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일 차 / 팜플로나~푸엔테 라 레이나)
오늘(9.27)의 순례길은 팜플로나(Pamplona)를 출발하여 ▷ 사수르 메노르(Cizur Menor) ▷ 사리뀌에기 (Zariquiegui) ▷ 페르든 고개(Alto del Perdon) ▷ 우테르가(Uterga) ▷ 오바노스(Obanos) ▷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Reina)까지 23.9km를 6시간 가까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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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플로나의 외곽에 있는 나바라 대학을 지나면 전 구간 3분의 2 쯤은 오르막길이고, 3분의 1쯤은 내리막길인데 비가 오락가락해서 몹시 힘든 여정이었다.
우리는 순례길에서 많이 알려진 페르돈 언덕(Alto del Perdón)을 오른다. 순례자들은 목이 마르기 시작할 지점에 이르렀다. 전설에 의하면 한 청년순례자가 이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데 악마가 나타나서 그가 하느님을 부인하면 물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때 사도가 나타나 악마를 쫓아버리고 갈증을 해소하라며 순례자에게 물을 주었다고 한다. 나바르쎄(Navarrese) 지구에서 Camino de Santiago를 가장 잘 나타내는 지점이 페르돈의 언덕이다. 시에라 델 페르돈(Sierra del Perdón)에 위치한 해발 770m에 위치한 지점으로 프랑스 길(French Way)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라고 한다. 순례자의 행렬에는 ‘빈센테 갈베테라’는 작가가 “바람의 길과 별의 길이 만나는 곳”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그 조각들에 나타난 사람들은 과거의 순례자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 같다. 순례길을 혼자 걷는 사람, 동반자와 함께 가는 사람, 말을 타고 가는 사람, 당나귀를 끌고 가는 사람, 개와 동행하는 순례자를 철물로 형상화한 조형물이었다. 멀고 먼 순례길에 개를 동반하는 이유가 뭘까? 개는 예부터 인간과 가장 가까운 가축이다. 순례자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일까? 요즈음에는 순례길을 걷어서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일부는 산악자전거를 타고 가는 순례자들도 있다. 드물게는 당나귀나 말을 타고 가는 사람, 개를 짐꾼으로 데려온 여성 순례자도 있었다. 승용차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은 다른 길로 이동해서 숙소에 도착한다.
용서의 언덕에 올라 눈앞에 펼쳐지는 걸어서 올라온 벌판을 내려다보면서 ‘용서’의 의미를 새겨 본다. 우리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는 용서에 다양하게 얽힌 삶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런 삶이 지속될 것이다. 현실 사회에서 용서의 필요성은 수긍하지만 그 실천은 말처럼 쉽지 않다.
개인이나 집단은 불완전한 존재이면서 함께 살아가야 하고 공동체를 구성해서 행복을 추구하면서 미래를 지향해야 하는 존재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용서'는 필수적 마음의 가짐이다. 한 때의 실수나 오판으로 자행된 과거사에 집착하기보다는 과거를 훌훌히 털고 살아가는 것이 ‘행복’을 누리는 방법이다.
‘용서를 하는 것’보다는 ‘용서를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어떤 갈등이 평화롭게 해결되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용서를 받기 위한 행위나 자세’를 가져야 한다. 피해자가 용서를 하는 행위는 ‘반드시’가 아닌 ‘선택형’이라야 한다. ‘화해’나 ‘평화’를 말하는 것은 가해자의 죄의식을 덜어주기 위한 면제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건 ‘조건부 용서’가 될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오면 죄를 사면해 준다는 중세 교회의 용서는 “조건부 용서”였다. 오늘날 ‘용서’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다. 가톨릭 성당의 ‘주님의 기도문’을 보면 “무조건부 용서”를 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로 표현하고 있으니까. 기독교에서 말하는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종교가 다른 ‘달라이라마’ 조차도 “우리에게 가장 큰 행복을 가져 다 주는 마음은 ‘용서와 자비’이다”라고 설파했다. 이러한 용서는 “무조건부 용서”의 계열에 가깝다. 죄를 지은 가해자의 입장을 이해하자는 기도문 같이 보인다. 기도문은 내 탓임을 강조하면서 용서를 비는 자의 기도문 같지만 용서를 하는 나를 용서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기독교에서 용서와 관용은 밀접하게 상호 연관되어 있다.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라고 한다. 관용은 상대방을 포용하고 존중하는 태도이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다. 죄로 가득 찬 내 몸을 용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톨릭 교회는 고해성사를 보게 하여 지은 죄를 리셋하여 새롭고 참다운 삶을 권하고 있다.
