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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뜨거워야 제맛입니다

차茶로 보는 인간의 은유

by 퇴B


쉽게 끓지 않으려고
끓는점을 잊어가는 무감한 사람들 앞에
우리는 온전한 우리를 보여줄 수 있을까요?



녹차로 따지면 이제 중작쯤 됐으려나.

찻잎은 채엽 시기에 따라 우전(雨前), 세작(細雀), 중작(中雀), 대작(大雀)이라 부른다.


그중 우전은 곡우(4월 20일경) 전에 딴 가장 어린 새순으로,

떫은맛이 거의 없고 향이 맑아 찻잎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며 가장 비싸다.

나는 그 시절을 이미 지나왔다.

그러니 이제는 중작쯤은 됐겠지.


어쩌면 세상에 덖어지며, 때도 좀 타가며, 혼자 숙성된 탓에.

나는 녹차라기보단 반발효 차인 우롱차에 더 가깝다.

떫고 쓴맛이 본성이라 할지라도,

세월에 이만큼 덖이고 나니 떫고 쓴맛 정도는

쉽게 우려내지 않고 숨길 줄도 알게 됐다.


그래도 홍차(완전발효차)라기엔 바이브가 부족하고,

보이차(후발효 숙성차)라기엔 짬이 덜 차서 겸연쩍다.

그러니, 우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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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는 세차(洗茶/첫물 버리기) 없이 첫물부터 마시지만

발효차들은 찻잎을 한 번 씻은 뒤에야 제맛을 낸다.

세월을 삭이며 바짝 태운 먼지들을 씻어내는 일이다.


또한 녹차는 미지근한 물에 우려야 떫은맛이 덜하지만,

발효차는 팔팔 끓는 물에 담겨야 비로소 향이 오른다.


세차가 필요한, 제법 번거로운 인간이 되어버렸으니

이제 내 맛을 느끼려면 팔팔 끓는 사람이어야 한다.


끓는점이 높은 사람이 되려고,

끓는 법을 잊어가는 무감한 사람들 앞에선

나를 풀어낼 수가 없다.



팔팔 끓는 물에 뜨겁게 잠기고 싶다.

내다 버릴 첫물을 냉큼 삼키며

“아, 나 이런 사람 잘 알지.” 헛물을 켜는

미적지근한 관계에서는

이 세월 버텨온 향이 억울해서—

울어낼 수가 없다(우려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우전이 아니라서 미안합니다.

살다 보니 이렇게 번거로운 사람이 됐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삶이 팔팔 끓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한잔하고 가시지요.


뜨겁게 즐겨주시면

오래 남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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