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적 불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가능성
라캉의 유명한 공식 :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Il n’y a pas de rapport sexuel)
이는 경험적인 차원에서 성교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성관계가 상징계 내에서 공식이나 비례로 "쓰여질" 수 없다(ne pas s'écrire)는 구조적 진리를 의미한다. 이 공식은 페미니즘, 퀴어 이론에서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여전히 정신분석은 성을 이분법적(binary)으로 바라보면,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성의 문제를 바라본다는 비판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 공식은 성이라는 것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으로 바라보기 위해 만들어진 공식일까? 프로이트 때부터 정신분석에서 성의 문제는 오랫동안 오해받아 왔고, 지금도 그 오해는 지속되고 있다. 정신분석은 생물학적 성(sexe)이 아니라, 늘 사회-문화적인 것과 걸쳐있는 섹슈얼리티(sexualité)의 문제에 집중한다. 라캉은 오히려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분이 상징적 질서의 산물이며, 결코 실재적인 양분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성’이라는 주제를 철저히 언어적·논리적 구조로 재정의하고자 한다.
Il y a une jouissance à elle, à cette elle qui n'existe pas et ne signifie rien.
여성에게는 어떤 주이상스가 있다.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 의미도 가지지 않는 그 '그녀'에게 속한 주이상스가 있다.
Elle n’est pas-toute dans la fonction phallique, mais il y a quelque chose en plus.
그녀는 팔루스의 기능 안에 전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어떤 것이 더 있다.
— 『Séminaire XX, Encore』, p. 94–96
인도-유럽어에서 homme, man은 실제 남성을 지칭함과 동시에 인류 전체(humanité) 전체를 의미한다. 반면 여성 femme, woman은 항상 성적 특수성(sexual particularity) 안에 한정된 존재로 사용된다. 즉, ‘여성’은 ‘보편 인간’을 대표하지 못하며, 언제나 타자(l’autre)로 위치한다. 실 예로, 프랑스어에서 남성복수대명사(ils), 여성복수대명사(elles)를 사용할 때, 한 무리에 한 명이라도 남성이 섞여 있으면 남성 복수대명사를 사용한다. 즉, 이는 상징적 질서 속에서 ‘남성’이 보편의 자리를 차지하고, ‘여성’은 특수하고 타자적인 존재로 분리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점은 라캉이 말한 “La femme n’existe pas(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 즉, 여성이라는 보편적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과도 연결된다.
이는 서구 언어가 가지고 있는 특징 중에 하나이다. "보편"이라는 개념이 성립하려면, "개별"이라는 반대항이 있어야 하며, 이 둘은 서로 보충하는 관계가 아니라 대립적으로 있어야 상호 간의 의미가 구성된다. 즉, "보편적이면서 개별적"인고, "개별적이면서 보편적"이라는 표현은 언어적 차원에서는 모순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언어를 통해 사유할 수밖에 없는 인간과 그의 성 역시 근본적으로 분리될 수밖에 없으며, 그들 사이에는 기표의 틈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말하는 존재(parlêtre)인 한에서, 남성과 여성의 위치를 상호적이고 보완적으로 결합시키는 단 하나의 주인 기표(Signifiant-maître)가 존재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관계를 궁극적으로 보증해 줄 '타자의 타자'(Autre de l’Autre)가 없다는 의미이다.
오히려 라캉의 관점은 성 그 자체가 언어적 논리로 포획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재의 차원에서 성은 차이 그 자체로서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성의 의미를 규명하려는 작업은 어떤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성은 어떻다, 여성은 저렇다"라는 언어적 규정은 더더욱 성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를 만날 수 없는 것인가? 라캉은 오히려 이 근본적인 차이성을 내재하고 그것을 전유했을 때 관계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 가능성이 바로 증상의 재발명인 생톰(sinthome)이다.
Dans la mesure où il y a sinthome, il n'y a pas équivalence sexuelle, c'est-à-dire il y a rapport.
