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일 차 / 드골공항~산티아고 프랑스길 출발지인 생장까지)
100세 나이를 모범적으로 살아오신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60세 이후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시기를 "70대"라고 언급했다. 그는 이 시기가 인생의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깊이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했다. 70대에는 자신이 이룬 것들에 대한 성찰과 함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욱 소중히 다지는 시기로 보았다.
나는 그분의 생각처럼 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제삼자의 눈에는 노후를 너무 피곤하게 살고 있다면서 쉬엄쉬엄 즐기며 살라고 충고하는 친구도 있다. 하지만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을 바라보고 싶지 않아 아내와 함께 산티아고 프랑스 순례길 800km를 33일간 완주하자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나와 아내는 취미가 사뭇 다르지만 ‘여행’ 하나만 공통된다. 언제 어디로 얼마간 여행할지는 서로 의견이 달랐기에 몇 달 동안 설왕설래만 거듭했다. 3년 전에 아내와 함께 중국 자유여행을 했을 때 내조를 톡톡히 받았기 때문에 아내가 여행 준비를 하도록 전권을 위임하였다. 나는 세례를 받기 위해서 가톨릭 교리 공부를 시작했다. 세례 때문에 순례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은 지도 신부님의 허락을 받아 아내를 따라 순례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산티아고 프랑스 길은 인천공항 ▷ 드골공항까지 8965km를 비행기를 타고 가서 ▷ 드골공항~ 바욘까지는 800km는 고속버스로 이동하여 ▷ 순례길 출발지인 생장피드포트~산티아고 대 콤포스텔라까지 800km는 걸어야 한다.
‘인천공항’~ 파리 ‘샤를드골공항’으로 가는 항공편을 일단 국적기를 이용해야 했다. 공무원 신분이라서 국적기 이용이 곧 ‘애국’이라고 강제되던 시절부터 열심히 비축해 두었던 항공마일리지를 이번 기회에 써먹기로 했다. 마일리지 소진이란 과제만 없었더라면 인터넷 파도를 타고 저가항공을 찾아서 예약을 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번에 국적기를 공짜로 타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인천공항에서 파리 드골공항까지 각기 다른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아내는 KAL를 타고 드골공항의 제2터미널에, 나는 ASIANA를 타고 제1 터미널에 1시간 시차를 두고 드골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우리는 공항 사이트 내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남들 눈에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배낭여행이었다.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부부가 왜 따로 나가느냐고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
우리는 비교적 해외여행을 자주 했기 때문에 외국의 공항에서 재회하는데 부담을 별로 느끼지 않았다. 인천공항에서의 ‘이별’의 슬픔을 하룻밤이 지난 다음 드골공항에서 ‘만남’의 기쁨으로 대체함으로써 약간의 비정상적인 스릴을 맛보기로 했다. 우리는 드골공항에서 극적인 해후를 함으로써 지난 40년간 메말라가던 부부의 낭만과 사랑을 재충전하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먼저 드골 공항 내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여 1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남모르는 배낭여행자를 만났다. 생전 처음으로 해외 배낭여행을 나왔다는 50대의 용감한 한국의 중년 아줌마였다. 세계적으로 그 부랜드를 인정하는 그룹의 멤버였다. 체구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 보르도를 경유하여 생장으로 가야 하는데 4시간째 드골공항에서 헤매고 있다며 수심이 가득 찬 얼굴로 나더러 천사가 되어 달라는 눈빛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위해서 최대한의 헌신과 봉사를 자원했겠지만 오늘은 과거의 오늘이 아니라서 자중자애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시간 후에 도착할 아내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언감생심이었다. 파리로 유학 와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다는 패키지 관광가이드에게 그녀를 인계하는 것으로 나의 흑기사도는 마침표를 찍었다.
아내를 드골 공항 청사에서 하루 밤 만에 만나 애정이 넘치는 포옹을 깊게 하고 나서 가까운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때웠다. 고속버스가 출발하려면 네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해도 '시간 부자'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기다림은 약과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공항 호텔 로비에서 코로나로 쓰러진 여인이 911 구급차에 실려 가는 모습을 보면서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은 긴장감으로 동태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하느님께 무조건 “우리 부부의 자유여행을 안전하게 할 수 있도록 돌봐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시간을 길게 가지며 버스를 기다렸다.
며칠 전, 아내는 파리 드골공항에서 산티아고 프랑스 순례길의 출발지인 생장피드 포르(St Jean Pied de port)로 가는 중간 기착지인 바욘까지 가는 네 가지 방법을 표로 정리해서 나에게 브리핑했다. 해외여행 준 전문가다운 아내의 깔끔한 준비성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행복해서 아내와 백년해로 할 생각을 다시 한번 다짐했다.