순례자 행렬 조각상 가까이 있는 추모 위령비는 1936년과 1937년 사이에 시에라 데 엘 페르돈에서 프랑코 쿠데타 이후 탄압을 받고 살해된 92명을 추모하는 조형물이다. 대다수 순례자들은 갈 길이 바빠서 별로 관심 없이 지나치지만 나는 남다른 감회로 의미를 되새겨 본다. 프랑코 정부 아래서 사회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다 목숨을 잃은 모든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들은 강제로 집에서 끌려 나와 재판 없이 처형되었고, 시에라의 무덤에 묻혔으며 정부에 의해 81년 동안(1937-2018) 잊히고 침묵을 강요당해야 했다. 이 추모비는 사라진 사람들 모두를 상징하는 중앙의 가장 길쭉하게 큰 키의 돌기둥과 그걸 둘러싸고 있는 나선 모양의 작은 돌들로 구성되어 있다. 작은 돌덩어리들은 살해된 주민 92명이 살았던 마을에서 가져왔기에 각기 그 마을들을 상징한다지만 너무 초라하게 보인다.
너무 초라해야 기억에 오래간다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프랑코 정부의 희생자 추모비를 용서의 언덕에 세워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가해자를 용서하자는 의도일까?
우리나라 순천시의 국가정원 안에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동산의 꼭대기에 있는 조형물을 연상케 한다. 우리 광주의 5.18 묘역도 생각난다. 내가 쓴 꽁트소설인 『 아수라 난장판 』(2024)에서 "베스트 셀러의 그림자"에서 5.18 희생자가 첫사랑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있다. 부끄러운 역사는 드러낼수록 반복되지 않을 것이란 신념이 작용한 탓인가?
거센 바람이 저 멀리 20여 개의 풍력발전기를 돌리고 있다. 그것은 풍차의 이미지와 비슷해서 스페인의 대문호인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를 생각나게 한다. 돈키호테는 ‘라만차 풍차’를 병사들로 오인하여 그것들을 무찌르기 위해서 출정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 돈키호테』를 마냥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머리에 떠오른다.
페르돈 언덕을 지나자 순례길은 내리막길로 바뀌었다. 우테르가, 무르사발, 오바노스까지 순례길이 자갈길이라서 불편하고 여간 고통스럽지 않다. 결국 발바닥에 물집에 생겨서 걸을 수 없을 정도라서 양말을 벗고 발바닥에 생긴 물집을 바늘로 따버리니까 고통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9km쯤 걸어가자 ‘오바노스’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에 자리 잡은 오바노스(Obanos) 성당에는 귀욤의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옛날 아키텐 왕국의 ‘펠리사’라는 공주는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궁전으로 돌아가지 않고 오바노스 마을에 정착했다. 코엘료의 순례자에도 언급되는 전설이다. 순례길의 오바노스의 "산타 마리아 데 에우나테 성당(Iglesia de Santa María de Eunate)"은 펠리사 공주와 그녀의 오빠인 귀욤 공작의 전설로 순례자들이 우러러 참배하고 지난다.
펠리사는 프랑스의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종교적인 열망에 이끌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순례길에 오른다. 이런 형태의 순례는 당시 유럽에서 매우 중요한 신앙의 여정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순례를 통해 신앙을 다지고자 했다. 그러나 펠리사의 오빠인 기욤 공작은 펠리사의 순례 여행에 반대했다. 그는 누이가 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기를 원했으나, 펠리사는 오바노스에 도착한 후, 세속적인 삶을 버리고 신앙적인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우리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를 연상하게 하는 전설이다. 누이의 결단에 대해 기욤은 분노하여 오바노스로 찾아가 누이와 대면하게 된다. 기욤은 누이의 결정을 못마땅해하면서, 감정에 휘둘려 누이 펠리사를 죽이게 된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기욤에게 큰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누이를 죽인 기욤은 깊은 회개의 마음을 품고,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남은 인생을 속죄에 바치기로 결심한다. 결국 그는 순례자가 되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게 되고, 그곳에서 수도사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돌아가는 길에 그는 누이가 살았던 마을에 정착하였다. 이 마을에 성당을 짓고 동생의 뜻을 받들어 평생을 봉사하며 살았다. 두 남매는 사후에 가톨릭 교회로부터 ‘복자’(福者)라는 칭호를 받았고, 모든 순례자로부터 공경을 받게 되었다. 펠리사가 사망한 후, 그녀가 묻힌 곳에 ‘오바노스 성당’이 세워졌다. 순례자들은 성당에서 펠리사의 순례와 헌신을 기리고 있다. 아직까지도 오바노스 성당에는 은박으로 싸인 귀욤의 유골이 전해 내려온다. 이 마을에서는 귀욤의 해골에 포도주를 부어서 신성한 포도주를 만들어 성 금요일마다 마을 주민들에게 제공했다고 한다. 기욤 공작은 왜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그가 순례를 했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수 있었지만 그는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동생의 ‘선한 뜻’을 이어받아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으려 했다.
