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무꽃을 보다가
빽빽이 피어난 갯무꽃을 보았다. 가까이에서 보면 서로가 서로를 덮을 듯 숨이 막히도록 밀집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그들 사이엔 분명 숨 쉴 틈이 있다. 각자의 자리를 조금도 침범하지 않고 서로의 생존을 위해 조심스레 공간을 나누며 서 있다. 그렇게 서 있으면서도 전체로 보면 하나의 풍경이 되어 놀라운 조화를 이룬다. 나는 그 존중의 아주 작은 물리적 공간에서 큰 감동을 받곤 한다. 존재란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도 함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걸 배운다. 사람 사이에도 그런 틈이 필요하다. 무너지지 않기 위한 거리. 상처 주지 않기 위한 여백. 온기를 나누면서도 내 안에 남아 있는 나를 지키는 거룩한 공간. 나는 그런 곳에야말로 진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누구도 소리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빛나지만 그 빛이 모여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순간 나는 그 조화와 질서 안에서 비로소 아름답다 라고 느낀다.
호주 유학 시절 기차 플랫폼에서 동냥하던 아주 어린 소녀를 본 적이 있다. 다섯 살쯤 되었을까. 커다란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작은 손을 내미는 모습이 어쩐지 익숙하지 않은 듯 조심스러웠다. 그날은 운이 좋지 않았던지 자꾸만 거절당하던 아이는 어느 순간 거리 한복판에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하늘을 바라보며 간절히 애원하기 시작했다. 너무 작고 너무 순해서 아플 정도로 선명했던 그 기도하는 뒷모습에서 나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성스러움을 느꼈다. 인간은 절실할 때 신을 찾는다. 가장 낮아지고 가장 비참해졌다고 느낄 때 사람은 본능처럼 위를 본다. 신은 건물이나 제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절박한 순간 앞에 조용히 현존하고 계신다. 나는 그 아이의 무릎에서 내가 믿는 신의 따뜻한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은 강론보다 더 깊었고 찬양보다 더 뜨거웠다. 인간의 거룩함은 그렇게 가장 낮은 곳에 있었다.
예술품 앞에서도 나는 그런 거룩함을 본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기준은 언제나 그 작품 안에 담긴 고통의 크기와 진실함에 비례한다. 겉으로 드러난 기교나 세련됨보다는 그것을 감당하며 견뎌낸 흔적에서 나는 깊은 아름다움을 느낀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것을 품어내는 방식은 각자의 몫이고 그 품은 흔적이 그대로 스며든 작품 앞에서 나는 내 고통도 함께 오버랩된다. 그 순간 나는 무너지는 동시에 채워진다. 설명할 수 없는 뜨거움으로 충만해진다. 그래서 나는 그 감정의 파도 안에서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행복해진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돌아보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했던 순간은 그 사람을 아름답게 보려는 노력을 시작했을 때였다. 그 사람의 상처도. 실수도. 부족함도. 마치 풍경 속 나무 한 그루처럼 시선에 덮여졌고. 그런 마음이 쌓여 사랑이 되었다. 선인장 가시 같은 단점조차 품어줄 수 있을 때. 그 사랑은 진짜였다. 사랑은 때때로 한 사람이 얼마나 넓은 품을 가지려 애썼는지를 보여주는 조용한 기도였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 사람의 허물 속에서조차 향기를 찾고. 모난 언어 너머에 감춰진 외로움을 껴안으려는 마음. 그건 단순히 좋아하는 것과는 다른. 내 안의 무언가를 내어주는 선택이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랑은 상대의 온전함을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그 불완전함을 함께 살아주는 일이었다는 걸. 그 사람의 내면에서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를 발견하고. 그것이 언젠가 피어나리라는 믿음으로 오늘을 함께 견디는 것. 그래서 나는 오늘 하루도 그렇게. 한 사람을 사랑하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내 마음이 닿는 모든 곳에 그 따뜻한 눈길이 머물기를 바란다. 어떤 인연이든. 어떤 만남이든. 조용한 존중과 애틋함이 배어든 사랑으로. 아름다움을 피워내길 바라며. 나는 다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루를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