드골공항에서 비행기를 환승하여 바욘에 가까운 ‘비아리츠’ 공항으로 간 후에 바욘 역으로 이동하는 방법, 드골공항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바욘 역으로 직접 가는 방법, 드골공항에서 파리 시내 몽파르나스 역까지 이동하여 그곳에서 TGV를 타고 바욘 역으로 가는 방법, 드골공항에서 파리 시내 고속버스터미널까지 이동한 후에 고속버스를 타고 바욘으로 이동하는 방법에 대하여 각각의 장단점을 표로 만들어 보여주고 나더러 선택하라고 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민주 지사형 아내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외치고 싶다. 비난하고 손가락질을 받겠지만 등신 같은 내 마음은 들뜨기만 했다.
한국인 산티아고 순례자들은 대체로 드골공항에서 파리 시내의 기차역인 몽파르나스 역까지 지하철, 버스, 항공사 버스 편으로 이동한 후 파리에서 1박을 하고, TGV를 이용하는 방법을 채택하는 추세라고 한다. 인천공항을 출발한 아시아나 항공 비행기가 드골공항에 오후 17:50분에 도착하기 때문에 바욘역 행 TGV를 바로 탈 수 없다는 이유다.
그렇다면 파리에서 들어가서 하룻밤 투숙하며 ‘파리에서 맥없이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바욘으로 떠날 수는 있지만 그럴 경우에는 숙박비가 추가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 방법은 우리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우리는 파리를 과거에 세 번 관광을 경험한 터라서 굳이 파리에 들릴 필요가 없었다.
드골공항에서 곧장 바욘역 행 심야 고속버스를 12시간 타고 가기로 했다. 네 시간 동안 공항에 있는 시설들을 기웃거리다가 지쳐서 휴대폰 게임을 하면서 기다린 끝에 고속버스를 타고 프랑스 남녘에 있는 ‘바욘’으로 이동했다.
나는 열두 시간 동안 버스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 대안은 여러 가지이다. 휴대폰으로 영화를 서너 편 보거나 산티아고 인문여행에 필요한 스페인어 기본회화를 공부를 하는 것도 괜찮을 성싶었다.
(좌)(우) 우리가 12시간 탄 고속버스
스페인은 유럽 대륙의 남서부에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하고 있는바, 북쪽으로는 프랑스와 안도라, 서쪽으로는 포르투갈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지중해와 대서양에 면해 풍부한 해안선을 가지고 있으며, 북아프리카에 붙어 있는 세우타(Ceuta)와 멜리야(Melilla)라는 두 개의 자치 도시까지 이 나라 영토에 속한다.
이 나라 지형은 북쪽에는 험준한 피레네 산맥, 중앙에는 메세타 고원 그리고 안달루시아 지방의 평야와 같은 다양한 자연환경을 보유하고 있다. 스페인 지도를 놓고 보면 그 모양이 소머리와 닮은 꼴이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면적을 가진 나라로, 대한민국 남한의 5배 정도이고 한반도 면적보다는 2배나 크다. 2021년 기준으로 스페인 인구는 4,700만 명이고 평방 km 당 인구밀도는 92명이다.
우리나라 인구는 5100만 명으로 평방 km 당 510명의 인구밀도이므로 스페인은 우리의 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유럽에서는 농업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해외로부터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이 나라는 왕년에 해양강국으로서 남미에 엄청난 식민지를 개척해서 남미가 온통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만든 나라이다.
산티아고 순례길과 관련된 이 나라 고대 역사를 살펴보면 이베리아인, 켈트족, 로마인, 그리고 게르만족과 같은 다양한 민족들이 거쳐 간 지역이다.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는 ‘히스파니아’라고 불렸다. 그 영향으로 로마의 문화와 기독교가 전파된다.
8세기에는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고 '알 안달루스'라는 이슬람 국가가 성립되었다. 이 시기에 들어온 이슬람 문화와 과학은 이 나라를 번성하게 만들었다. 기독교 세력은 약 800년 동안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국토회복운동'이라 부르는 이른바 ‘레콩키스타’를 꾸준하게 수행한 결과, 1492년 그라나다를 정복하면서 이베리아 반도 전체가 기독교 국가로 통합된다.
