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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재 Apr 05. 2021

21세기형 하이브리드 유교

우리의 의식 속에 숨은 유교

 “유교적이다.” 좋지 못한 어감이다. 그것이 모종의 학문적인 맥락에서 논의되지 않는 한, “유교적이다”는 말은 “구시대적이다”, “수구적이다”와 사실상 동일한 말로 쓰인다. 유교적으로 바람직한 인간상 중 하나인 ‘선비’의 이미지도 마찬가지이다. 요즘에는 자주 사용되는 것 같지는 않으나, 비교적 최근까지도 퇴행적이고 쓸데없이 진지한 부류의 사람을 “씹선비”라 불렀더랬다. 유교는 지난 500년간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믿음임에도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유교가 제사나 충효와 같은 고리타분한 가치에 얽매여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을 근대적 세계의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게 하였다고 믿는다. 그렇게 중국도 서양 세력 앞에 무너지고, 우리도 일제 치하의 굴욕적인 식민 생활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대한민국 현대인의 정신적 정체성은 전근대적 지배 사상인 유교와의 결별에 있지 않나 싶을 정도이다. 우리가 백수십여 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우리의 구시대적 조상들과 현대적 우리를 구분하는 척도가 脫유교화에 있는 것 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그렇듯 우리는 유교를 멀리하고, 또 싫어한다. 하지만 마치 생선가게 주인집 아들이 친구들이 놀린다며 아무리 씻어도 몸에 스민 어렴풋한 비린내를 지워내지 못하듯, 유교적 사고방식은 우리가 지우고 싶다고 해서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오늘의 주제는 21세기형 하이브리드 유교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재벌들 - 출처: SBS 뉴스 리포트+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922547)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은 과거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를 통해 경영권 세습을 하려는 의혹을 사 검찰의 조사를 받고 결국 경영권 세습을 포기한다는 대국민 사과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이 의혹의 진위와는 무관하게, 경영권 세습 포기 선언 뉴스의 댓글에는 많은 사람들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듯한 댓글을 남겼다. 개인의 정당한 상속을 침해한다거나 부당한 기업 때리기라는 지적이다. 이러한 지적들이 실제로 논리적, 법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 인터넷 기사에 달린 수많은 댓글들은 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유교 사상에 대해 말한다더니 갑자기 삼성 이야기가 왜 나오냐고? 이 이야기가 우리의 유교적 사고관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본인이 오늘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은 삼성이라는 기업에 대한 문제와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다.


 “삼성은 누구의 것인가?”라고 물으면 한국사람들 열에 아홉은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범 삼성家를 떠올릴 것이다. 그들은 삼성이라는 세계적 기업을 키워낸 장본인들이며, 3대째 대기업 수장직을 상속하는 한국형 재벌기업의 표본이다. 우리의 인식 속에 삼성은 그들의 신화로 일궈낸 ‘개인적 소유물’이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보았을 때 이는 완전히 틀렸다. 서구적 질서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만들어져 현대의 세계를 지배하는 ‘주식회사’란 개념은 주주들이 보유한 지분만큼의 권리를 행사하는 원리를 지닌다. 곧, 삼성은 명확히 말하면 삼성의 주식을 가진 주주들의 소유다. 물론 그 주주들 사이에 삼성가 구성원들이 다수 있으나, 그들도 자신들의 지분만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개인 중 하나일 뿐이다. (물론 그들은 회사 내부에서 일하는 피고용인이기도 하므로 약간은 특수하다 볼 수 있겠다) 그럼에도 우리가 삼성의 주인, 하면 삼성가를 떠올리는 것은 우리 안에 녹아있는 유교적 사고관의 영향이 크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동아시아 문화권은 왕위를 세습할 때 장자상속이라는 명확한 원칙이 존재했다. 특히 부계혈통 직계 자손이 아주 중요했으므로 왕은 많은 아내를 두고 혹시나 왕자들이 죽는 사태에 대비했다. 이는 국가의 흥망이 왕의 생존에 의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양의 경우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린다고 보는 ‘외척’, 즉 외가 쪽 자손들도 토지와 직위의 상속을 잘만 주고받았으며, 이 때문에 양가의 세력을 합치는 행위인 결혼 동맹이 매우 중요해졌다. 자연스럽게 “한 나라의 왕조 = 성씨가 동일한 왕들의 집합 = 국가”라는, 동아시아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근대적 시스템이 성립하지 않았다. 이번 왕과 지난 왕의 성씨가 다를 수도 있었고, 먼 나라에서 왕에 부임하듯 온 터라 자신의 나라 말을 못 하는 왕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런 환경적 배경 속에서 서양적 사고관인 직위와 국가, 개인은 모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관념이 자연스레 싹텄다. 반면 자본주의의 제도만 도입하고 근본적인 사고관까지는 따라가지 못한 우리나라는 동아시아적 절대왕권 사상과 자본주의 체제가 기묘한 동거를 하게 된다. 이런 부분은 특히 정계보다는 재계에서 두드러지는데, 민주주의는 작동방식부터 근본적 원리가 주권의 평등한 분배에 있는 반면, 사유재산은 피상적으로 볼 때 법적으로 그 배타적 권리를 인정받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지도자상 – 우리가 익숙하게 느끼는 동아시아의 제왕적 지도자상 – 과 뒤섞여 탄생한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 회사를 재벌가의 사유재산으로 여기는 사고관이다.


