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보면서
곶자왈의 나무 앞에서 나는 침묵하는 철학자를 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침묵은 책 수천 권의 문장보다 더 많은 것을 품고 있었다. 인간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말을 흘려보내지만 나무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존재 자체로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나무의 몸을 덮은 이끼와 덩굴은 세월의 언어다. 인간이 얼굴에 주름을 새기고 몸에 흉터를 남기며 나이 듦을 드러내듯 나무도 그 몸에 시간을 새겨 넣는다. 그러나 인간은 그 흔적을 지우려 애쓰고 감추려 한다. 반대로 나무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오히려 그것이 곧 자기 철학의 문장이 된다.
껍질은 갈라지고 부서지지만 그 갈라짐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숨이 배어 나오는 통로다. 인간이 자신의 상처를 두려워하는 것은 상처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무는 상처와 함께 서 있고 상처와 함께 살아간다. 그 앞에서 인간은 삶을 덧칠해온 자신의 습관을 들여다보게 된다.
혈관은 인간의 몸속에서 생명을 밀어 올린다. 그 얽히고설킨 길 위를 피가 지나가며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나무의 뿌리 또한 땅속 깊은 곳에서 얽히며 생명을 순환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뿌리를 보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잎과 꽃만으로 나무의 가치를 판단한다. 인간도 그렇다. 드러난 성취와 외형으로 서로를 평가한다. 그러나 진실은 땅속에서 보이지 않게 움직인다. 나무의 침묵은 바로 그 진실의 증언이다.
인간의 언어는 필요하다. 그러나 언어는 동시에 허위의 옷이 된다. 인간은 말을 통해 자신을 꾸미고 말을 통해 자신을 감춘다. 나무는 꾸미지 않는다. 나무는 있는 그대로의 몸을 드러낸다. 갈라진 껍질과 번진 이끼와 덮인 흉터가 곧 언어다. 인간이 글을 쓰고 책을 만들 때 나무는 몸을 펴고 서서 자기 언어를 남긴다. 그 앞에서 인간의 언어는 초라해진다. 말이 많을수록 진실은 멀어지고 침묵이 깊을수록 실재는 가까워진다.
곶자왈의 나무는 책상 앞의 철학자보다 더 오래 묵상한다. 그 묵상은 기록되지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다. 바람이 스쳐가며 페이지를 대신하고 비가 내리며 문장을 대신한다. 그 책은 누구도 읽지 않지만 누구나 그 앞에 서면 읽히는 책이다. 나무의 침묵은 독자가 읽는 순간에 비로소 소리가 된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만약 인간의 몸이 나무처럼 침묵한다면 어떻게 될까. 주름과 흉터와 혈관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면. 그것을 부끄러움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아마 덜 말하고 더 존재할 것이다. 말보다 존재가 앞서는 삶. 그것이야말로 철학자의 삶일 것이다.
인간은 종종 위로를 말로 구한다. 그러나 진짜 위로는 말이 멈춘 자리에서 온다. 숲속에서 나무를 마주할 때 느껴지는 고요가 그렇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데 충만하다. 그 침묵은 공허가 아니라 충만이다. 나무는 우리에게 가르친다. 진짜 충만은 언어가 아니라 존재에서 온다고.
나무의 몸은 하나의 기록물이다. 세월의 압력이 껍질을 갈라놓고 고통의 흔적이 흉터처럼 새겨진다. 그러나 그 몸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증언이다. 인간은 기록을 종이에 남기지만 나무는 기록을 몸에 남긴다. 그 기록은 한 번도 지워지지 않는다. 인간이 역사를 고쳐 쓰려 해도 나무는 자기의 몸으로 시간을 증명한다.
곶자왈의 나무는 고독하다. 그러나 그 고독은 비어 있지 않다. 오히려 이끼와 덩굴과 바람과 빛이 함께하는 충만한 고독이다. 인간도 고독하다. 그러나 인간은 고독을 결핍이라 여기며 피하려 한다. 나무는 고독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고독이 충만이 된다. 인간도 고독을 결핍이 아닌 충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아마 나무와 같이 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무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나무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수많은 대답을 들었다. 언어가 아닌 존재의 대답이었다. 나무는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대답한다. 인간이 질문을 던질 때 나무는 침묵으로만 응한다. 그러나 그 침묵이야말로 가장 깊은 대답이 된다.
시간은 나무의 몸에 고스란히 새겨진다. 인간은 시간을 숫자로 세지만 나무는 시간을 몸으로 견딘다. 그 차이는 크다. 인간은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애쓰지만 나무는 흘러가는 시간을 흡수한다. 인간이야말로 시간을 온전히 살지 못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무는 그저 견디며 서 있을 뿐인데 이미 시간을 온전히 살고 있다.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그것을 끝없이 묻고 나무는 묻지 않는다. 그러나 묻지 않는 그 존재가 오히려 더 깊은 답이다.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서 삶은 단순해진다. 단순함 속에서 충만이 생긴다. 나무의 삶은 단순하다.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세우고 잎을 피우고 낙엽을 지우는 일. 그러나 그 단순함이 곧 충만이다. 인간은 복잡한 질문 속에서 단순한 답을 놓치고 산다.
나는 나무를 바라보며 내 몸을 떠올렸다. 내 몸에도 수많은 흔적이 새겨져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흉터. 잊혀진 상처. 주름의 골짜기. 그것들을 나는 부끄러움으로 여겼다. 그러나 나무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것을 자기 존재의 무늬로 받아들였다. 그 앞에서 나는 배웠다. 내 몸의 흔적 또한 나의 무늬다. 그것은 지워야 할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명이다.
곶자왈의 나무는 침묵하는 철학자다. 그는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침묵은 모든 언어보다 더 무겁다. 그는 책이 없다. 그러나 그의 몸은 가장 오래된 책이다. 그는 질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존재가 이미 답이다.
나는 그 철학자 앞에서 작아졌다. 그러나 동시에 위로받았다. 나는 여전히 말로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는 인간이다. 그러나 나무는 이미 존재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 말 없는 말 속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내 몸의 흔적들이 조금 덜 부끄럽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