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론가 가야 했다. 목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길을 따라가는 것. 발길이 닿는 곳에서 멈추고 다시 움직이는 것. 어디에 도착하겠다는 확신보다는 어디까지 가볼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함이 나를 이끌었다. 제주에서 길을 다니다 보면 종종 막다른 곳에 이른다. 차를 돌리려다 곤란했던 순간도 많았다. 길은 점점 좁아지고 돌담이 바짝 붙으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그런데 나는 늘 끝까지 가봐야 직성이 풀린다.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짐작하면서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무엇을 품고 있는지, 나는 알고 싶다. 그렇게 길을 따라가다 보면 공동묘지를 만나기도 하고 오래 버려진 집터를 지나치기도 한다. 무너진 담장과 잡초가 무성한 마당, 문짝이 떨어져 나간 빈집. 그러나 두렵지는 않다. 오히려 흥미롭다. 그곳에는 시간이 멈춰 있는 듯한 고요가 있다. 사람은 떠났지만 흔적은 남아 있다. 그리고 그 흔적은 말없이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나는 마을을 본다. 무심코 지나치는 풍경 속에서 그곳이 어떤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지 읽어내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왜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었을까. 어떤 이유로 사람들이 모여들었을까. 물이 흐르는 길목인지, 바람이 머무는 자리인지, 땅이 기름진 곳인지. 마을을 만든 것은 사람들일 테지만 사람들을 머물게 한 것은 자연이었을 것이다. 길이 둥글게 감싸 안듯 형성된 마을은 서로를 지키려는 마음처럼 보이고, 길이 길게 뻗어 바다를 향해 열린 마을은 세상과 맞닿아 있으려는 의지처럼 보인다. 산기슭에 기대어 선 집들은 바람을 피하고 물을 가까이 두려 했을 것이다. 집의 형태는 곧 삶의 태도다. 대문이 없는 집은 이웃과의 경계를 낮추고, 높고 단단한 담장은 외부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마음을 드러낸다. 마당이 넓은 집에는 여유가 흐르고, 창문이 작은 집에는 내밀한 삶이 스며 있다. 한 마을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곳의 문화와 습관, 살아온 시간의 결이 자연스레 드러난다.
이 모든 것은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저 나무는 왜 저 자리에 서 있을까. 저 돌담은 언제부터 저렇게 서 있었을까. 저 오래된 간판의 가게는 여전히 문을 열고 있을까. 그런 질문들이 나를 길 위에 머물게 하고 또 다른 길로 이끈다. 나는 이런 시간을 여행이라 부르고 싶다. 관광이 아니라 읽기. 소비가 아니라 이해. 제주가 그저 소비되는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읽히고 기억되는 장소였으면 좋겠다.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바람에 실려 오는 오래된 삶이 들리는 듯하다. 닫힌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빛을 바라보며 그 집에서 오갔을 대화를 상상해 본다. 길을 따라가다 문득 멈춰 서서 이곳은 어떤 이야기들을 지니고 있을까 생각하는 순간, 나는 이미 그 땅과 연결되어 있다.
석가는 오십이 넘으면 삶을 관광하듯 살라고 하셨다. 빛을 대하듯 삶을 바라보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을 자주 떠올린다. 삶을 붙들고 씨름하기보다 한 걸음 물러서 바라보는 태도.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지 않고, 이해되지 않아도 잠시 두는 용기. 오십을 넘는다는 것은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더 많이 놓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길을 잃으면 초조했다. 목적지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실패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길을 잃는 순간조차 하나의 장면이 된다. 막다른 골목을 만나도 괜찮다. 차를 돌리면 그만이고, 걸음을 되돌리면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길은 늘 나를 밖으로 데려가지만 동시에 나 안으로도 데려간다. 마을을 읽다 보면 결국 나를 읽게 된다. 나는 어떤 담을 쌓고 있는지, 어떤 문을 닫아두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길을 미리 포기해 버렸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제 나는 낯선 곳에서 낯선 이에게 묻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마을은 왜 이렇게 생겼나요. 이 돌담은 누가 쌓았나요. 질문은 벽을 허물고 질문은 인연을 데려온다. 묻는 순간 나는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연결된다. 용기는 학습될 수 있는 것이었다. 한 번 묻고 한 번 대답을 듣고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다 보니 길 위에서의 인연들이 쌓여갔다. 짧은 대화가 오래 남는 관계로 이어지기도 했다. 아직 물어볼 질문이 넘쳐나고 답해 줄 인연도 넘쳐난다. 그러니 나는 행복한 사람이 아니던가. 길은 여전히 이어져 있고 나는 아직 그 위에 서 있다. 그러고 보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단 하나도 없다. 길 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