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수술 20년차 단상

벌써 20년이라니........

by 이 경화

몇 개월 후면, 내가 암 수술을 받은 지 꼭 스무 해가 된다.
후— 벌써 20년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지금도 가끔은 그 모든 일이 마치 꿈처럼 아득하고,
한편으론 너무도 또렷하다.

암은 내게 단순한 질병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내 삶을 향해 날아든 벼락처럼,
지독하게 분주하던 나의 일상을 정지시킨 신의 신호였다.
나는 24시간을 분 단위로 나누어 쓰며
앞만 보고 달리던 마라토너였다.
질주만이 정답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암은 그 질주의 종점을 내 등 뒤에 꺼내놓았다.
과부하가 걸려있던 삶은 그 순간, 정확히 멈추었다.
멈추는 것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보라는, 고요한 명령임을
나는 뒤늦게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바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신이 내어준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소명을 다하는 삶이라는 것을.

암은 나를 그 여정의 시작점에 단단히 세워놓았다.
지나온 모든 시간은 재구성되었고,
그 뒤로 펼쳐질 시간들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3박 4일간의 동위원소 치료.
독방에 혼자 갇혀 있던 그 시간,
나는 세상의 어떤 소리보다도 내 안의 침묵을 크게 들었다.
퇴원하던 날, 손에 들린 짐은 거의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진짜 묻고 싶었던 한 가지를 암에게 물었다.

"왜 하필 나였는가.
왜 하필 이 시기에 나를 찾아왔는가."

그 질문에는 원망도 없었고,
증오도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내 생을 되물으며 던진
근원적인 사색이자 다짐이었다.

그 질문의 답을 찾아 나는 3년을 헤맸다.
불안한 마음으로 기도했고,
무릎을 꿇고 다시 일어나며
세상의 틈바구니를 걸어 다녔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조용한 확신처럼 알게 되었다.

나는 명예나 성공,
부를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었다.
내게 주어진 재능과 열정,
때로는 견딜 수 없는 눈물마저도
결국 타인을 위해 값지게 쓰여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내가 살아야 할 이유라는 것.

그 깨달음 이후,
나는 오랜 시간 그것을 품고 살아왔다.
‘언젠가’ 그것을 펼칠 날이 오리라는 기대,
그런 삶을 살겠다는 다짐.

엎어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수없이 반복했고
어떤 날은 아프게 무너졌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의 사전에는 ‘포기’란 단어가 없었다.

수많은 시련이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시련마저도
내 생의 시간표에 예정된 수업처럼 받아들였다.
신은, 때로 우리를 여러 방식으로 다루어보시며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물어오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리고 마침내,
그 긴 준비 끝에
내 뜻과 믿음을 펼칠 무대가 찾아왔다.
그 이름은 ‘더 세인트’다.

살다 보면,
곁에서 누군가 단 한마디만 용기를 내어 말해주었으면 할 때가 있다.
지독하게 외로운 어느 날,
따뜻한 밥 한 공기만 내어주는 손길 하나면
모든 아픔이 녹아내릴 것 같은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에,
누군가를 위한 조용한 안식처가 되기를.
상처 난 이들의 품이 되기를.
나는 ‘더 세인트’를 그렇게 꿈꾼다.

이제 인생 1막은 끝났다.
막이 내렸고, 조명이 꺼졌다.
그러나 나는 안다.
진짜 무대는 지금부터라는 것을.

2막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나는 다시 무대 위로 올랐고,
이제는 내 배역을 정직하게,
충실하게,
그리고 뜨겁게 살아내야 할 시간이다.

그것이,
내가 살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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