를 둘러앉는 합창석을 예매했다. 공연은 화려한 선율과 고난도 테크닉이 필요해 아이도 덜 지루해할 것 같은 라흐마니노프 공연으로 선택했다.


합창석에서 본 오케스트라와 관객석

합창석은 BBC Proms를 즐기기에 특히나 좋은 자리다. 관객석을 마주 보고 있어 연주자들의 열정적인

손놀림과 함께 자유로운 관객석의 분위기를 함께 즐길 수 있다. 오케스트라를 뒤에서 보는 게 색다른 재미였는데, 악기들마다 악보 첫 페이지를 색깔이 다른 종이로 구분하고 있었다. 연주 중 연주자들이 다급하게 악보를 넘기는 모습도 재미있고, 지휘자의 귀여운 모습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것도 재미 요소였다.

관람객들은 피아노가 들어갔다 나올 때 구령을 붙여줬고, 2부가 시작될 때 입을 모아 구호를 외치기도 했는데, 그 분위기 자체가 너무나 발랄하고 쾌활했다. 이런 클래식이라면 네 시간도 다섯 시간도 즐겁게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Paganini Variations

Friday 8 August 2025 6:00 PM

Rachmaninov – Rhapsody on a Theme of Paganini


이탈리아 피아니스트 Beatrice Rana가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라흐마니노프의 대표작을 연주했다. 담율이는 반짝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피아니스트가 예쁘다고 좋아했다. 피아니스트가 화려한 음악을 연주하고 난 뒤 박수가 끊이지 않았고, 피아니스트는 세 번째 인사를 하고는 앵콜곡을 연주했다. 프롬스의 관객들은 앵콜곡 없이는 연주자를 보내주지 않는다더니 사실이었다.


원형 안쪽 관람석이 스탠딩 석

한 시간 연주가 끝난 뒤 잠깐 쉬는 시간 동안 레모네이드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먹었다. 와인도 좋을 것 같았으나 기댈 곳은 없고 책임져야 할 아이가 있으니 알코올은 아쉽지만 허용되지 않는다.

두 시간의 연주를 보는 동안 담율이는 한 번도 칭얼댄다거나 몸을 배배 꼰다거나 하지 않고 끝까지 재미있게 관람했다. 9살 아이, 또 이렇게 자랐구나 느끼는 순간이었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밖에 나오니 해가지지 않고 밝은 게 너무 좋았다. 해가 점점 내려와 어스름이 깔리는 맑은 네이비빛 하늘 아래, 빨간색 이층 버스가 지나다니는 런던의 어느 거리에서, 노랑 가로등 불빛 아래 담율이와 손을 잡고 걷는 이 늦여름밤이 그림처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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