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일 차 / 수비리 ~ 팜플로나)
산티아고 순례 셋째 날인 오늘(9.26)은 수비리(Zubri)를 출발하여 ▷ 라라소아나(Larrasoana) ▷ 수리아인(Zuriain) ▷ 트리니다드 데 아레(Trinidad de Are) ▷ 팜플로나(Pamplona)까지 20.4km를 5시간 동안 4만 보 가까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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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순례자들보다 한 시간 정도 늦은 8시 20분부터 순례를 시작했다. 라비아(광견병) 다리를 끼고 수비리 지역을 벗어났다. 아담하고 조용한 마을을 통과하자 갈대밭 오솔길이 나타났다. 큰 도로 건너편에 레미콘과 화학 공장이 섞여 있는 지대가 나타났다. 이 공장지대를 뒤로 하자 ‘아르가 강’(개울)과 N135 도로와 거의 나란히 걸어야 했다.
출발지로부터 5.5km쯤에 14세기에 만들어진 소위 ‘도적의 다리’(프엔테 데 로스 반디도스)를 건너 라라소아나(Larrasoana)에 진입하였다. 중세에는 이 다리에서 도둑이나 강도들은 순례자들의 물건들을 약탈하였다. 순례자들에게 경각심을 불어넣기 위해서 이름을 붙인 다리다. 이 다리에서 도적이 아닌 순례자들 몇 명이 기념사진을 찍느라고 잠시 머무르고 있었다.
과거 나바르 왕국의 의회가 있었던 이 도시에는 여왕이 거주했더란다. 나바르 왕국(Reino de Navarra)은 중세 피레네 산맥 서부에 위치했으며, 오늘날의 스페인 나바라 지방과 프랑스 바스크 지역의 일부를 포함했다. 824년, 카를로만 황제가 통치하던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이니고 아리스타가 독립하면서 나바르 왕국의 첫 번 째 왕으로 즉위했다. 이 시기는 무슬림과 프랑크족의 압력 속에서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세력들이 독립을 강력하게 추구하였다.
이 왕국은 10세기~11세기에 걸 전성기를 맞았는데, 특히 산초 3세 대왕(Sancho III el Mayor: 재위 1004-1035)은 나바르 왕국에다 레온 왕국, 아라곤 왕국, 카스티야 백작국 등을 통합하여 광범위한 영토를 다스렸다. 그가 사망한 이후, 나바라 영토는 아들들에게 분할됨으로써 지배력의 약화를 초래하는 듯했지만, 형제들의 결속으로 여전하게 지역 강국으로 존재했다.
12세기~13세기에 이르러 아라곤과 카스티야 같은 강력한 주변 왕국들이 성장하면서 이 왕국의 지위는 점점 위협을 받게 되었다. 1234년, 나바르의 왕위가 프랑스의 샹파뉴 가문으로 넘어가면서 프랑스와의 동맹이 깊어졌다.
이후 이 왕국은 점차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1512년, 이 왕국의 남쪽 부분이 카스티야백작국의 페르난도 2세(페르디난드 2세)에게 정복되어 스페인 왕국의 일부로 합병되었다. 이에 나바르 왕국은 피레네 산맥을 기준으로 북부(프랑스 나바르)와 남부(스페인 나바르)로 분할되었다.
북부는 독립적인 상태를 계속 유지했지만, 1589년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나바르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면서 프랑스 왕국과 통합되었는데 1620년에, 북부는 프랑스 왕국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이 왕국은 바스크 지역의 언어와 문화적 전통을 지켜왔기에 오늘날까지 나바라 지역에서 바스크 전통으로 남아 있다.
이 왕국은 스페인의 레콩키스타(재정복)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군대는 이슬람 세력에 맞서 싸운 기독교 연합군의 주도적 구성원이었다.
