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이십 년이나 됐나.
그 시절 나랑 피씨방에서 소 몰아 잡으며 밤을 새우던 디아블로 전우님께서 따님의 결혼 소식을 알려왔다.
나는 그 시절 코찔찔이 었던 딸내미가 벌써 결혼할 나이가 됐다는 게 매우 놀라웠다.
왜냐면 우린 세월이 멈춘 것처럼 아직도 연락하고, 별 시답잖은 추억 얘기로 낄낄거리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우리만은 영영 철없이, 세월이 비껴갈 줄 알았건만.
오빠는 지 손으로 빤스 한 장 빨아본 적 없는 애가, 남의 집 시커먼 아들놈 양말을 빨아줘야 한다는 사실에 몹시 분개하셨다.
“아니 요즘 세상에 누가 손으로 양말을 빨아요. 다 세탁기가 하지.”
“아니야! 우리가 그렇게 안 키웠어!”
새벽같이 장사를 나가 열댓 시간을 일하고, 늦은 밤에 퇴근해서는 길드원 살림살이도 살펴보던 양반이 뭘 얼만큼 애지중지 키운 건지 오빠네 집 딸내미는 속옷이고 양말이고 다 손으로 빨아 입혔단다.
그렇게 귀하게 키웠다며 자신감에 넘쳐 분개할 땐 언제고, 곧 뒤이어 볼멘소리로,
“해놓은 것도 없고, 해줄 것도 없어서 너무 마음이 아프다. 게임 같은 거 하지 말고 대리운전이라도 해서 돈을 더 벌어뒀어야 하는 건데…” 한다.
그런가?
하루에 한두 시간조차 자신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그 즐거움마저도 돈이 되었어야 했을까?
오빠는 그냥 속상함을 말했을 뿐인데,
오빠의 생각 속에서 세상이 오빠를 번역하는 방식이 속상하다.
‘게임에 빠져 현실을 소홀히 한 사람.’
나는 그게 얼마나 부정확하고 얼마나 잔인한 해석인지 너무 잘 안다.
어떤 사람들은 게임이 의지력 약한 사람들이 재미라는 쾌락에 젖어 환상의 보상을 쫓는 거라고 손가락질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현실에서 못 다 피운 인류애를 가상공간에서 채우며 내일을 살 힘을 얻기도 한다.
오빠가 그 경우였다고 난 생각한다.
오빠는 게임 속에서 늘 헌신했다.
어렵게 구한 장비라도 팔아서 게임머니를 만드는 게 아니라, 필요하다는 사람에게 거저 주었고, 누군가 힘든 퀘스트를 못 깨고 있으면 오늘 자기 보상을 미루더라도 그 유저와 함께했다.
게임에서 고른 직업마저도 몸빵 하는 탱커였다.
다른 캐릭터가 맞아야 할 매를 대신 맞는 직업.
배운 게 도둑질이라서 저런 인간류를 심리학적으로는 보상심리로 분석해 볼 수도 있겠고,
사회학적으로는 ‘자기희생적 역할고착(sacrificial role fixation)’ 같은 약간 병적인 상태로 볼 수도 있겠고,
철학적으로는 ‘가상적 미덕(pseudo-virtue)’이나 ‘대리 윤리(substitute ethics)’ 같은 허위의식의 현상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는데—
다 필요 없고 내 심정은 저런 사람 없다였다.
생존보상을 포기하고 내게 마지막 물약을 던져 먹이고 대신 죽어가던 저 캐릭터를,
난 ‘가상공간의 위선적 캐릭터’라고 도무지 말 못 하겠다.
그 당시 저 오빠를 포함해서 같은 길드원이었던 사람들이랑 십 년에 걸쳐 여러 게임을 함께해 왔다.
어디서나 오빠는 탱커였고, 늘 우릴 대신해서 맞거나 죽었다.
우리 실수로 몇 시간씩 고전하던 던전에서 전멸해도 오빠는 싫은 소리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항상 “아 나 이제 알 거 같아. 한 번 더 해볼 사람?”을 외쳤지.
