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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메이트 Oct 07. 2024

『산티아고 순례길 인문기행』
4. 롤랑의 뿔피리 소리

(제2일 차 / 론세스바예스~수비리)



오늘의 코스  

오늘(9.25)은 7시에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를 출발하여 ▷ 부르게 테(Burguete) ▷ 헤렌디아인(Gerendiain) ▷ 에로 고개(Alto de Erro) ▷ 수비리(Zubri)까지 21.4km 거리를 오르락과 내리락을 서너 번 반복하며 걸었는데 레스토랑 때문에 5km를 더 걸었기 때문에 6시간 가까이 걸었다.

   


아침 기상 종소리에 깼다. 여느 종소리가 아니었다. 자칫 기억에서 사라지려는 서울의 아침을 열었던 두부장수의 종소리 같아서 눈을 떴다. 코를 얼마나 골았는지 잠꼬대를 얼마나 했는지는 모른채 눈을 떴다. 더없이 행복했다. 나와 아내는 착한 아이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워 세면장에서 고양이 세수를 끝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아내와 내 짐 중에서 배달을 의뢰할 배낭과 휴대할 배낭에 넣을 짐을 분리하였다. 배낭은 오늘도 어제처럼 하코 트란스(Jacotrans)에 배달을 의뢰하기로 했다. 자원봉사자가 안내한 대로 당일 찾아갈 숙소의 이름과 주소를 기재한 라벨 봉투에 7유로를 넣어 알베르게에서 지정한 장소에 짐을 내다 놓았다.


그곳에는 이미 다른 순례자의 배낭이 수십 개나 쌓여 있었다.  어제 고생한 순례자들의 많았나 보다.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의 조식 식권을 예매하지 못해 알베르게에 가까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수 없었다. 배고픔을 참고 걸어야 했다.  


♧ 롤랑의 절규가 들리는 듯  


  알베르게에서 100여 미터의 길목에서 론세스바예스 전쟁기념비가 육중한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론세스바예스 (롱스보)는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카룰루스) 왕과 그의 조카인 기사 롤랑의 노래에 나오는 전설의 고장이다.


론세스바예스 전쟁기념비


중세 때 서부 중부 유럽을 지배하던 프랑크 왕국의 정복군주인 샤를마뉴 왕은 에스파냐에서 이교도인 사라센 인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스페인까지 원정전쟁을 하였다.


  서기 778년 8월 15일 그가 이끄는 군대는 승승장구하여 마지막 스페인 사르고사를 포위하여 그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마르시르 왕과의 마지막 전투를 남겨두고 있었다. 위기에 처한 마르시르 왕이 화평을 제안하자, 샤를마뉴 왕은 중신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왕의 외종질인 롤랑은 언변이 뛰어난 자신의 의붓아버지(계부), 가느롱을 마르시르 왕과 협상할 프랑크 대표로 추천했다.


 가느롱은 자신을 협상대표로 추천한 의붓아들(계자)인, 롤랑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왕의 명령인 협상대표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불만을 품은 채 협상대표가 된 가르롱은 마르시르 왕이 준 뇌물을 받아 챙긴 뒤 협상에 성공했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좌) 샤를 마뉴 대왕 초상      (우) 샤를 마뉴 대왕 조각상

   


가느롱과 마르시르가 맺은 조공조약에 따라 샤를마뉴는 군대를 프랑크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롤랑은 마르시르의 속임수임을 알아차리고 철군을 반대했지만 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샤를마뉴는 프랑크로 철군하면서 가느롱의 천거를 받아 롤랑을 후위 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계부인 가느롱과 계자인 롤랑의 도진개진 급의 알력이  두 사람의 비극을 초래하였다. 사를마뉴는 롤랑에게 위험에 처하거든 뿔피리를 불면 자기가 회군해서 도와주겠다고 약속하고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으로 돌아갔다.


교활한 마르시르는 샤를마뉴와의 조공조약을 깨고 50만 대군을 이끌고 롤랑의 후위부대를 공격했다. 수적으로 열세에 몰린 롤랑은 피레네 산맥의 론세스바예스 계곡까지 마르시스의 추격을 당한다. 롤랑의 죽마고우이자 부하인 ‘올리비에’는 사령관인 롤랑에게 3차에 걸쳐 뿔피리를 불어 샤를마뉴에게 구원을 간청하자고 건의했지만 롤랑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거절한다.


롤랑은 어떤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자만 때문에 풍전등화 같은 신세가 되고 만다. 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성검인 듀렌달(Durendal)을 이슬람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바위에 내리쳐 부숴버리려고 했지만 검은 멀쩡했다. 


격전을 치른 끝에 롤랑은 자기 병력이 60명쯤 남게 되자 자존심을  포기한 채 관자놀이가 튀어나올 정도로 있는 힘을 다해 뿔피리를 불어 샤를마뉴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뿔피리 소리를 들은 샤를마뉴는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뿔피리 소리가 계속되자 군대를 론세스바예스 싸움터로 회군하였지만 롤랑의 부대는 이미 전멸당한 후였다( 이상 by  Alessandro Barbero).