아르가 강줄기를 따라가는 순례길은 구비마다 수목이 울창한 숲 터널 속을 들락날락하며 전진하고 있었다. 가을철이라 숲은 겨울잠을 준비하느라고 들녘에 고요와 적막을 뿌려놓은 듯했다. 순례길의 숲은 스페인의 강렬한 태양을 피하게 해 주기 때문에 순례자들의 환영을 받는다.
‘바스크 자치주 구역에 진입하였다. 말 목장의 대형 창고 건물 벽에 그린 그림 밑에 한글로 “바스크 지방으로 오신 것을 환영하면서 이 지역 문화를 느끼라!”라고 쓰여 있었다. 수만 리 타향에서 세종대왕의 환영을 만나 반가웠다. 아시아 국가의 문자 중에서 한글만 쓰여 있어서 우리의 자존감을 일깨워 주었다. 국적이 한국인 순례자가 많기 때문이겠지만 외국으로부터 온 순례자들이 이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그들에게 몇 마디 설명하며 지나갔다.
스페인 바스크 광역자치주(Basque)에는 바스크 민족이 그들의 고유한 언어를 쓰며 거주하고 있다. 프랑코 정권(1936년~1978년) 때에는 이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수비리에서 12km쯤에 ‘사발디카’라는 마을이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13세기에 지은 조그만 ‘성 에스테반’ 교회는 N135 도로 건너편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순례자들은 이 교회 종의 치유력을 믿어 종종 종을 친다. 순례자가 종을 울리고 건강이나 안전을 진심으로 기원하면 그들의 기도에 응답이 온다고 믿었다.
수비리 마을의 "성 에스테반 성당" 앞에서 자원봉사자 두명이 “순례자의 행복론”이라는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었다. 알 듯 모를 듯한 한글 문장으로 번역된 10개의 행복론을 약간 첨삭하여 옮기기로 한다.
1 순례의 길이 눈을 열게 하여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례자여 행복하여라.
2.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것에 마음을 두는 순례자여 행복하여라.
3. 순례길을 따라 걸을 때 그 길이 수많은 이름들과 여명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는 순례자여 행복하여라.
4. 진정한 순례길은 그것이 끝났을 때 비로소 시작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례자여 행복하여라.
5. 배낭은 텅 비어 있지만 마음은 풍요로운 느낌들과 벅찬 감동을 가득 안고 걷는 순례자여 행복하여라.
6. 옆에 있는 사물들을 살피지 못하고 혼자서 백 걸음 앞서 나가는 것보다는 한 걸음 뒤로 처져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 훨씬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례자여 행복하여라.
7. 순례길을 벗어나거나, 빗나간 것에도 놀라워하면서 그 모든 현상에 감사할 때 순례자여 행복하여라.
8. 당신이 만약 진리를 찾고 있고 그 길에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면, 그것이 결국 길이요, 진리와 생명이신 그분을 찾기 위한 행동이라면 순례자여 행복하여라.
9. 이 순례길에서 참된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되고,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머물면서 마음속에 그 이미지를 잘 간직할 수 있다면 순례자여 행복하여라.
10. 이 순례길이 큰 침묵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침묵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순례자여 행복하여라.
여기 10개 중 첫째 항목에서 “오늘의 목적지에 먼저 도착하는 것보다는 목적지까지 함께 걸어가기 위해서 마음을 쓰는 순례자는 행복하리라”라는 문구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고통스러운 나는 그래도 행복한 순례자였다는 사실로 알게 되어 약간의 위안을 받았다. 걸음이 빠른 아내와, 걸음이 느린 나는 "작전 타임"을 가져야 했다.
