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기억

by 이 경화


아주 어릴 때 나는 잠들면 내가 원하는 곳에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나는 눈을 감으면 다른 차원으로 옮겨갔고 그곳은 언제나 내가 바라던 자리였다. 풀잎에 맺힌 이슬 속 태양의 한가운데 바람의 한 올 심지어 아가의 붉은 볼에 흐르는 가느다란 혈관 속까지. 나는 그곳에서 놀았다. 내가 원하면 세상은 그 자리로 나를 옮겨놓았다. 나는 누구나 다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었고 세상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마법의 문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잠들기 전 엄마는 늘 물으셨다. 오늘은 어디로 가고 싶니. 그 질문은 주문 같았다. 나는 동화 속 장소 대신 풀밭의 이슬 얼음 속 별의 어깨 바람의 품이라 답했다. 엄마는 그 대답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그래 오늘은 그곳으로 가 보자. 그러면 신기하게도 나는 잠들면 정말 그곳에 있었다.


엄마는 나에게 세상을 가르칠 때 눈에 보이는 것만 보여주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먼저 보여주셨다. 엄마는 요정이 아니었을까. 세상의 안으로 들어가는 비밀스러운 길을 열어주셨으니까. 사랑도 미움도 내가 원하면 그 속에 들어가 머무를 수 있다고 가르쳐 주셨다. 보이지 않아도 상상만으로 함께 존재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아빠도 함께 있다고 알려주셨다.


나는 아빠를 상상으로 배웠다. 엄마의 묘사는 탁월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곳에 내가 있었다. 엄마가 들려주신 이야기는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감각이었고 감각은 내 안에서 장면이 되어 살아 움직였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잠들지 않고도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나는 사차원의 아이였다. 자유롭게 넘나들며 세상과 인간의 감정을 탐험했다. 아이들과 놀 때 나는 물었다. 너 사람의 눈 속에 들어가 본 적 있니. 자랑스러움이라는 감정 안에 있어 본 적 있니. 아이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보다 어른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내 놀이터는 늘 다른 차원에 있었으니까.


엄마는 자연과 대화할 줄 아는 분이었다. 개미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무 껍질이 벗겨지는 모습을 보고 눈물짓는 분이었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서 세상의 영혼을 배우며 자랐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어려움이 생기면 강물에게 물으라고 하셨다. 지치면 나무를 끌어안고 힘들면 별에게 다 일러바치라고 하셨다. 강의 눈 나무의 숨 별의 침묵은 언제나 대답을 준다고 하셨다.


나는 지금도 엄마에게서 배운 그 방법을 잘 활용하며 산다. 어느 날은 강물의 물결이 내게 묵묵히 위로를 건네고 어느 날은 별빛이 대답 대신 침묵을 내려준다. 침묵조차 대답이라는 것을 엄마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엄마가 그립다. 그립다는 건 단순한 부재가 아니다. 그리움은 곁에 있다는 증거다. 잠들면 내가 원하던 곳에 있을 수 있었던 것처럼 엄마 역시 언제나 내 곁에 있다. 내가 이슬에 머물고 바람 속을 걷는 동안 엄마는 이미 그 자리에 서 계신다.


그리고 나는 안다. 별빛이 흘러내리는 순간에도 강물이 숨을 고르는 순간에도 바람이 나무를 흔드는 순간에도 엄마는 여전히 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사진은현재카페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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