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또 감사
24년 전 오늘, 다가올 2000년을 준비하면서 온 세상은 그야말로 혼돈에 휩싸이고 있었다. Y2K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하면서 며칠후면 세상의 모든 전자 장치와 시스템이 멈추고 현대사회는 나락으로 떨어질 거라며 전 세계적 재앙을 예견하는 목소리로 밀레니엄의 혼돈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사람들이 쌀, 음식과 물사재기를 하며 전 세계가 아픔을 겪는 동안 내 인생에도 일어나지 말아야 할 큰 사건이 일어났다. 남편의 차가 아침 출근길에 도로의 살얼음 위에서 미끄러져 앞 공사 차량을 받고 남편은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하였다. 뉴스의 사건 사고 소식에 남편의 사망 소식이 TV에서 들리고 아나운서는 젊은 여인이 어린아이들과 남게 된 안타까운 사연을 전했다. 뉴스에 나오는 황망한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세 살이 갓 넘은 아들은 상주 옷을 입고 장례식장에서 아빠 제사상에 식사와 커피를 꼬박꼬박 챙기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상황을 알 리가 없을 텐데 마치 본인의 임무를 이해한 듯 아들은 충실히 상주 노릇을 해냈다. 남편의 5일장이 끝나고 관을 들고나갈 때 그 관을 끌어안고 한없는 통곡을 한 그날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전라도 영광 산자락에 관을 묻을 때 한국 전역에는 하얀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감기가 심해 따뜻한 녹차를 끓여 보온병에 가지고 나간 남편은 몇 시간 후에 차디찬 몸으로 내 품에 돌아왔다. 갑작스레 생긴 남편의 빈자리를 인정하기는 정말 너무 힘들었다. 반대쪽 수화기에서 "나 지금 출발할게"라는 목소리가 들릴 것 같아 전화벨이 울리면 먼저 달려가서 전화를 받고 곧 실망하고 뒤돌아서는 생활은 6개월이 넘게도 계속되었다.
불교 집안의 나의 아버지는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 네가 이런 고행을 겪는다"라며 마음 아파하셨다. 이해는 가지만 내가 그 상황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아버지의 딸을 위한 아픔은 나를 더욱 힘들게 하였다. 이 시점에 한 친구가 뜬금없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친구는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계획하고 계시니 우리는 걱정 없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돼"라고 나의 휑한 눈을 바라보며 내게 교회가 기를 권유했다. 미래를 계획해 주고 인도해 주는 거니 그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난 별생각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막연하게 미국에 올 계획을 세우긴 했지만 젊은 여성이 미국 오는 비자를 받기는 쉽지 않았다. 기도와 행운의 협연으로 나의 미국 이민은 정말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처럼 불가능이 가능해졌다. 미국에 도착하고 교회 집사님들께서 이삿짐 나르는 것과 우리 가족이 미국에 정착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다.
-이 땅 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나는 바쁜 와중에도 새벽기도를 나갔고 찬송가 가사를 생각하며 예수님을 벗 삼아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나와 언제나 함께 뛴다고 생각하며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혼자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미국 생활을 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한국에 있었어도 쉬운 인생은 아니었을 테지만 아이들을 혼자 키우는 어려움 이외에도 언어의 어려움, 다른 인종들과 부대끼며 생겨나는 차별로 육체적, 정신적 힘듦이 빠르게 나를 건강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차 안에서 서러움에 벅차 울고 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내 생각의 문을 두드렸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남편을 네게 선물할 것인데 네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내가 이 이려움을 통해 너를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이 이야기를 듣고 "그렇구나,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준비해 주시고 나를 훈련을 하시는 거구나"라고 생각하니 슬픔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그럼 어떻게 이 훈련을 잘 따르고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을 배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내 마음에 밝은 등불이 켜졌다.
그 날이후부터 어려움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완전히 마뀌였다. 그 이후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를 교육시키기 위해 보낸 특별사자라는 생각으로 그들과의 인연을 소중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라가 다른 민족의 사람들이 나의 부모, 언니가 되어 어려움을 도와주고 고민을 함께 나누어 주었다.
그렇게 나의 미국 생활은 한국 교회를 통해 시작되어 훗날 미국 감리교회를 다니면서 생활 속의 종교로서 기독교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달러 1 센트 동전에 "In God We Trust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믿는다"라고 쓰여 있듯이 기독교가 주인 미국 종교는 그 권위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다양성을 너그러이 인정하는 독특함을 느낄 수 있었다. 미국 남부의 교인들은 혹 인생에 문제가 생기면 "What would Jesus do in situation like this?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행동하셨을까?"를 스스에게 질문하며 생활 종교를 지켜나가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내가 주일날, 한국에서 어린 시절 겪은 불교 철학을 소개하도록 시간을 할애할 정도로 오히려 타 종교에 오픈되고 자유로운 환경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난 24년간 내가 만난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한 선한 분들이셨다. 그들은 나를 사랑으로 감싸주었고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 나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이 분들의 도움으로 난 미국에서 잘 적응할 수 있었고 아무런 뜻 없이 온 미국 이민에 나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지난 24년을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인생의 굴곡을 따라 생활하는 동안 내 나이도 어느덧 오십 살이 훌쩍 넘어섰다.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이 되면 그간 내가 한 인간으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주신 많은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이 느낀다. 우리를 두고 먼저 떠나긴 했지만 서른 셋의 나이에서 늙음을 멈춘 젊은 남편을 그리워 하는 마음도 여전하다. 마음씨 선한 우리 남편처럼 나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따뜻한 손길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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