우리는 순례길을 각자 속도로 걷되, 점심이나 간식 시간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것은 휴대폰이 있기에 가능했다. 이것이 서로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는 자세라고 생각했다. 여러 순례자들이 혼자 걷는 나에게 내 갈비뼈의 행방이 궁금해서 묻는다. 아내를 '도둑의 다리'에서 약탈당했냐고? 택시 타고 먼저 떠났냐고? 부부싸움을 했냐고? 내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자유로운 영혼(?)이기 때문에 때로는 같이, 때로는 따로 걸으며 서로의 행복을 보장하기로 했다"고 대답했다. 뉴욕에서 왔다는 중년 여성 순례자가 내 설명을 듣고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 척과 함께 ‘굿’이라 하더니 ‘부엔 까미노’라고 인사를 남기고 나를 지나쳐 갔다. 내 서툰 영어를 알아듣는 걸 보면 그녀의 남편은 한국 사람일 것 같았다. ㅋㅋ
나보다 20분 이상이나 앞서 걸어간 아내의 모습은 두 시간 동안 보이지 않았다. 아내의 양해로 순례길을 느긋하게(?) 걸을 수 있어서 좋지만 마음은 마냥 느긋할 수 없었다. 내 주변에 순례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순례길을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했다. 외톨이가 되어 걷는 나에게 흙먼지를 잔뜩 일으키며 지나가던 트럭이 저만치 멈춰 섰다. 운전자가 고개를 차창 밖으로 빼더니 나에게 소리쳤다.
"이 길은 순례길이 아니거든요. 오던 길로 백 미터쯤 되돌아가 왼쪽 길로 가세요!"
아마도 순례길 가리비 껍데기와 빗자루에 페인트를 묻혀서 투박하게 그려놓은 노랑 화살표를 놓쳤나 보다. 처음으로 순례길 이정표의 유혹을 못 본 체 외면하다가 걸음수를 늘리고 말았다. 순례길 천사 같은 트럭 운전자의 친절한 길 안내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앞서 가던 아내가 너무 걱정할까 봐 발걸음을 최대한 서둘러서 아내와 거리를 단축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내의 꽁무니는 보이지 않았다.
사발디카 ▷ 아레(Arre)를 지나서 아르가 강을 따라가면 산타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봉헌된 로마네스크 풍의 막달레나 다리를 만났다. 내 소박한 성경지식에 따르면 신약 성경에는 여러 명의 ‘마리아’가 나온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들(예를 들어, 베다니의 마리아 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과의 혼동이 생긴다.
"막달라 "마리아"라는 이름은 그녀가 갈릴리 해안에 있는 "막달라“라는 마을 출신인 ‘마리아’ 임을 나타낸다. 누가복음 8장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게 사로잡혔으나 예수님에 의해 치유를 받았다. 그녀는 평생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당시 현장에 있었던 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요한복음 19장을 보면 그녀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사도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있었다. 또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확인해 준 여인으로서 나온다. 그녀는 예수님의 장례 과정에 깊이 관여하였다. 그녀는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전한 첫 번째 증인이다. 때문에 교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 중의 사도"라고 부른다. 그녀는 기독교 전통에서 헌신, 회개, 그리고 부활 신앙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다양한 성경해석에서 중요한 여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나는 해괴한 소설도 읽은 적이 있다. 그 소설은 작가가 상상력을 동원에서 썼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금서 목록에 올라있었던 책이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아내로 묘사되었기 때문이었다.
막달레나 다리 주변에도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나보다 20분이나 빨리 팜플로나 성문(프랑스 문)에 도착해서 “TV는 사랑을 싣고?”에 나오는 장면처럼 학수고대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던 나의 잠재된 천성이 스페인에서 용기로 태어났다. 반가움에 들떠 구제불능 남편이라는 비아냥을 들어도 좋다고 생각하여 아내를 격하게 포옹하며 팜플로나 성문을 개선장군처럼 통과했다.
마냥 행복하라!
