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살기로 했지만 아직 진정으로 함께 있어본 적이 없는 법적 부부. 해질 무렵 세희와 지호가 일렁이는 파도에 비친 노을 앞에 나란히 앉았을 때,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의 방 한 칸을 내어주고 있었다.
온전히 내 짐을 모두 꺼내 너의 눈 앞에서 풀 수는 없지만, 먼지 쌓인 내 삶의 액자 하나는 함께 닦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서로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말할 순 없지만, 오늘이라면 이 사람에게 내 깨진 조각을 슬쩍 내비치고 아무도 몰래 저 파도에 흘려보낼 수 있지 않을까하며.
「제가 20대 때 좋아했던 시가 있는데, 거기 보면 그런 말이 나와요.
사람이 온다는 건, 그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그 마음이 오는 것이다.
막상 그 시를 좋아할 땐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그 말을 알고 나니까 그 시를 좋아할 수 없더라구요.
알고나면 못하는 게 많아요 인생에는.
그래서 저는 지호씨가 부럽습니다.
모른다는 건, 좋은거니까.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세희는 가슴 깊이 사랑했던 한 여자의 마음이 부서지는 것을 바로 옆에서 봤다. 그리고 부서진 조각들을 온몸으로 맞았다. 사람이 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됐을 때, 세희는 다시는 어떤 사람도 맞이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됐다.
사랑했던 아버지가 부순 건 내가 지켜줬어야 할 그 여자이기도 했지만 나이기도 했다. 그 시간을 지나며 세희는 누구도 자신의 방에 들이지 않았고, 문턱을 넘어 올 수 있는 건 고양이 뿐이었다.
그래서 세희는 20대 때 한 게 없어 모르는 게 많다는 지호가 다가오는 게 두렵다. 내게 묻은 냄새는 너무 역하고 견디기 힘든데, 그래서 지울 시도조차 못한 채 닫힌 방 안에서 코와 입을 막고 살고 있는데.
점점 닫힌 문을 열고 들어오려는 그녀에게 이 냄새를 모르고 사는 게 좋은 거라고 말한다. 내가 오롯이 견뎌야 할 악취를 이 사람이 맡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예전에 봤던 바다라도 오늘 이 바다는 처음이잖아요.
다 아는 것도, 해봤던 것도, 그 순간 그 사람과는 다 처음인 거잖아요.
우리 결혼처럼, 정류장때 키스처럼.
그 순간이 지난 다음 일들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냥, 그렇게 된 거지.
저중에 어떤 애는 그냥 흘러가고, 어떤 애는 부서지는 것처럼.
그냥 그렇게 되는거에요.
그러니까 세희씨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제를 살아봤다고 오늘을 다 아는 건 아니니까.」
지호에게 세희와 함께하는 많은 시간들은 모두 처음이다.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것들도 진정한 처음이지만, 먹어봤던 음식과 와봤던 바다도 이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라면 그 것 역시 진정 처음이다.
지호도 두려웠을 것이다. 처음 그와 결혼하고 그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을 때, 붉어지는 볼과 빠르게 뛰는 심장에 내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되지 않았고, 그냥 흘러왔고, 여기 그 옆에 앉아있다.
여전히 모르는 게 많은 나지만 내 옆에 앉아있는 이 사람이 두 번째 처음을 맞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안다.
누군가 다시 내 곁으로 들어왔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그 것이 또 나의 잘못이 아닐까. 다시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이 사람에게 말해줄 수 있는 건, 우리가 어제 걱정했던 오늘도 벌써 이렇게 다 지나가고 또 한번 노을 앞에서 내일을 기다리게 된다는 것 뿐이다.
지독한 감기에 걸려 다시는 이런 독한 감기는 걸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다. 집에 오면 젖은 수건을 걸고 코를 세척했고, 해열제를 가지고 다니며 조금 감기기운이 있는 것 같으면 바로 먹었다. 하지만 또 감기에 걸렸고 또 지독하게 앓았다. 그 이후로는 때때로 생각이 날 때마다 물을 마시긴 하지만 걸릴 때가 오면 걸리도록 그냥 두었다.
우리는 모두 세희처럼 내 마음의 방을 해열제라는 자물쇠로 채워야만 살 수 있는 지독한 감기를 앓는다. 다시는 이 문을 열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독한 진통제를 옆에 두고 산다. 그렇게 이불 속에만 있다 보면 세희가 그랬듯 지독한 냄새가 몸에 배여 스스로도 버틸 수 없는 때가 온다. 창문 밖에 사람들을 보며, 어쩌면 누군가 그 창문을 열어주길 바라기도 하면서.
결국 내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언제든 다시 아픔은 찾아온다. 어쩌면 더 독한 바이러스로 나를 괴롭힐 수도 있다. 하지만 지호가 말했듯 그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흘러온 것이고 그냥 부서진 것이다. 독한 감기에 다시 걸려도 그 고통은 처음과 같이 괴롭고 힘들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 감기는 언제 온지 모르게 오지만, 또 언제인지도 모르게 가니까.
그래서, 모르는 게 많은 우리라서, 처음 살아봐서 서투른 우리의 곁에는 그 아픔을 아는 세희가 필요하다.
또한, 아픔을 다시 겪더라도 지호는 그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주며 함께 이겨낼 테니, 모르는 게 많은 우리 옆의 지호를 토닥여주고 안아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