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0일 차 / 프랑스 순례길 출발지인 ‘생장’에서 한 일)
산티아고 순례길은 듣는 이에게 이미 헌신과 영적 탐구의 여정을 떠올리게 한다. 순례는 삶의 일상에서 벗어나 신성과 연결되려는 '목적 있는 여정'이며, 타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동기가 부여된 여정'이기도 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이처럼 자신과 추구하는 신성, 그리고 고난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오직 도보로 걸어야만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고 들었다. 이 여정은 개인의 육체적, 심리적, 시간적으로 엄청난 투자를 요구하며, 단순히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을 넘어 세계를 더 깊이 사색하고 세심하게 바라보게 될 것이다.
중세 시대부터 산티아고 순례길은 종교적 죄인이 사면을 받는 길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는 로마네스크-비잔틴 양식 교회의 확산뿐만 아니라, 샤를마뉴와 롤랑의 서사시 및 연가곡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문화적 연결고리 기능을 수행했다. 이는 순례가 단순한 종교 행위를 넘어 유럽 문화사의 중요한 축을 형성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산티아고 순례길은 관광이라는 현대적 맥락과 얽히면서도 여전히 본질적인 가치를 잃지 않는다. 현대의 순례자들은 휴가 이상의 가치를 찾아 떠나며,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려는 '여정'을 경험할 수 있다. 물론 편의를 추구하는 경향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 길은 일상과 단절하고 삶의 방식을 바꾸며 깊은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시대를 초월한 특별한 길로 인식되고 있다(Lucia Galli:2007).
모든 순례자는 <순례자 사무소>에 들러 순례자 여권(크리덴셜)을 받아야 한다. 이 여권은 순례를 하는 여정의 매일의 숙소에서 체크인이나 체크 아웃, 그리고 공공기관이나 유적을 방문하여 여권에 세요(스템프)를 찍어 최종목적지에 도착하여 '완주증명서'를 받기 위한 수첩으로서 크리덴셜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권만 있으면 되고 비자는 발급하지 않고 있다.
여권을 신청하기 위해서 <순례자 사무소>에 들려 정해진 양식에 국적과 이름, 나이, 여권번호, 그리고 순례목적을 기재하여 직원에게 건네주자, 설문서를 한 장 주면서 현장에서 작성해 달랜다. 순례길을 걷는 목적을 1) 종교적인 이유, 2) 영적인 이유, 3) 문화적 이유, 4) 스포츠, 5) 기타 라는 항목으로 나누고 그중에서 하나를 고르라 했다. 객관식 질문이지만 골라내기가 쉽지 않았다. 내 보기에는 1)과 2)는 구별할 수 없는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3)이나 4)도 전혀 무시할 수 없으므로 결국은 1)~ 4) 이유가 복합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5) 번 ‘기타’를 골라서 제출하였다. 그들이 내 설문지 대답의 속뜻을 헤아리지 못하면 우문우답으로 치부할 것 같아서 약간은 찜찜하다.
즉석에서 크리덴셜을 발급해 주고 수수료 2€를 받았다. 크리덴셜은 작은 병풍처럼 7겹으로 접혀 있었다. 그것은 수첩이나 휴대폰보다 약간 커서 휴대하기에 약간 거추장스러울 정도 크기의 디자인이었다. 자원봉사자는 이 여권과 함께 순례길 전 구간에 있는 알베르게(순례자 합숙소), 바(BAR)나, 종교시설 등에서 ‘세요’ (스탬프)를 받을 수 있으며 이는 완주 증명서를 발급받는데 증거 자료가 된다는 사실을 영어로 친절하게 또박또박 설명해 주었다.
크리덴셜에는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칸이 무려 72개나 되었다. 하루에 두세 개의 세요만 받으면 된다는 자원봉사자의 말을 들었지만 은근히 심리적 부담을 갖게 했다. 왜냐하면 순례길 800km를 어떻게 완주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순례자 사무소 자원봉사 요원은 우리 부부에게 순례길 각 코스의 해발 높이, 걷어야 하는 거리와 시간에 대한 정보와 제1코스 내에 소재한 ‘알베르게’(순례자 숙소) 목록과 그들 각각에 대한 필수 세부 정보를 유인물로 제공하며 우리의 장도를 축하했다.