스페인은 17개의 주(Comunidades Autónomas)와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세우타(Ceuta)와 멜리야(Melilla)는 자치 도시로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주 밑에는 기초지방자치단체 도시와 마을이 8131개가 있는데 이들의 평균 인구는 5천명 정도이고 그 평균 면적은 62평방키로미터로 서울의 9.6분의 1수준이고 우리 기초지방자치단체의 평균 면적의 7분의 1 수준이다. 기초지방자치단체는 법률이 인정한 자치행정권을 가지고 있으며, 지방자치단체는 지방의회와 자치단체장을 선거로 뽑아 경영되고 있다.
산티아고 프랑스 길(El Camino Francés)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가장 유명한 순례길이다. 프랑스 변두리에서 출발하여 스페인을 가로지르는 거리가 800Km 정도 되는데 170여 개의 마을과 가톨릭 종교시설 300개소를 지나가야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북부지역 중에서 나바라, 라 리오하, 카스티아 이 레온, 갈리시아의 4개의 광역자치주를 통과하게 된다.
유네스코는 1993년 이 순례길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보전을 시작한 지 30년이 되고 있다.
고속버스 운전사가 12시간을 혼자서 운전할 수 있을까? 운전기사를 너무 혹사한다고 생각했다. 앞자리에 앉은 나는 운전사가 조는지 안 조는지 명예 감찰관이 되기로 했다.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4시간 만에 운전기사가 교체되어 운행했다.
그러면 그렇지! 프랑스처럼 노조가 센 나라에서 운전사를 마냥 혹사시킬 수는 없었으리라. 저녁 9시 30분에 드골공항을 고속버스를 타고 떠나 이튿날 오전 8시 30분쯤에 낯선 바욘역에 도착하였다.
프랑스 바욘역에서 순례길의 출발지인 ‘생장 피드 포르'(Saint-Jean-Pied-de-Port: 이하 ‘생장’이라고 표기한다)까지는 기차나 버스를 이용하는 방법 중에서 전자인 기차를 타고 이동할 생각으로 기차표를 예약했다. 바욘역에서 14:55 생장으로 가는 기차표를 산 뒤에 남은 시간, 5시간 동안 무엇을 하면 잘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고민할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
경외하는 아내가 준비한 계획은 ① 비아리치 해변 산책 ▷ ② 바욘 대성당 관광 ▷ ③ 점심 식사 ▷ ④ 유적지 및 생태공원 탐방 후 ⑤ 바욘역에서 생장으로 이동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이 지방의 관광 자원을 잘 모르기 때문에 아내의 스케줄을 비틀 엄두도 내지 못했고 딱 부러진 대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아내가 짜둔 한나절의 활동계획에 무조건 순응하는 것이 아내를 사랑하는 지름길을 택하기로 했다.
바욘 시내 관광을 주마간산으로 마치고 바욘역에 도착해서 보니, 예약된 기차 편은 철도노조의 파업으로 운행을 중지한다는 안내가 전광판에 영어와 불어로 떠올랐다. 예상치 못한 사태라서 우리는 바욘 역사에서 새우잠을 자게 되지 않을까 걱정되어 내심 당황했다. 다행히 같은 처지가 된 프랑스 국적의 순례자들로부터 철도파업은 자주 경험하는 사태라며 철도회사가 대체 수단을 마련해 줄 거라며 걱정은 붙들어 매라고 해서 안심했다.
순례자들은 정해진 시간에 철도회사가 마련한 ‘바욘행 셔틀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81세의 프랑스 노인은 순례길을 4번이나 걸었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하도 기가 막혀 그 이유를 물었더니 한 번도 완주를 못했기 때문이란다. 즉, 구간 구간을 잘라서 일부만 걸었다는 얘기다.
불맹(불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인 나로서는 영어를 사용해 주기를 간청했더니 노형은 약간 당황해하면서 영어로 떠듬거리며 자신의 생각을 나에게 강제로 전달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코로나로 때문에 버스 안에서는 마스크를 써야 하는 승객의 의무를 팽개치며 마스크를 턱 밑에 걸치고는 능숙한 프랑스어에다 서툰 영어를 섞어서 설명을 계속했다. 그는 왜 자기가 소귀에 경을 읽고 있다는 중차대한 과오를 깨닫지 못 할까?
할 수 없이 구글 번역기를 꺼내 소통을 시도하자 노형은 약간 반성하는 눈치를 보였다. 노형이 내게 전달하고자 하는 요지는 “순례자는 모름지기 배낭은 가볍게, 마음은 경건하게, 행동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걸으라”는 거룩한 충고였다. 얼굴이 예수님을 많이 닮은 프랑스 노형과 두서없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생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노형과 순례자들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가다 보니 순례자 사무실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