샤를마뉴는 롤랑과 올리비에와, 참전했던 대주교 튀르벵의 유해를 수습하여 프랑크로 운구하여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고, 자기를 속인 가느롱을 교수형에 처한다. 롤랑의 용기와 충성을 기리기 위한 ‘롤랑의 거석’이 나바라 지방 곳곳에 남아 있다.


피레네 산맥에 있는 ‘롤랑의 샘’이나, 롤랑을 추모하는 ‘산 살바도르 데 이바녜 따’라는 작은 성당이 지어졌는데, 현재는 순례객들의 피난소로 이용되고 있다. 이러한 롤랑의 전설은 ‘롤랑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유럽 여러 나라에서 공연물로 만들어져 상연되어 롤 롤랑의 애국심을 되새기고 있다.


롤랑의 최후(발췌)

롤랑은 힘이 다해 마지막 산등성이로 오르니 / 거기 서 있는 높은 소나무 아래, 푸른 풀 위에 / 그는 뒤쪽의 피레네를 마주하며 누웠네.

한 손으로는 그의 검 두랑달을 / 다른 손으로는 그의 뿔 올리판을 들고서 그는 마음속으로 많은 생각을 떠올렸네.

많은 나라를 정복한 일을, 영광스러운 프랑크인의 땅을 / 또한 자신의 가족을, 그를 길러낸 자를 / 마지막으로 그가 섬겨온 좋은 왕 카를 대제를 떠올렸다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 죄를 회개하며 말했다.


"하느님, 저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 저의 작은 죄와 큰 죄 / 저의 모든 죄를, 제가 살아온 동안에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지은 모든 죄를."


그는 올리판을 들어 천사를 불렀다. 그는 올리판과 검 두랑달을 교차시켜 자신의 가슴 위에 놓았다. 그는 머리를 돌려 이방 땅을 향했으니, 황제에게는 그의 승리를 증명하고자 했다. 이 방식으로 그는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의 영혼을 데려갔더라( 이상 By Mattew Gabriele & Jace Stuckey)


(좌) 롤랑의 노래 뮤지컬 장면     (우) 롤랑 추모 성당

     

목장길을 따라서   


론세스바예스 전쟁기념비를 빠져나가자 광활한 숲길은 우리를 안내했다. 수목이 어우러져 터널 같은 숲길을 낯익은 순례자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다가 ‘부르궤테’ 마을에 도착했다.


작고 아담한 마을, 집집마다 화사하지만 소박한 제라늄 화분들이 베란다로 몰려나와서 순례자들을 환영과 환송을 겸하고 있었다. 빨간 무늬 손수건을 흔들면서.

  이 마을에서 헤밍웨이가 송어 낚시를 즐기면서 “태양은 다시 떠 오른다”를 썼다고 전한다. 한 시간 정도 걸어서 순례자들이 우글거리는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우리는 지친 몸에 대한 예의치고는 허접하기 짝이 없는, 초콜릿 빵 하나에 커피 한 잔으로 간단한 식사를 했다. 레스토랑을 떠나 마을을 빠져나오자 본격적인 시골 숲길에 접어들었다. 흡사 제주도 올레길을 걷는 기분이다. 하지만 바다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제주도는 아닌 게 분명했다.      


목장을 통과하는 순례길이 나타났다. 혹시라도 길을 잘못 안내한 게 아닌가 싶어서 노란색 화살표를 확인해도 분명하게 목장 안으로 가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목장의 문을 열고 입장했다가 문을 닫아야 가축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한단다. 스페인 순례자 한 사람이 이방인들에게 찬찬히 시범을 보인다.


풀밭에는 소들이 여물통 주위에 모여들어 회식을 하고 있다. 소목장을 지나자 이번에는 말목장이 나타났다. 낭만이 밥 먹여 준다고 믿었던 젊은 시절에 목이 쉬도록 부르던 팝송이 생각났다.

목장길 따라 밤길 거닐어♬


이곳에서 만난 말들은 우리가 늘 보아온 말의 기본 체형이 아니었다. 말들은 다리가 짧고 살이 쪄서 잘 달릴 것 같잖고 식용으로 사육하는 말들 같았다. 말들은 순례자들이 건넨 말을 외면하며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어떤 말 모자(母子)는 식사를 끝내고 휴식하면서 담소를 즐기고 있다.



엄마 말은 지나가는 순례객들을 두 눈을 껌벅거리고 있지만 새끼 말은 약간 겁먹은 표정으로 엄마 겨드랑이 밑으로 자꾸만 파고들며 순례객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겁먹은 건지 부끄러운 것인지 모르겠다. 목장을 빠져나오자  또 다른 목장. 돼 색임 질 하느라고 앉아 있는 암소와  두 마리  송아지들도 마냥 한가롭다.


순례길에는 우공들이 퍼질러 놓은 쇠똥들이 지뢰처럼 깔려 있다. 순례자들은 쇠똥을 밟지 않으려고 주의를 집중하면서 걸어야 했다.