♧ 팜플로나의 과거
팜플로나 시는 BC 1세기경 로마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건설된 이후 이슬람교도와 서고트족에 의해 정복당하는 등 여러 민족의 침략을 받았다. 산초 3세 때부터 도시가 크게 발전하였는데 프랑스 이주민들이 산 사투르니노(산 세르닌 요새) 성당과, 또 다른 이주민을 위한 산 니콜라스 성당을 세워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원주민을 위한 산타마리아 카테드랄(대성당)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 개의 성벽을 따로 쌓았다. 15세기에는 카를로스 3세가 이들 3개의 성벽들을 허물고 팜플로나 성곽을 구축하였다. 나바라 왕국이 성립되면서 팜플로나는 수도가 되어 성장했다. 1513년 스페인 왕국에 복속되면서, 나바라 주의 주도(州都)가 되었다.
이때 이주한 세 민족의 거주지 한복판에 팜플로나 시청을 지었는데 현재까지도 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시청사 국기봉에는 스페인 국기와 도시의 휘장이 매달려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신앙심으로 결속하다 보니 왕국 간 전쟁도 불사하였다.
팜플로나 카테드랄(대성당)을 둘러본 결과 우리 명동 성당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장엄하고 화려했다. 5시쯤 입장료 2유로를 내고 ‘팜플로나 대성당 박물관’에 입장했지만 폐관 시간에 쫓겨 수많은 중세 문화유산을 건성으로 눈팅으로 일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값진 중세 유산을 느긋하게 감상하면서 순례를 할 수는 없을까? 중세 유적을 건성건성 대하고 마는 나 자신이 못마땅하다.
성당 박물관에서 콘베어 벨트를 타는 사람처럼 밀려 나와 팜플로나 시내 골목을 기웃거리며 걷는다. 인구 20만 역사 도시, 소몰이 축제가 열리는 도시 답지 않게 꽤나 조용했다.
시내 곳곳을 누비다가 투우를 벌이는 운동장 앞에서 헤밍웨이 동상을 만났다. 인증 샷을 한 후에 중앙광장인 ‘카스티요’ 광장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오늘 하루 순례길에서 만났다가 헤어졌던 친구들을 거의 만날 수 있었다.
팜플로나(Pamplona)는 스페인의 나바라 지방에 위치한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의 중요한 도시 중 하나로, 해마다 산 페르민(San Fermín) 축제를 열고 있다. 페르민은 나바라 지방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사명을 띠고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헌신적 봉사와 기적적인 그의 행적은 많은 교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의 열정적인 전도 활동은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그는 3세기 로마 제국 시대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당시 로마 당국의 눈에 띄게 되어, 기독교를 박해하던 당국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로마 군대에 의해 고문을 당하고 순교하였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산 페르민은 나바라 지방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팜플로나 대성당의 첫 번째 주교였다.
오늘날 팜플로나는 매년 7월 6일부터 14일까지 열리는 산 페르민 축제로 유명하다. 이 축제는 성 페르민을 기리기 위해 열리는 행사로, 특히 '불런(Bull Run)'으로 잘 알려져 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리를 가로질러 달리는 황소들과 함께 달린다. 이 위험천만한 행사는 국내외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을 끌어 모은단다. 이 축제는 스릴 넘치는 행사이면서, 깊은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다.
많은 축제 참가자들이 성 페르민에게 보호와 안전을 기원하며, 그의 기적적인 행적을 상기하게 된다. 축제 기간 동안 팜플로나의 거리와 성당은 온통 기도와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러한 축제는 이 도시를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팜플로나는 산 페르민 전설과 축제를 통해 깊은 역사적, 문화적 유산을 이어오고 있다. 우리는 9월에 팜플로나를 여행했기 때문에 7월 초에 열리는 ‘산 페르민 축제’를 볼 수도 없고 즐길 수도 없어서 아쉽지만 축제의 열기를 상상으로 대신한다.
헤밍웨이는 “해는 다시 떠오른다”에서 페르민 축제를 소재로 하여 소설을 썼다고 한다.
