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내일 회고록5] 재고 따지는, 30대 연애

by 이 오늘내일

다섯 번째 오늘내일 회고록에서는 30대 연애에 관한 소고를 담아보고자 합니다.


지난 이별을 계기로 남녀 무관하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보고 겪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시간적인 여유가 많이 생기다 보니까 그만큼 또 다른 사람들로 무언가를 채우고 있더군요.

이제 막 30대에 진입한 제가 하기에는 다소 오만한 이야기일 수 있으나

나이와 성숙함이 꼭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연애시장에서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연애도 시장인가요?



어렸을 때부터 저는 그다지 잔머리가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공부할 때도 무식하게 A부터 Z까지 모조리 외워야지만 속이 시원했고

멍청하게 전부 암기하고 이해하는 것이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고집스러운 면모도 있었어요.

친구든 가족이든 사실 거짓말하는 법도 잘 몰라서 애매하게 짓는 눈웃음으로 속이 들키기 일쑤였습니다.

어차피 잘 못하기도 하고 진심 아닌 마음에 하루종일 속이 불편한 사람인지라

10대, 20대에는 그다지 머리를 쓰지 않고 제 속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었던 것 같아요.


그냥 '나'를 투명하게 보여주되, 아닌 사람은 하루 빨리 끊어내서 최소한의 자기방어 수단을 확보하려고 했죠.

그렇게 해도 열정 넘치고 순수한 20대에서는 연애를 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친구들 사이에서 '프로 장기연애러'로 연애고민을 털어놓기에 가장 적합한 상대로 통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웃기기만 하지만 그당시에는 남자친구의 속마음이나 향후 방향성, 데이트 코스 등

사람관계에 해법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잘도 떠들어댔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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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부터 시작한 장기연애 5년, 그이후 3년, 2년, 1년, 8개월 (이하 잡다구리는 생략…)

여러 연애를 겪으면서 그 기간도 계속해서 짧아졌지만 제가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도 크게 변화했어요.


무작정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주고 또 주고 또 퍼주던 20대와 달리,

30대 연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눈치싸움' 혹은 '기싸움'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선톡을 할지, 답장 텀은 어떻게 할 것 인지, 대화내용은 누가 주도할지 등등

왜 이렇게 다들 머리를 쓰고 사는 건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바쁘게 일하고 와서 기분 좋게 연락하고 싶었던 저의 마음과는 달리

제 답장의 속도와 텍스트 길이를 계산해서 딱 주는 만큼만 되돌려 주려는 상대방을 볼 때면

저 역시도 딱 그만큼만 하게 되더라고요. (사실은 똑같은 사람인거겠죠.)

먼저 양보하면 그게 권리인 줄 알고 저를 자신의 입맛대로 고쳐놓으려고 하는 가스라이터들도 많았어요.


결혼준비를 하면서 저와 여자친구 둘 모두를 속이며 기만하던 상대방도 있었고,

소개팅 자리에서 대뜸 재산과 부모님의 노후준비부터 공유하자던 상대방도 있었고,

다자연애나 FWB 등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상대방도 있었고,

약 30년의 인생 동안 이 사람 저 사람(*혹은 이 똥 저 똥) 그래도 적지 않게 겪어보면서

요즘 가장 큰 걱정은 진심을 쏟는 방법을 잊어버리게 됐다는 점입니다.


감정도 사실은 어느정도 학습의 영역이어서

감정을 어떻게 인식하고 표현하며 조절하느냐는 자신이 해오던 대로 유지하는 경향이 있어요.

인간의 뇌는 불확실성을 싫어하기 때문에 정보의 공백을 계속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로만 채우는

일종의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을 반복하게 됩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았을 때 역으로 더 큰 상실감을 경험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지금의 재고 따지고 눈치보고 기싸움만 하는 어른 연애의 패턴을 형성했겠죠.

다 같은 사람끼리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속이 상하기도 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왜
상처는 더 깊어지고 아픈 기억은 더 진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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