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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경계에서도 사람 살아요!

by 퇴B



사실 지금 브런치에 올리고 있는 글들은 실시간으로 쓴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1km’라는, 지금은 데이팅 어플로 더 잘 알려진 앱에서 무려 8년 동안 묵혀뒀던 글들이다.


인스타는 이미지 중심이라 맞지 않았고, 트위터(X)는 단문 위주라 숨이 막혔다.

그런데 ‘일키로’는 달랐다. 글자 수 제한도 넉넉했고, 무엇보다 완벽한 익명이 보장되었다.

이용자도 많지 않아 눈치 볼 필요가 없었던 그 한적한 공간에서, 나는 온갖 개소리를 마음껏 쏟아냈다.


남들은 암수가 서로 정다워 달콤한 DM을 주고받을 때, 나는 그곳에서 글을 썼다.

개발자의 의도와는 분명 달랐겠지만, ‘실존적으로 사용한다’는 억지를 부리며 나만의 SNS처럼 쓰고 있었던 거다.


물론 나만 그랬던 건 아니다.

십 년 전만 해도 그곳엔 ‘글쟁이’들이 많았다.

감성과 센스로 무장한 사람들이 공작새 깃털처럼 화려한 문장을 펼쳐냈고, 실제로 출판으로 이어진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출판사 관계자들이 기웃거리곤 했는데, 나 역시 출간 작가를 찾으려는 출판사 직원 자격으로 그곳에 들어갔다가— 정작 내가 눌러앉아 버렸다.


지금은 여러 악재로 사용자가 줄고 ‘익명 데이팅 앱’이라는 본연의 기능(?)만 남은 채 대부분의 글쟁이들은 떠나버렸다.

하지만 나는 떠나지 못했다.

그곳에 혼수처럼 쌓인, 수천 개의 글들이 아까워서.


‘익명’이라는 조건, 그리고 ‘극히 소수만이 읽는’ 환경.

이 두 가지는 지금 보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내 글들을 솔직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곳에서 날것 그대로의 내장을 꺼내놓듯 글을 썼다.

꾸밀 필요도, 포장할 이유도 없었다.

그때의 해방감이란!

진정한 즐거움은 그 누구에게도 잘 보일 필요가 없을 때 찾아온다는 걸, 나는 그때 배웠다.


출판사를 그만둔 뒤에도 나는 그곳에서 글을 이어갔다.

오랜 시간 교류하던 고정 이웃들은 거의 가족 같았다.

세상살이의 부침, 통곡, 이별의 잔해, 그날의 식단, 사소한 자랑들—

그 한 줌의 온기 속에서 주고받은 서로에 대한 관심은, 이 지독한 세상 속에서 우리를 생존시켰다.

우린 서로 책임질 수 없을 만큼 솔직했고, 그 민낯을 공유한 사이엔 묘한 전우애마저 흘렀다.


그러다 어느 날, 두려움이 닥쳤다.

올여름쯤, 이용자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걸 체감한 것이다.

대부분의 글을 앱에 바로 쓰고 저장해 뒀던 터라, ‘이 공간이 사라지면 내 글들은 증발하는 건가?’ 하는 공포가 엄습했다.


사실 출판사의 연락은 몇 년 전 이미 왔었다.

내 글을 책으로 묶어보자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거절했다.

너무 날것이라, 당시의 나를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간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공포는 내 망설임보다 단단했다.

결국 뒤늦게 연락을 다시 드렸고, 조금씩 퇴고한 원고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돌아온 피드백은 뜻밖이었다.


“타깃 독자가 불분명하다.”


에세이 독자가 읽기엔 사유의 밀도가 너무 높고,

인문교양 독자가 읽기엔 개인적 감상과 문학적 비유가 너무 많다는 것.

그래서 글을 반토막 내고, 노선을 명확히 정한 뒤 글감만 남겨 새로 쓰자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모호한 경계성’— 바로 그 애매한 지대가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자, 나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출판 욕심을 낸 것도, 사실은 그 경계 위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나 자신을 단 한 번만이라도 온전히 인정받고 싶어서였다.

그 경계를 도려낸다면, 출간할 이유 자체가 사라진다.


출판사는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 특이한 장르에 독자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세요.”


그들은 브런치를 권했다.

이곳에서 ‘가능한 독자’를 시험해 보자고 했다.


그렇게 이곳에 왔다.

와서 보니 알겠더라.

이곳엔 이미 글로 살아가는 괴물들이 넘쳐나고,

출판 시장은 더 이상 작가를 ‘발굴’하는 곳이 아니라, ‘이미 독자를 데리고 있는 사람’을 확인하는 구조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하지만 경쟁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출판사가 말했던 ‘타깃 독자의 불분명함’이 무슨 뜻인지, 뼈저리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타깃 독자는 누구인가?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아니, 정할 수 없다.

내 글의 결은 어느 한 장르로 고정되지 않으니까.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글.

에세이라기엔 사유가 많고,

인문이라기엔 감정이 넘치고,

문학이라기엔 지나치게 솔직한 글.


장르와 장르 사이, 온도와 온도 사이의 흐린 경계에서만 간신히 숨을 쉬는 글들.


그게 내가 쓰는 글이고, 세상의 보편에서 밀려난 ‘장외인간’으로서 사는 나의 정체성이다.


모양을 갖추기 위해 어느 한쪽으로 밀어붙이면, 나는 무너진다.

내 글은 안정된 구조가 아니라, 늘 그 불안정한 경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니까.


그런데— 그럼 안 되는 걸까?


타깃을 명확히 하지 못한 글도,

어디에도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한 글도,

그 경계에서만 쏟아낼 수 있는 이 글들로 존재할 수는 없는 걸까?


매일을 앎과 삶의 경계에서,

자존심과 자긍심의 사선에서,

버팀과 체념의 다리 어딘가를 오가는 내가—

혹은 나처럼 존재하는 사람들이— 그대로 존재하면 안 되는 건가?


내 글들은 결국 그 흐린 경계에서 버티는 생존자의 증언이자, 생존의 증상이다.


그렇게 오늘도 쓰고 있고, 즉, 난 아직 살아있다.




___

그리고 요즈음 글을 못 올리는 건

사교육 강사로서 목구멍이 포도청에 갇혀 있어서입니다ㅜ

사람 살려요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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