헤밍웨이가 자주 드나들었다는 ‘이루냐 카페’를 찾아갔다. 규모가 예상을 넘어 엄청나게 컸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헤밍웨이를 찾아 카페 내부를 기웃거렸다. 명색이 작가인 나는 헤밍웨이의 영혼이라도 만나보고 싶었다. 그때 읽은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도 순례길의 주인공과 같은 이름인 ‘산티아고’였다. 국어선생님께서는 그 소설의 작품성을 입에 침을 튀겨가며 높이 평가했지만 나는 소설이 지루했다는 느낌만 뇌리에 남아 있을 뿐이다.
재미있는 연애 소설이기를 기대하며 읽었던 “해는 다시 떠오른다.”였다. 역시 줄거리는 밋밋하고 지루했지만,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에서야 미국이 아닌 헤밍웨이의 영혼을 스페인의 순례길에서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이 소설이 도입부는 파리에서 시작하지만, 2부 13장 후반부터 무대가 “팜플로나”로 바뀐다.
매년 7월 초순에 열리는 산 페르민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주인공 제이크, 그의 친구인 로버트 콘과 빌 고튼, 그의 연인인 브렛 애슐리, 그녀의 약혼자 마이크는 모두 이 도시에 있던 몬토야 호텔에 묵으며 애증으로 점철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난다.
권투선수 출신인 로버트는 마이크의 애인인 아름다운 브렛을 좋아하지만, 브렛은 그에게 도통 관심이 없다. 이 사실을 간파한 마이크는 로버트에게 브렛을 쫓아다니지 말라고 주의를 주지만 로버트는 이를 무시하고 그녀에게 사랑을 호소한다. '소몰이 축제’가 시작되자 제이크 친구들은 사나운 황소들을 도밍고 투우장까지 825미터를 몰아간다.
소몰이를 하는 과정에서 군중들은 소에게 자극을 주어 흥분케 하여 섬뜩한 스릴을 즐기는 축제이다. 그 과정에서 황소에게 받혀 다치거나 사망한 사람도 생긴다.
19세의 재치 있는 투우사인 ‘페드로’는 투우에게 바짝 붙어서 황소의 뿔을 피했기 때문에 관중들의 인기를 얻는다. 투우경기가 끝나고 저녁 식사 때 페드로는 제이크 일행과 합석하여 브렛을 처음 만난다. 브렛은 페드로의 매력에 빠져든다. 이를 눈치챈 그녀의 약혼자인 마이크와 그녀를 짝사랑하는 로버트는 페드로와 브렛이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것을 걱정해서 훼방 놓는다.
로버트는 브렛과 페드로가 호텔에서 잤다고 오해한 나머지 분풀이로 페드로를 두들겨 패서 몸에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페드로는 브렛을 포기하지 않는다. 상처를 입은 페드로는 투우경기에 출전하여 가까운 거리에서 황소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마침내 황소 머리에 칼을 꽂아 죽인다. 페드로는 투우경기에서 승리하자, 관행대로 황소의 귀를 잘라 스탠드에서 마음조리며 관전하던 브렛에게 선물한다.
축제가 끝나자 페드로와 부렛은 함께 팜플로나를 떠난다. 그러나 페드로가 연상의 여인인 부렛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비웃음을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렛은 페드로와 결별하고 이 사실을 제이크에게 고백한다.
제이크는 “자기가 브렛을 서로 사랑했다면 어땠을까” 말하며 과거를 회상하며 소설은 끝난다. “해는 다시 떠오른다.”라는 제목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식의 “희망”을 표현하는 내용이 아니다. 이 소설은 1차 세계대전 후 갈 곳 없는 젊은 세대의 ‘지루한 일상의 반복’을 묘사하고 있다는 번역자의 해설까지 읽었었다.
울산에서 왔다는 중학교 동창생 그룹 60대 4명과 레스토랑에서 통성명하고 맥주를 마시고 헤어졌다. 오늘의 숙소는 알베르게 보다 엄청나게 비싼 호스텔인 48€를 결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