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을 보다가

by 이 경화

#달을보다가

달빛은 언제나 은밀하다. 그것은 낮의 태양처럼 만물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을 감싸며, 드러나지 않은 본질을 더 깊게 비추어낸다. 낮의 태양이 눈부심으로 세상을 몰아세운다면, 달빛은 은은한 숨결로 사물들의 고유한 그림자를 드러낸다. 나는 오늘 옥상에 서서 이 달빛 앞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문득 음陰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사색이 나를 사로잡아 시간조차 정지한 듯했다. 달빛의 고요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처음 내게 음과 양을 가르쳐주셨던 날이 떠올랐다. “경화야, 낮과 밤이 어떻게 다르지?” 그 물음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우주의 질서를 어린아이의 입을 빌려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낮에는 해가 주인이고 밤에는 달이 주인이야.” 그 순간 할아버지는 웃으셨다. 그 웃음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었다. 아이의 순수한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곧 진리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 알게 되었다. 낮의 해가 모든 것을 지배하지만, 그 지배 속에는 달과 별의 잠시 물러남이 함께 있다는 것을.


밤이 오면 달이 주인이 되어 숨어 있던 별들을 불러내고, 세상은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진다. 낮의 분주함과 밤의 정적은 서로를 거스르는 힘이 아니라, 서로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었다. 할아버지는 음과 양이란 결국 하나의 원을 이루는 두 날개라 말씀하셨다. 날개가 하나뿐이라면 날 수 없듯, 빛과 어둠은 함께 있어야 삶이 움직일 수 있다.


나는 달빛 앞에서 다시금 깨닫는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환희와 고통, 시작과 끝, 만남과 이별, 이 모든 것은 서로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를 완성하기 위해 존재한다. 해만 있다면 생명은 타 죽고, 달만 있다면 생명은 움트지 못한다. 성취만으로는 삶이 텅 비고, 실패만으로는 삶이 끊어져 버린다. 낮이 밤을 부르고, 밤이 낮을 부르듯 삶은 늘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원을 그려간다.


할아버지는 늘 시간을 원으로 설명하셨다. 직선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돌고 도는 원으로서의 시간. 과거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멀어져 가는 환영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내 곁에 와 있는 씨앗이라고 하셨다. 현재란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교차하는 지점이고, 우리는 그 교차 위에서 살아간다고 하셨다.


그분은 허공에 원을 그리시며 말씀하셨다. “시간은 돌고 돈다. 선은 끊기면 죽고, 원은 이어져서 살아난다.” 나는 그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한 채 마음에 새겨두었다. 그런데 오늘 달빛 앞에서야 조금 알 것도 같다. 내 삶은 직선이 아니었다. 성취와 좌절, 멈춤과 회귀 속에서 다시 이어져 온 하나의 원이었다. 내가 돌고 도는 그 길 위에서 걸어왔다는 것을, 이제서야 느낀다.


오십을 넘긴 지금, 나는 중년이라 불리는 자리에 서 있다. 그러나 성취보다 미완이 더 많고,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철부지 애송이다. 하지만 바로 그 애송이 됨이 내게는 은총이다. 끝나지 않은 배움이 남아 있다는 것, 여전히 원 안에서 돌고 있다는 것이 나를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숙이란 어쩌면 채움이 아니라 비움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원의 움직임에 몸을 맡길 수 있다.


달빛은 낮의 태양과 다르다. 태양은 만물을 규정하지만, 달빛은 규정하지 않고 감싸 안는다. 달빛 아래에서는 나무도 그림자와 뒤섞이고, 사람도 사회적 가면을 벗는다. 존재는 더 이상 외부의 시선에 갇히지 않고 자기 고유의 결을 드러낸다. 낮이 목적이라면, 밤은 근원이다. 태양이 삶의 바깥을 열어주면, 달빛은 삶의 안을 들여다보게 한다.


나는 오늘 달빛을 바라보며 깨닫는다. 인간은 선형적인 성공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지만, 진정한 삶은 원의 시간 속에서만 완성된다. 실패와 고독, 쉼과 어둠이 없다면 빛 또한 의미를 잃는다. 음과 양, 낮과 밤, 과거와 미래는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살린다. 이 원의 사유는 내 존재를 새롭게 세운다.


달빛은 여전히 나를 비춘다. 그것은 할아버지의 손길처럼 다정하고, 오래전 내 대답을 칭찬하던 미소처럼 따뜻하다. 동시에 그것은 내 앞날을 지켜보는 눈빛이기도 하다. 원은 닫히지 않는다. 끝에서 다시 시작한다. 삶은 직선이 아니라 원, 멈춤이 아니라 순환이다. 나는 그 원의 한가운데서 오늘을 산다.


이것이 달이 내게 가르쳐준 진리다. 음陰은 그림자가 아니라 뿌리, 멈춤이 아니라 회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다. 나는 다시 한 번 할아버지의 동그라미를 마음에 그린다. 그리고 다짐한다. 내 삶의 모든 낮과 밤을, 모든 빛과 어둠을, 원의 안에서 받아들이리라. 그때 비로소 중년조차 한 순간의 이름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달빛 앞에서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