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사랑
ㅣ10년만의 한국 방문ㅣ
2012년 우리 세식구는 10년 만에 한국을 다시 방문했다. 크리스마스 때였는데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춥다고들 했다. 시골에 가서 아이들 아빠 산소를 방문하고, 고등학생으로 자란 아들과 딸을 시댁 친지들에게 새삼 다시 인사를 드렸다. 서울로 올라와 명동에서 난타공연을 보고 북촌을 거닐면서 우리는 한국의 변화상을 재미있고 다양하게 즐길 수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한국에 있다는 그 자체가 내겐 벅찬 감동이었고 또 무척이나 행복했다. 그 반면, 아이들은 한국을 관광 온 것 마냥 재미있게 즐기는 것 이외엔 별 다른 느낌이 없어 보였다.
ㅣEmpty Nestㅣ
미국에서는 자녀가 대학을 가고 나면 "Empty Nest(빈 둥지)"라고 부모의 허전한 마음을 표현한다.
한국 방문때 느낀 아이들의 반응이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아서 나를 성가시게 했었는데 딸애가 대학을 가고 혼자 덩그러니 "empty nest"에서 지내던 어느 날 "내가 한국에서 산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집에서 항상 김치 찌개와 고등어 굽는 맛난 향이 나고 엄마가 매일 잠을 자고 아침을 맞이하는 곳, 한국을 아들, 딸이 엄마, 아빠의 나라고, 또 자신들의 뿌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ㅣ다시 한국으로,ㅣ
23년 전, 한국에서 미국으로 갑작스러운 이민을 떠난 것처럼, 나는 또다시 가방을 싸고 별다른 계획 없이 한국으로 귀국했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는 IMF 직후로 한국사람들의 정서가 많이 불안해 있었다. 6년 전 내가 다시 돌아온 한국은 정말 놀라울 만큼 안정이 되어있었고 또 선진국의 대열로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인격이나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도 많이 향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운이 좋게 나는 한국에서 직장을 얻어 재미난 일을하며 안정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다음 해 아들은 결혼을 하였고 미국인 부인을 데리고 한국에 와서 본인이 태어난 나라를 보여주고 함께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또한 딸애가 대학을 졸업하고 갭이어를 지내는 2년 동안 한국에서 생활을 하도록 뒷받침을 해 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들이 이렇게 일찍 결혼을 할지도, 갑자기 코로나가 터져 바쁘게 사는 딸애의 인생에 2년의 공백기간이 생길 거라고 내가 어찌 알았을까만은 나의 선견지명은 기적처럼 "자식에게 뿌리를 심어주겠다는 "나의 소망"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주었다.
ㅣ미국내 손주에 대한 조부모의 사랑ㅣ
딸애가 고등학생 시절 수구를 할 때 가끔 거리가 먼 학교에서 시합이 있을 때는 방과 후 4시쯤 학교에서 출발해야 한다. 주로 일을 하는 부모들이 라이드를 하러 오기가 어려운 시간이다. 이 때는 할머니 부대가 동원되어 학생들을 서 네 명씩 한차에 태우고 시합장으로 달린다. 허리를 굽혀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내게 "I am hapy to do it! 즐거이 하는 일이야 "라 하시며 내 어깨를 툭툭 치시는 백발의 할머니, 난 그 할머니를 보며 손녀와 함께라면 뭐든지 할 것 같은 할머니의 의지와 행복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ㅣ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 - 첫손주ㅣ
코로나가 처음 중국에 이어 한국에서 발병을 한 2020년, 윤달이었던 2월 29일, 나의 첫 손주가 태어났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러 8,000킬로 상공을 날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혹 내게 코로나 바이러스가 묻어왔을까 걱정이 되어 손주를 품 안에 안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왔던 아픈 기억이 있다.
나의 손주는 워싱턴주 끝자락에 위치한 동화작가 앤더슨의 이름을 딴 앤더슨 섬에서 1000명의 거주자 중 가장 어린 주민으로 살고 있다. 키가 큰 잣나무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태평양 바다자락에서 수영을 하다가 배가 고플 때면 주변의 야생 블랙베리를 맘껏 따먹으며 하루를 보낸다. 서울의 천마루 숲에서 매일을 보내는 내가 손주를 만나러 갈 때는 명동에서 출발해 버스, 비행기, 자동차,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ㅣ결론 - 다시 미국으로,ㅣ
그렇게 손주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뒤로하고 한국에서 일에 열중하던 어느 날,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아들은 아기가 너무 크기 전, 할머니와의 좋은 추억을 좀 더 많이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의 말을 내게 전했다. 아, 내 맘속 깊은 곳에 쌓인 미안함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할미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나 자신에게 묻기 시작했다. 젊은 가정이 나라를 바꿔 자리 잡기는 쉽지 않으니 몸 가볍고, 이동성 좋은 내가 다시 미국으로 가기로 맘먹었다. 한국인 아빠와, 미국인 엄마 사이에 태어난 손주가 이중 아이덴티티를 잘 받아들이고 균형 있는 동, 서양의 문화 속에서 성장한다면 좀 더 오픈 마인드를 가진 아이로 자랄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내 역할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까지 나의 인생, 외국 생활에서의 체험을 나눈 글들과 함께 해 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처음으로 글을 쓰는 내가 계속 글을 써 나갈 수 있도록 응원해 주신 분들의 조용한 서포트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Halmi, my cars and helicopter are telling me they are hungry, we need to give them breakfast. 할머니, 내 차랑 헬리콥터가 배고프데요, 아침을 줘야 해요." 라며 스크램블에그와 팬케이크를 자동차와 헬리콥터에게 떠먹이는 손주를 보며 젊은 할미의 손주를 위한 내리사랑이 이 세상 어떤 직업 보다 더 영광이고 행복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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