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를 해고하는 일에 동의하는 대신 135만 원의 보너스를 준다면 무엇을 택할 것인가?(투표는 비밀로 진행된다)
‘저는 보너스를 포기하고 동료랑 같이 일하고 싶어요’
‘저에게는 그 돈이 필요해서요..’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글쎄요 고민 좀 해볼게요’
‘미안합니다. 저도 상황이 여유롭지는 않아서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아마도 대부분은 돈을 선택할 것이다. 여러분은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있는가? 물론, 흔한 일은 아니지만, 현실 어딘가에서 한 번쯤 있을 법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 상황은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의 주인공이 겪는 현실이다.
상시적 고용 불안의 시대
이런 현실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다. 최근 코로나로 경영이 어려워지자 권고사직을 권유받은 사람이 10명 중 7명이나 된다고 한다. 게다가 어떤 회사는 20대 신입에게 까지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고 한다. 40대, 50대는 경제 상황이 안 좋아지자 2019년에 무려 50만 명이 비자발적 퇴직했다고 한다. 아마 코로나로 인해 2020년에는 더 많은 비자발적 퇴직이 있었을 것이다.
미래의 우리는 상시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릴 것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일자리를 앗아가고 있다. 최근 전기차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관련 부품 공장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전기차에 필요한 부품의 수량은 기존 자동차 대비 40% 정도의 수준이라고 한다. 기술의 발달로 제조업 일자리도 위협을 받고 있다.
심지어 무인매장이 한둘씩 늘어나면서 서비스직에 대한 수요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 와중에 자율 주행 자동차마저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하니, 만약 개발된다면 수많은 운전자가 일자리를 잃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몇몇 언론에서는 미래에 사라질 직업 TOP10이라고 순위를 매기며 우리의 불안을 증폭시킨다.
출처 : 뉴시스
지금은 단순 노동에서 시작하고 있는 작은 변화지만, 전문가들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는 전문직을 포함해 더 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예상한다. 이 문제는 이미 일을 하는 사람부터 대학생, 구직자에게까지 많은 불안감을 안겨준다. 구직자인 나도 물론 이런 걱정을 가끔 할 때가 있다.
‘혹시 나도 대체되는 거 아닌가’
‘나는 도대체 미래에 어떤 일을 해야 되지?’
‘내가 선택한 일이 나중에 사라지면 어떻게 하지?’
2015년에 나온 영화<내일을 위한 시간>의 주인공 ‘산드라’는 우울증으로 병가를 냈다가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집의 대출금을 갚을 수 없기에 다시 복직하려 한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그녀의 복직과 보너스 1,000유로(한화 135만 원 정도)중에 선택하라고 투표를 한다.
그녀는 직원 16명 중 14명이 1,000유로(한화 135만원정도)의 보너스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그런데 사실은 제조업인 회사의 사정이 좋지 않고 그녀가 없어도 공장이 충분히 가동된다는 사실을 알자, 반장이 반강제적인 협박을 통해 보너스와 그녀의 복귀를 놓고 투표하게 했던 것이다. 주인공과 주인공의 동료는 사장을 직접 찾아가고 주인공은 결국 재투표의 기회를 얻는다.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Deux jours, une nuit(Two days, one night)이다.
제목 그대로 영화는 이틀 동안 주인공이 동료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찾아다니는 과정을 보여준다.
<내일을 위한 시간> 주인공 산드라(출처 : 네이버 영화)
주인공은 동료의 집에 일일이 직접 찾아가서 자신을 위해 투표해 달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그들 중 몇몇은 나름의 사정으로 주인공의 부탁을 거절한다. 어떤 이들은 그녀의 복귀와 보너스를 놓고 싸우기도 한다. 그중 한 직원은 그녀가 찾아오자 자신이 용서받을 기회를 줘서 고맙다며 오히려 감사한다. 또 다른 직원은 계약직이라서 그녀에게 투표하면 재계약이 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누가 주인공의 요청을 거절했다고 해서 잘못된 일일까? 찰리 채플린의 1936년도 영화 <모던 타임스>에서는 공장 노동자들은 일종의 부품 같은 존재로 묘사한다. 노동자는 고장 나면 버리고, 새로 갈아 끼우는 존재이다. 자본가가 아닌 힘없는 노동자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수밖에 없다. 나에게 투표해달라는 주인공의 부탁은 같은 힘 없는 노동자에겐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이 영화는 2015년, 현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1936년에 일어나고 있는 일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일은 비단 공장 노동자에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다. 사무직, 전문직을 포함해 여러 가지 일의 대부분은 분명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돈을 주고 앉혀놓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미래에 일어날 일도 결국 별로 다를 바 없다. 이제는 사람을 대신해서 기계와 인공지능이 할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글이 '사라질 직업'이나 '노동자들이여 연대하라' 같은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고, 우리는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어떻게든 먹고 살길을 찾을 것이다. 과거 산업혁명 시절에도 많은 사람이 실직했지만, 그만큼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기도 했으며, 전체 실업률은 비슷하다고 한다. 어떤 이는 이런 새로운 산업 혁명을 기회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인간소외'에 관해서는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산업혁명은 '인간소외'라는 결과를 낳곤 했다. 새로운 산업혁명이 들이닥친다면,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물질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신적'문제도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나라가 OECD 자살률 1위 국가인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신적인 부분에서 그 어느 나라보다 취약한 사회에서, 이런 새로운 혁명 앞에 놓인 '인간소외'는 우리에게 위험하기 짝이 없는 미래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
*밑에서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여러 명의 도움을 받지만 결국 투표에서 과반수 이상을 확보하지 못해 복직에 실패한다. 그녀는 자신을 지지해준 사람들과 마지막 포옹을 나누며 회사를 떠난다. 사장은 그녀를 불러 회사 분위기가 흉흉하니 계약직의 계약이 종료되면 보너스와 함께 그녀를 복직시켜주겠다며 제안을 한다.
하지만 그 계약직은 그녀의 복직을 지지하고 투표해준 사람이었다. 그녀는 사장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리고 주인공이 밖으로 나와 남편과 통화하며 꺼낸 한 마디,
"나 행복해"
영화는 거리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여주면서 끝이 난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발걸음은 어쩐지 한결 가벼워 보인다.
무엇이 그녀를 행복하게 했을까?
나는 원제목인 Two days, one night보다 <내일을 위한 시간>이라는 우리나라 제목이 더 좋다. 미래가 되기 전에 우리에게는 '네 일'이 '내 일'이 되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지지해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다. 이제 그녀는 두렵지 않다.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하지만 그녀는 좌절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가 일하는 직장이, 직업이 하루아침에 날아가는 일은 내가 어쩔 수 없는 영역이며, 앞으로 우리가 숱하게 부닥쳐야 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 나의 아픔에 공감하고 지지해준다면, 훌훌 털어내고 새롭게 나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누군가에게는 나아갈 용기와 희망이 된다. 그리고 미래에는 그런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