인사청문회 - 출처: 투데이 신문 (http://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6429)


 인사청문회는 국회의 가장 재미있는 쇼 중 하나이다. 필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번 정권에서는 또 어떤 스펙터클한 일이 일어날까 내심 기대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인사청문회를 보면 특이한 부분이 있다. 대부분의 후보자들은 자신이 좋은 공무원이며(물론 문민통제라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룰 속에서 이 부분은 반박의 여지가 있다) 한 부처의 좋은 리더인지 여부를 검증받기보다 청렴결백함, 사상적 건전함, 친족의 흠결 등을 주로 따진다. 물론 그러한 부분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떨 때는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이 이 사실을 모를까? 당연히 안다. 알면서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슬픈 생물인 국회의원들의 행동의 근원에는 사실 표를 행사하는 우리의 유교적 사고방식에 있다.


 우리나라는 오랜 관료제 사회였다. 입신양명으로 대표되는 성공의 본 의미 자체가 관료사회의 진출이고, 양반이라는 특권계층도 사실 관료를 일컫는 말이라는 점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던 관료에게 우리 사회가 전통적으로 부과했던 가치는 ‘청렴’이었다. 비싼 옷, 기름진 음식, 으리으리한 집을 탐하지 않으며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 자식 교육에 힘쓰는 이가 최고의 관료였다. 선거철만 되면 다 헐어빠진 구두를 신고 장터에서 국밥을 먹으며 재산이라고는 선친이 물려주신 집 한 채와 시골 뒷산밖에 없는 정치인들의 전형은 여기서 기인한다. 그것이 전통적인 최고의 관료상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이념의 대립 속에서 ‘당위’를 찾는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유교는 종교보다 철학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으나 논리적인 학문으로서의 성격이 옅다. 특히 내세를 부정하고 현세의 행위에 집중하는 데 비해 스스로의 교리를 논리적 설득보다는 형이상학적 당위로 정당화하는 부분이 많다. (다른 철학들이 형이상학적이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철학 또는 종교에 대해 후대나 당대에 존재했던 논리학적 토대가 비교적 얕다는 이야기이다) 곧 다수의 교리의 정당성을 “마땅히 그래야 하므로”라는 식의, 인간의 선의에 기대는 설명밖에 할 수 없었다. 이타 종교들이 가졌던 후대의 논리학적 재해석의 영역도 이렇다 할 만한 시도가 없었다. 그런데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고 개인 간의 경험의 괴리가 커지면서, 사람들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의 기준이 크게 달라졌다. 이는 현대시대를 사는 우리의 사고관에도 영향을 미쳐 ‘다른 것’과 ‘틀린 것’의 구분을 옅게 만들었다. 서로 다른 사람끼리는 친구도 동반자도 될 수 있지만 틀려먹은 사람은 함께 살 수 없기에,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을 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주장의 논리적 정합성과 실질적 효용성을 따지는 건전한 토론의 문화 대신 상대의 주장보다 상대 그 자체가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지에 집중한다. 한쪽의 입장에서 다른 쪽을 보았을 때 상대방은 ‘틀린 것’, 더 나아가 거짓을 설파하는 ‘악’이기 때문에 이런 식의 깎아내리기는 지양되기보다 오히려 권장된다.


 이렇게 놓고 보니 우리의 ‘유교력’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드는 원천인 듯싶어 더욱더 거리를 두고 싶어 진다. 하지만 모든 사상이 그렇듯, 명이 있으면 암이 있고 또 암이 있으면 명이 있다. 지식산업사회를 이루는 고급인력을 키우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치열한 교육열, 민심이 천심임을 설파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현대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측면은 우리나라가 단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끈 동력으로 평가받는 중요한 유교적 특성이다.


 그렇다면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유교를 버리라는 것인가 말라는 것인가? 분명한 것은 이 문제가 그렇게 성급하게 재단할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유교는 확실히 우리나라 사회와 문화의 독특한 면모를 유지하는 믿음으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이런 역할을 하는 믿음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 각자의 방식으로 산재해있다. 실제로 그것이 가능한지의 여부와 무관하게, 우리가 유교를 버리고 타국의 훌륭해 보이는 사고관을 도입한다고 해서 그 믿음이 나름의 단점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좋은 특징들을 정체성으로서 지켜나가되, 시대와 맞지 않는 폐습을 청산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믿음 중 무엇이 잘못인지, 무엇이 부조리한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 모두의 믿음을 바꾸는 것인 만큼 당연히 쉽지 않을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어려울 수도 있고, 어쩌면 영원히 바뀌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믿음의 근본을 뒤흔드는 작업은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가치들을 전면적으로 해부하고 비판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믿음이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사고하고 판단할지 결정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생각보다 변혁이 빠를지도 모른다. 진정한 ‘21세기형 하이브리드 유교’의 탄생은 우리의 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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