어떤 사람들은 그건 게임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로그아웃만 하면 아무런 현실적 책임이 뒤따르지 않는 곳에서 부리는 위용일지도 모른다고.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런데 만약 그게 허세고 위용이라면, 왜 그렇게 했어야 했을까?
게임이 가상세계라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인간의 본질적 욕망과 닿아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빠는 그러고 싶었던 사람이었던 거다.
그게 실제에서 현실적 책임과 맞닥뜨려 드러났든 아니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고, 누군가를 대신해서 희생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는 사람인 거다.
현실에서 누군가를 돕고 대신 맞아주는 일은 마음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시간도 들고 돈도 들고 책임까지 따라오는 너무 거대한 선택이니까,
오빠의 그런 선한 욕망은 현실에선 종종 가족의 필요와 어긋나는 일도 있었을 거다.
결국 현실에서조차 선한 사람이었던 오빠는 개인의 욕망에 우선하는 일상적 책임의 무게를 더 크게 느꼈던 거겠지.
그래서 더 뒷전으로 밀리고, 억눌린 채 남아 있던 자아를 그나마 실천할 수 있었던 곳이 게임이 아니었을까.
오빠는 그 욕망을 행할 수 있는 공간에서라도 꾸준히 실천했던 거다.
그리고 나는 어땠냐면—정말 제멋대로였다.
나는 오빠와 정 반대로 움직였다.
현실에서는 벽돌처럼 틀에 맞춰 살아도, 게임에 들어가면 한 손으로 대충 쏘던 나쁜 원거리 딜러였다.
나야말로 자기 연민에 절여진 보상심리로 게임하는 사람이었다.
낮 동안에 부대끼던 사람이 싫어서 가상공간으로 도망가, 오빠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사람으로 살게 된.
사람이 사람처럼 살기 위해 필요한 게 돈뿐이었다면, 난 굳이 게임 속으로 도망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난 허전하고 불안했다.
만나는 모든 사람과 싸우고 있었고, 세상은 항상 내게 요구했다.
“네 쓸모를 증명해 보라”라고.
난 나를 증명하고 변명하느라 식은땀을 흘리며 하루를 버텨냈고,
그러자 곧 세상이 무서웠다.
사실 난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그게 들키면 큰일 날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면 버려질 것 같았다.
그래서 게임 속에선 더 제멋대로였던 것 같다.
나는 게임을 통해 쓸모없는 나와도 관계해 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게 가능했던 건, 언제나 앞에서 맞아주던 어떤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못하니 게임에서나 그런 행동을 하는 거다’라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선한 일을 실제로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 같다고 느낀다.
게임에서 드러난 성정이야말로 현실에서 억눌린 본심의 잔광이다.
가상에서조차 남을 챙기기 힘든 게 인간이다.
그걸 꾸준히 하는 사람은 결국 어떤 자리에서도 그렇게 한다.
그렇다면 예상컨대,
게임 속에서 오빠의 접속 여부가 던전 클리어의 승패와 강력한 관계가 있었던 것처럼,
그저 그런 오빠의 존재만으로도 따님의 인생 난이도는 훨씬 내려갔을 거라고 생각한다.
오빠는 항상 내게 “왜 니가 그렇게 됐냐?”라고 잃어버린 세월에 대해 황당해하지만,
나야말로 내 게임 인생의 치트키였던 당신도 어려운 퀘스트가 있나 싶고,
이 게임의 난이도와 밸런스가 어이없을 따름이다.
일어나라 용사여—
괜찮아요. 난 잊지 않아요.
내게 마지막 물약을 던져 먹이고 죽어갔던 당신의 희생을.
당신에겐 고민할 문제도 아니었던 당연한 선택들이
우리에게는 생과 사를 가름 짓는 고비에서 기적적으로 만난 신의 축복 같았듯이,
아마 따님도
당신은 기억조차 하지 못한 사소한 희생들을 밑절미로 매일을 살아남지 않았을까나요.
죽지 않고 사는 일, 그게 퀘스트 완료를 위해 가장 중요한 선제조건이고.
살려놨으니 마왕은 따님이 어떻게든 때려잡겠죠!
그 애는 분명 잘할 거다.
원래 신컨 심은 덴 신컨 나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