종교인들은 인간이 자비를 실천하는 일은 첫 번째로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페르돈 고개에서 용서를 체험한 순례자는 이제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남에게 도움을 주는 자비를 베푸는 방법 하나를 알게 된다. 옛날 순례자들에게 가장 큰 난관의 하나는 큰 강을 건너는 일이었다. 길을 걷다가 큰 강을 만나면 배가 없으면 강을 곧바로 건너지 못하고 하루나 이틀 걸려 멀리 돌아가기도 했다. 때로는 강을 건너다가 강물에 떼밀려서 목숨을 잃기도 했다. 고대 왕이나 귀족들이나 부자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자선은 강에다 다리를 놓아주는 일이었다. 푸엔테 라 레이나는 나바라의 산초 3세의 왕비 ‘도냐 마요르’가 건설을 명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푸이’라는 마을에 ‘여왕의 다리’가 만들어졌다.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는 스페인 나바라 지방에 위치한 산티아고 순례길의 중요한 마을로 아름다운 다리와 중세 건축물이 유명하다. 왕비가 순례자들이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왕비는 순례자들이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게 하려고 대규모 다리 공사를 명령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여 훌륭한 돌다리를 건설하게 했다. 이 다리는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이 다리는 순례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기에 순례자들은 왕비의 결단에 깊은 감사를 표시했다. 이후로 이 다리는 "여왕의 다리(Puente de la Reina)"로 불리게 되었으며, 마을 이름도 푸엔테 라 레이나로 바뀌게 되었다.
어느 날 ‘여왕의 다리’ 가까이 경당에 모셔져 있는 성모상에 매일 작은 새가 찾아왔다. 이 새는 부리로 강물을 떠다가 성모와 아기 예수의 얼굴에 흘린 뒤에 날개로 닦아주었다. 이 성모상은 “푸이의 동정녀”라는 이름으로 불렀지만, 이때부터 “작은 새의 동정녀”라는 별명을 얻었고, 지금은 산 페드로 성당에 모셔져 있다.
푸이의 동정녀가 한 마리 작은 새를 구해주었단다. 이 작은 새는 부상을 입고 있었는데, 동정녀가 그 새에게 기적적으로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후 새는 동정녀의 상징이 되었다. 순례자들이 길을 걷는 중에 작은 새는 푸이의 동정녀에게 가는 길을 안내했다. 이 새는 동정녀의 보호를 상징하며, 순례자들에게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는 역할을 했다. 매년 ‘푸이’에서는 작은 새의 동정녀를 기리는 의식이나 축제가 열리며, 이 전통은 지역 주민들과 순례자들에게 큰 의미를 가진다.
오늘의 숙소는 사설 알베르게이다. 와이프는 1층, 나는 2층 침대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옆자리 호주 장년 순례자는 내 발에 물집을 살펴보더니 자기가 가져온 연고를 발라주며 곧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며 친절을 베풀었다. 하지만 나의 은인이었던 그가 코를 심하게 골아서 의료봉사자 호의가 빛을 바래게 했다.
알베르게에서 순례자들의 코 고는 소리는 음악으로 승화시키거나 코 고는 소리를 차단하는 귀마개를 하고 자야 한다. 새벽 5시에 눈을 뜨고 알베르게 로비에 가서 '산티아고 가는 길'이라는 영어책을 뒤적거리며 정보를 섭렵하였다. 호주인 의사(의리의 사나이?)가 잠에서 깨어나 코 고는 소리가 그쳤다. 그는 침실 문 앞에서 매트리스를 깔고는 요가와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그의 모습이 이채롭고 경이롭고 존경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