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폴레토에서 제주까지 멈춘 시간 속을 거닐다

by 이 경화


몇 년 전, 나는 스폴레토의 어느 골목에서 멈춰 섰다. 이탈리아에 머물던 16일 동안, 도시의 화려함보다 소도시의 정취를 탐닉하는 것이 내 방식이었다. 그중에서도 스폴레토와 굽비오는 유난히 깊이 남아 있다. 그곳은 시간이 멈춘 듯했고, 아니, 어쩌면 시간이 고스란히 보존된 액자 속에 내가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굽이굽이 이어진 골목길을 걷다가 마주한 작은 광장, 낡은 건물들 사이로 난 돌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햇살이 담장 위를 스치며 지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길 모퉁이를 천천히 가로지르는 고양이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무심히 손을 흔들며 그 녀석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곳의 건물들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었다. 그 벽들은 햇살과 바람을 오롯이 받아내며 색을 바꿔갔고, 낮과 밤, 그리고 계절마다 다르게 숨 쉬었다. 벽돌과 돌이 조화를 이루며 오래된 세월을 증언하는 그 공간에서, 나는 익숙한 듯 낯선 온기를 느꼈다. 시간의 결이 스며 있는 그 돌담의 질감은 한없이 따뜻하고 충만했다. 그곳에서 나는 내 안의 어떤 조각들이 위로받고 있음을 알았다.


낡은 건물에서 풍기는 냄새는 그 자체로 시간이 쌓인 향이었다. 따스한 햇살에 데워진 돌, 창문 너머로 스쳐 오는 바람, 지나가는 사람들의 낮은 속삭임이 한데 어우러져 그곳을 살아 숨 쉬게 했다. 나는 계단에 앉아 내 과거의 기억들을 그곳에 조용히 걸쳐 두었다. 한때 축축했던 시간들, 묵직했던 순간들, 나를 무겁게 했던 것들이 그곳에서는 스르르 녹아내렸다. 머리 위로 구름이 머물렀다. 빛과 어둠이 서로를 밀고 당기며 만들어내는 장면은, 마치 거대한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펼쳐졌다. 햇볕이 건물 외벽을 타고 내려와 한켠에 그림자를 만들었다가, 구름이 움직이면 또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그 순간의 연속들이 마치 한 장면 한 장면 분할된 수만 장의 필름처럼 다가왔다.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사차원의 공간 속에서, 나는 나를 잊고 있었다.


새들이 지저귀고, 2층 테라스에서는 빨래를 터는 소리가 들렸다. 골목 끝에서는 꼬마들이 깔깔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모든 것이 살아 있는 풍경이면서도 동시에 정지된 액자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시간 속으로 무단 침입했다. 그리고 엉덩방아를 찧은 채 한참을 머물렀다.


그런데, 이곳 제주에서도 나는 가끔 비슷한 순간을 경험한다. 조용한 오솔길을 걷다가 마주한 돌담, 옛날 어느 할머니가 손수 쌓아 올렸을 법한 투박한 검은 돌들 사이로 자란 들꽃을 바라볼 때.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천천히 흔들리는 감귤나무의 잎새들을 보고 있으면, 그 나뭇가지가 오랜 세월을 살아온 듯한 주름을 가진 노인의 손처럼 느껴질 때. 이곳에서 나는 종종 시간의 두께를 본다.


겨울의 제주 바다는 더욱 그렇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 속에서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어부들이 조용히 그물을 손질하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오래된 흑백 사진 속 한 장면처럼 고요하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시간이 정지된 세계 속에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든다.


때로는 오름에 올라가 멀리 펼쳐진 풍경을 바라본다. 제주에는 나지막한 언덕이 많고, 그 위에 서 있으면 넓게 펼쳐진 초원과, 굽이굽이 이어진 돌담, 그리고 저 멀리 반짝이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곳에서 나는 바람에 머리를 맡긴 채 눈을 감고 선다. 그러면 나를 감싸는 이 공기가, 이 하늘이, 그리고 저 멀리 흐르는 구름이 마치 내 일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제주에서의 삶은 유독 빠르게 흘러가기도 하지만, 가끔은 놀라울 정도로 느리다. 마치 해안가에 부서지는 파도가 하염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듯이, 삶의 속도는 늘 변한다. 그 속에서 나는 멈춰 서서, 내가 살아온 시간과 앞으로 걸어가야 할 시간을 천천히 들여다본다.


삶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며 내 의식마저 휩쓸릴 때, 나는 애써 자유를 추억한다. 용기가 바닥을 드러낼 때, 나는 온 힘을 다해 그 순간에 몰입한다. 그것이 나만의 삶을 견디는 방식이고, 삶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삶은 빠르고도 느리고, 고통이며 환희이며, 쓰면서도 달다. 아직 맛보지 못한 인생의 맛을 위해,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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