생톰이 있는 한에서, 성적 등가성이 없다는 점에서 관계가 있다.
— 『Séminaire XXIII : Le sinthome』, p.101
생톰은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묶는 제4의 고리로, 자신의 정신이 붕괴되었을 때 -보로메오 매듭이 끊어졌을 떄-, 주체가 스스로를 붙잡고 존재하게 만드는 실재적 매듭을 의미한다. 즉, 생톰은 증상을 해석해야 할 병이 아닌 주체가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살아낼 수 있게 만드는 재창조의 과정이다. 그래서 생톰은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보편적 법칙을 통해 자신을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성의 차원에서 자신을 지탱한다. 라캉은 문학가 제임스 조이스를 예시로 들면서, 조이스는 아버지 기능(le Nom-du-Père)의 붕괴를 “작가로서의 이름(son nom d’auteur)”으로 대체했다고 말한다. 즉, ‘작가 조이스’라는 생톰을 통해 자기 주체를 유지한 것이다. 라캉은 이 생톰적 차원에서 관계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라캉에게 남성과 여성의 성적 위치는 결국 팔루스라는 동일한 기표(signifiant du manque)를 중심으로 상징계에 포획되어 구조화한다. 이 구조 안에서 남성과 여성은 구조적으로 동등한(structurellement identiques) 위치에 놓이게 되며, 이는 오히려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더욱 불가능하게 만든다. 완벽한 등가성(équivalence parfaite)은 구별이 없음을 의미하며, 이는 곧 둘이 같음(pareilles)을 의미하기 때문에, 완전한 동일성은 역설적으로 관계를 성립할 수 없게 만든다. 생톰은 바로 이러한 성적 등가성을 파괴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동시에 이 둘을 매듭짓는다. 생톰이 작동할 때, 남성과 여성은 더 이상 등가적인 것으로 파악되지 않으며(ne sont plus appréhendés comme équivalents), 근본적인 비대칭성(dissymétrie)이 도입된다. 즉 다름으로써 하나로 연결된 구조가 도입된 것이다.
생톰은 보편적인 공식이 아닌, 엄격히 특수성의 수준에서 성관계의 우발적인 방식의 쓰여짐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러한 '쓰여짐'은 구조적 진리인 비관계(non-rapport)를 없애지 않으며, 오히려 근본적인 비대칭성을 완전히 수용(assumant cette non-équivalence fondamentale)함으로써 특정한 관계를 출현을 가능하게 만든다. 각 주체는 자신의 생톰적 가공(élaboration sinthomatique)을 통해서만 타자와 연결될 수 있으며, 이 연결은 각자가 상대방의 틈(béance)을 지탱해 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관계가 오히려 서로의 차이를 메꾸는 방식이 아닌, 둘의 근본적 차이를 유지하는 둘-되기(faire-deux)를 통해, 역설적으로 둘이 됨으로써 하나 되기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비등가성(non-équivalent) 혹은 비대칭성(hors-symétrie)의 창출이야말로 관계의 비관계(non-rapport du rapport)를 형성하기 위한 본질적인 조건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라캉의 rapport 개념과 장-뤽 낭시(Jean-Luc Nancy)의 해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낭시는 라캉의 비-관계를 오히려 존재론적 개방성과 관계의 능동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그래서 그는 라캉의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Il n’y a pas de rapport sexuel)를 성관계의 거기 있음(L'« il y a » du rapport sexuel)으로 뒤집음으로써 그 공리의 의미와 발화(énonciation) 자체를 전복적 방식으로 읽어낸다.
낭시는 프랑스어 단어 rapport가 가진 두 가지 의미에 주목한다.
