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계속 찾아오는 이유

연애의 발견

by 김기덕

사랑하는 마음에는 관성이 있다고 믿는다.

너무 깊이 사랑했다면, 크게 상처받고 끝을 맺었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 지난 사랑을 떠올릴 때에는 가슴 뜨겁게 내 모든 것을 주었던 때로 돌아가게 된다.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짧은 순간일지라도 가슴이 저릿하는 그 순간이 온다.



여름의 곁에는 분명 너무도 좋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다가오는 태하는

가장 순수했던 때, 가장 순수하게 사랑했던 단 한 사람이다.

태하는 그때의 뜨거웠던 여름의 모습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치사한 방법으로 계속해서 여름을 흔들어왔다.


여름이 태하를 미워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헤어진 게 아니라는 말을 하며 태하가 이제 진짜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오히려 여름과 태하는 진정한 헤어짐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여름이는 더 많이 좋아하는 쪽이 약자라고 말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연애가 끝나봐야 누가 강자인지, 누가 약자인지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때는 더 많이 좋아했던 쪽이 강자예요. 미련이 없으니까.

나처럼 사랑을 받기만 했던 사람은 후회와 미련이 남잖아요.

그렇게 되면 평생 그 사람을 잊을 수 없게 되는 거거든요.


강자는요, 좋아할 수 있는 만큼 좋아해 보고, 해볼만큼 다해본 그런 사람이 강자예요.

여름이 같은 사람이요. 」


'진짜 헤어짐'을 말하고 여름에게서 멀어지려 했을 때, 태하는 연애가 끝난 후의 약자가 되어 평생 여름을 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또 후회한다.

사랑을 받기만 했던 것을. 좋아할 수 있는 만큼, 해볼만큼 다 해보지 못한 것을.


그래서 태하는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함께 갔던 연리지, 함께 들었던 브라운아이드소울을 꺼내면서 나는 앞으로도 너와의 소중한 추억들을 꺼내볼 수밖에 없는 이별의 약자임을 여름에게 말한다.

잘 지내겠다고 말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잘 지내기 위해 계속해서 여름을 찾아가 바라본다.

태하는 어쩌면 여름이를 잊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연애할 때 더 좋아하지 못해서

약자가 된 지금에서야 그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잘 좀 지내면 안 돼? 잘 지낸다고 거짓말할 생각 말아. 잘 못 지내는 거 알아.

태하 씨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나도 태하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왜 자꾸 찾아오니?

니 인생 잘살면 됐지 왜 자꾸 찾아오냐구.

그렇게 나를 자꾸 찾아오면, 내가 너를 기다리게 되잖아.

하루에도 몇 번씩 창 밖을 보는 줄 알아?」



태하의 생각은 틀렸다.

사랑할 때 모든 것을 쏟아부은 사람은, 이별한 후에도 감당해야 할 그때의 감정이 너무나 크다.

그 사람이 나와의 추억을 꺼내면 나도 그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알려주고 싶다.

나도 그 노래와 그때 그 나무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너와 찍은 사진들을 아직 버리지도 못한 채 외면이라는 상자 안에 두고 시간이 해결해 주기만을 가디라고 있다고.

여름은 자꾸 찾아오는 태하를 어느새 기다리고 있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여전히 사랑의 약자임을 느낀다.

그리고 태하가 바라는 여름의 행복이란, 결국 태하와 함께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됐을 것이다.

늦은 새벽,

내가 그쪽으로 건너갈 수도, 너를 내쪽으로 건너오라고 할 수도 없는 그 다리에서 여름은 주저앉아 울 수밖에 없었다.



옆에 다른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감정을 외면하면, 오히려 그 감정이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나서야 돌이킬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가장 순수하고 뜨거웠던 20대의 연애만큼 ‘사랑’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그때 그 사람에게 줬던 내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서 똑같이 받을 수도, 똑같이 줄 수도 없는 그때 그 시간 자체다.

그리고 그런 시간을 나눈 사람이 다시 사랑의 약자로 돌아와 나를 찾아오고 기다릴 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흔들리는 내 감정에 솔직할 수도, 그 마음을 외면하고 혼자서 행복할 수도 없는 여름을 비난하기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리 도덕적이지 않다.


만약 사랑과 이별의 총량이 있어서 사랑한 만큼 이별할 때 덜 아플 수 있다면,

그래서 태하의 말처럼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강자가 되어 미련도 후회도 없이 깔끔하게 이별할 수 있다면,

마음껏 사랑하고 모든 걸 쏟아부어도 될 텐데.

하지만 때로는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더 많이 아프기도, 나중에 더 아플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더 꺼내보이기도 하는 그런 불공평한 게 사랑인가 보다.


더 좋아하지 못해서 후회하는 수많은 태하와

어쩌면 그 사람이 날 그리워하며 찾아오길 바라고 있을지 모를 수많은 여름에게,

뜨거운 여름을 보낸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찾아오고 기다리는 이유는 그저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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