순례자 사무소의 안쪽 벽면에는 순례길의 마크이자 순례자 배낭의 액세서리로 알려진 ‘가리비 껍데기’를 2€유로의 기부금을 내고 각각 한 개씩 챙겨 나왔다. 서울대학교 배지와 흡사한 가리비 껍데기의 유래는 예수의 제자 중에서 최초로 순교한 성 ‘야고보’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가리비에 대한 전설의 버전은 여럿인 것 같다. 로마에서 순교한 야보고의 시신을 배에 태워 바다로 떠내려 보냈는데, 스페인 이베리아 해안에 닿았을 때까지 가리비 껍데기들이 달라붙어서 바닷고기로부터 야고보의 시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야보고의 유해가 스페인에서 발견되자,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걸었던 길이자, 야보고를 기리는 사람들이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건축한 성당이 우리의 최종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다.
대성당을 프랑스로부터 찾아가는 순례길을 “산티아고 프랑스 순례길”이라고 한다. 그런 연유로 노란색 가리비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안내하는 표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수녀가 쓴 여행기를 보면 사뭇 허황하게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다. 성 야고보의 제자들이 배로 실어온 그의 관을 뭍으로 옮길 때 마침 해변에서 벌어지고 있던 혼인 잔치를 본의 아니게 방해하여 놀라게 했다. 그 바람에 신랑이 타고 있던 말이 펄쩍 뛰어 바닷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신랑과 말은 익사한 것으로 보였지만 이때 성 야고보의 기적이 나타났다 신랑과 말이 사나운 물속에서 살아 나온 것이다. 그들은 바다에서 나와 해변으로 올라왔는데 말과 신랑을 칭칭 감고 있던 미역줄기에 가리비 껍데기가 많이 매달려 있었다(조이스 랩 : 3).
그래서 가리비 껍데기는 성 야보고 성당으로 가는 사람들의 주요 상징 마크로 매달고 다니게 되었다고. 그 모양을 석유회사인 극동 Shell이 로고로 쓰고 있기에 매년 산티아고 순례길 보수나 정비에 쓰는 재원을 기부하고 있단다. 순례길을 자발적으로 걷는 순례자라면 가리비 껍데기는 '순례자 공동체'의 상징으로, 액서리나 기념품으로 챙겨 나왔다.
생장은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산티아고 프랑스길(Camino Francés)의 주요 출발지로 알려져 있다. 이 마을은 피레네 산맥의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 근처에 위치해 있다. 이 마을은 프랑스의 바스크 지방에 속하며, 중요한 전략적인 위치라는 사실이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 마을은 12세기에 축조된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순례자들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려면 이곳을 거쳐가야 하는 관문이었다. 17세기에 건축된 요새인 시티델(Citadelle de Saint-Jean-Pied-de-Port)은 순례자들이 스페인으로 넘어가기 전에 하룻밤 머물며 여행 준비를 점검했던 마을이다.
생장에서 해야 할 일을 처리한 후에 시간이 남아서 이 마을의 유적을 답사하기로 했다.
13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노트르담 성당(Église Notre-Dame du Bout du Pont, 이는 성모마리아 성당을 불어로 표현한 것이다)은 순례자들이 출발하기 전에 기도하던 교회이다. 구시가지 입구에는 바유브 포르테(Porte de Navarre)가 있는데 이는 마을의 주요 입구 중 하나로, 순례자들이 드나들었던 ‘문’이다.
바스타이드 거리(Rue de la Citadelle)는 중세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는데, 돌로 포장된 도로와 주택들과 상점들이 모여 있다. 이 마을에는 북쪽에 있는 나바르 문, 동쪽에 있는 생자크(야보고) 문이 있다. 서쪽에 있는 프랑스 문(Porte de France)은 프랑스로부터 들어오는 주요 입구로 순례자들은 이 문을 통해 마을로 들어와서, 나바르 문(Porte de Navarre)이나 생자크 문(Porte Saint-Jacques)을 통과해서 본격적인 순례길로 접어들게 된다. 남쪽에 있는 스페인 문(Porte d'Espagne)은 스페인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이 문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들어가기 전의 마지막 문이다.
예로부터 ‘문’이란 드나들기 위한 통로이자 출발과 도착하는 지점이며 공사(公私) 공간의 경계를 구분하는 필수 시설이다. 이러한 유적들은 다행히 반경 500m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1시간이면 충분히 답사할 수 있었다.
이제 예약된 호텔을 찾아가 체크인한 후에 마트에 들러서 내일 점심거리와 간식을 준비했다. 돌아오는 길에 레스토랑에 들려서 저녁식사를 했다. 많은 순례객들이 내일부터 펼쳐질 여행에 약간은 흥분한 얼굴로 맥주를 마시며 자기들의 장도를 축하를 하다 보니 마냥 시끄러웠지만 순례길을 떠나는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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