결과로써의 Rapport (rapport-bilan): 보고서, 결과, 생산물, 성취, 계산 가능하거나 귀속될 수 있는 어떤 것
활동/과정으로서의 Rapport (rapport-action):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나아가는 활동, 즉 '사이(entre-deux)'의 행위
낭시는 라캉의 공리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의미하는 바는 "성관계의 결과나 완성, 계산 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낭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역설을 제시하는데, 성관계가 '결과/산물'로서의 rapport를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과정/활동'으로서의 성관계는 명백히 존재한다(il y a bel et bien « rapport sexuel »)는 것이다. 낭시는 관계가 완성되거나 계산되거나 소유될 수 있는 어떤 것(chose)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관계의 본질을 비실현성 (Inaccomplissement), 접근 (Approche), 외존(Ex-position), 불가측성 (Incommensurabilité)이라고 정의한다.
성적 관계라는 공식은 관계 일반의 비실현성을 나타내며, 어떤 생산이나 결과도 없는 차원에 존재한다. 즉 관계는 하나의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운동(mouvement), 곧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끝없는 접근(approche)이다. 이 접근은 결코 완결되지 않으며, 불연속적이고 파편적인 영역을 통과하면서 발생한다. 이러한 점에서 성적 관계는 존재의 근원적 구조를 드러낸다. 존재는 본질적으로 외존(ex-position), 자기 외부로 노출되어 있으며,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구별한다. 성적 관계는 이러한 노출의 극단적인 형태, 곧 몸의 노출 자체이며, 그 자체로 어떤 목적이나 완결을 지니지 않는다. 동시에 그것은 불가측성(incommensurabilité)의 차원에 속한다. 성관계는 관계의 불가측성을 스스로 드러내는 사건이며, 그 수행 속에서 관계가 본질적으로 ‘보고될 수 없음’(irrapportable)을 명확히 노출한다.
그래서 낭시에게 있어서 관계는 결과물로 환원되지 않는 무한한 과정이자 자기 차이화(différenciation)의 활동이다. 즉 그것은 실체(substance)를 얻기 위해 분열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분열되고 구별되는 행위 자체이다.
라캉은 성관계의 불가능성을 상징계의 구조적 한계로 정식화하며, 인간의 욕망과 사회적 유대가 이 근본적인 결여를 중심으로 어떻게 조직되는지를 보여준다. 반면, 낭시는 라캉의 공리적 주장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완성된 결과물로서의 rapport의 부재로 해석함으로써, 관계가 곧 끊임없는 접근, 차이화, 노출, 그리고 비완결적인 존재론적 사건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나의 관점에서 낭시의 이러한 해석은 라캉의 논의를 보다 확장시킨다. 요컨대, 라캉이 구조적 결여를 통해 주체를 분석했다면, 낭시는 그 결여를 존재의 개방적인 조건으로 치환하여 관계를 행위(acte)의 차원에서 재정의한다. 라캉적 관점에서라면 그는 결여를 존재론적으로 치환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불가능성 자체가 행위의 조건이라는 점에서는 두 사유가 서로 맞닿아 있다. 결국 낭시는 라캉이 말한 ‘비-관계(non-rapport)’를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존재가 타자에게 열리는 운동으로 읽어냄으로써, 관계의 불가능성 속에서 관계의 가능성을 다시 사유하도록 이끈다.
이것을 라캉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낭시가 말하는 ‘존재의 개방성’은 라캉이 말한 비-관계(non-rapport)의 구조가 실재계(le Réel)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방식으로 읽힐 수 있다. 비-관계는 결여의 자리에서 발생하는 주이상스의 운동이다. 즉 관계는 닫힌 동일성의 형성이 아니라, 비-관계의 틈에서 발화(parole)가 일어나는 사건, 주체가 자신의 결핍을 통해 타자에게 노출되는 행위이다. 이 의미에서 행위(acte)란 어떤 성취나 실현이 아니라, 주체가 자신의 분열과 맞서는 순간, 즉 불가능성의 지점을 통과하며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단절의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비-관계적 행위는 실재의 빈자리를 채우지 않고, 그 빈자리를 열어둠으로써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틈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