영변 약산에 진달래꽃,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산티아고 순례길에 쇠똥, 사뿐히 즈려밟지 말고 가시옵소서! 쇠똥을 철부덕 밟은 순간 지옥에 떨어지는 기분이리라.

지난밤에 내린 비로 물 먹은 쇠똥의 고약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왜 선배 순례자들은 자기들의 여행기에 순례길이 쇠똥의 지뢰밭이라는 사실은 감춘 채 프랑스 순례길은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후한 점수를 주었을까?


내리막길은 완전 자갈길이었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화엄사 오는 길이나, 한라산 내리막길처럼 돌바닥 길이라서  발바닥이 화끈거려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기진맥진 끝에 목적지인 수비리로 넘어가는 다리가 나타나자 다 왔다는 안도감이 가슴속으로 밀려든다.


  이 다리가 광견병의 다리(Puente de la Rabia)이다. 광견병에 걸린 가축들이 이 다리를 통과하면 병을 치료할 수 있으며, 광견병에 감염된 사람은 강으로 들어가 다리의 가운데 교각을 세 바퀴를 돌면 병이 치료된다는 전설이 있다. 앞으로 한 달 순례길을 걷는 동안만이라도 코로나19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싶지만 배가 고파 다리 밑으로 내려가기는 싫어 지나치기로 했다.  


수비리 마을 입구에 있는 레스토랑에는 빈자리가 없어서 1Km나 더 떨어진 식당까지 진출해서 ‘순례자 메뉴’(문어, 고등어구이, 돼지갈비)로 점심 식사를 했다. 예약된 펜션을 찾아드니 걸은 거리가 2km나 추가되어 종일 4만 보 가까이 걸었다. 두 다리에 힘이 쫙 빠지더니 쥐가 났다.      


♧ 수비리 수도원의 우물


오늘의 목적지 수비리는 스페인의 바바라 지방에 위치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중요한 마을의 하나이다. 이 마을에는 중세 수도원인 수비리 수도원(Monasterio de Sobrado dos Monxes)이 자리 잡고 있다.  수비리 수도원은 10세기에 설립된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중세시대에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방문하며 지나갔다.


이에 수도원은 나바라 지방에서 중요한 종교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수비리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수도원 주변의 모든 우물과 샘물이 마르면서, 수도사들과 마을 사람들 모두가 물 부족으로 고통받게 되었다.


이들은 매일 기도를 드리며 신의 자비를 간청했다. 어느 날 밤, 수도원장은 꿈속에서 수도원 내의 특정 장소를 파면 물이 나올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 다음 날 아침, 원장은 수도사들과 함께 그 장소를 찾아내 땅을 파자 갑자기 맑고 시원한 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 기적을 보여준 우물은 수도원 식구들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에게 큰 축복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우물은 '기적의 우물'로 불리며 오늘날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아서 자기들의 신앙을 강화하고 영적인 힘을 불어넣어 주는 장소로 자리 잡고 있단다.



펜션에서 불편한 하룻밤


어젯밤 순례길에서 사립 알베르게의 침대를 구하지 못해서 하는 수 없어 값이 세 배나 비싼 펜션을 예약했었다. 문을 두드려도 관리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무인시스템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출입문에 붙어 있는 전화번호로 WhatsApp로 문자를 보냈더니 유령같이 방 비밀번호가 문자로 찍힌다.

                                        

우리가 투숙한 펜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배달 의뢰한 내 배낭이 먼저 도착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다 배낭아!

도미토리형 알베르게 보다 세 배나 비싼 돈을 지불한 펜션의 방은 내 콧구멍보다 약간 넓었다. 우리 어렸을 적 시골역 부근에서나 볼 수 있는 여인숙만 한 크기였다.


부부가 한 방에서 잘 수 있다는 장점 말고는 단점이 더 많았다. 마음은 답답해지고 몸은 피로해서 나는 샤워실에 들어갔다. 세면대에 칫솔과 치약, 면도기도 비누도 없다. 세면기는 얼굴 정도의 크기, 아니 작은 요강만 했다. 샤워실에서 샤워와 세안을 동시에 해결하라는 메시지 같다.


샤워실은 죽은 자를 넣는 관을 세워 놓은 만큼이나 좁아서 나 혼자 들어서니 샤워실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주어 답답하고 불편했다. 샤워를 하면서 타올로 등 뒤를 문지르려니 팔꿈치가 오른쪽 유리벽과 왼쪽 타일이 자꾸만 닿아서 너무 불편했다. 다시 한번 고대광실로 비원둔 우리 아파트가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그리움을 불러온다.


누가 말했던가? 집 나오면 개고생 한다고! 집에 가려면 아직도 한 달이나 남았는데 이를 어쩐다? 갈수록 기가 막힌다.



#$@  이 글은 “5. 행복하여라 순례자여” ( https://brunch.co.kr/@96e291d8614c4ec/56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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