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 면담실에서 식사를 마치고 수녀님이 차를 들고 오셨다. 작은 찻잔에서 김이 가늘게 올라왔다. 식사를 마치고 말은 아직 따뜻한 상태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최근에 읽은 『신비주의에 관하여』라는 책을 수녀님께 소개해 드렸다. 4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하루 만에 읽어 내려갔다고 말씀드리자 수녀님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으셨다. 그 책은 신비주의를 특별한 황홀경이나 종교적 영웅의 체험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 존재가 하느님과 만나는 가장 깊은 자리, 말과 개념이 더 이상 닿지 않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비움과 지속의 태도를 다루고 있었다. 신비는 선택된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비워낼 때 드러나는 투명성이라는 문장이 오래 남았다. 그 대목에서 나는 영성과 신비주의는 어떻게 현현되는가 하는 물음을 자연스럽게 꺼내게 되었다.
대화는 한국의 영성으로 옮겨갔다. 나는 요즘 한국의 영성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다. 수녀님은 프란치스코의 가난의 영성을 들려 주셨다. 자발적으로 부를 내려놓고 가장 낮은 자리로 걸어 내려간 결단, 선택한 가난, 자유의 가난. 그것은 분명 빛나는 서사였다. 나는 그 설명을 들으며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수녀님, 성인의 자발적인 가난의 영성과 한국 사람들의 태생적인 가난의 영성은 어떻게 다를까요.” 수녀님은 성인의 가난은 자발적인 가난이라고 강조하셨다. 선택할 수 있었고 그래서 버렸다는 점에서 그 가난은 더 순수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물었다.
“태어났는데 나라가 가난하고 집안이 가난하고 시대가 가난했다면, 이 가난은 자발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적이고 선천적인 문제인데, 어느 쪽이 더 영성에 가까움일까요.” 그 질문을 듣고 수녀님은 잠시 눈이 커지셨다가 이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차가 들어 있는 잔을 움켜쥐며 말했다. 자발적 가난의 영성도 존중하지만 가난이 선택이 아니라 아무 선택의 여지 없이 개인의 삶과 영성 안으로 들어온 것이라면 오히려 나는 그 영성에 더 마음이 기운다고. 그 순간 내가 말하고 있었던 것은 단순한 사회적 조건이 아니었다. 존재의 출발점에 대한 문제였다. 선택의 가난은 내려감이지만 태생적 가난은 이미 아래에서 시작하는 삶이다.
하나는 버림을 통해 낮아지고 다른 하나는 낮음 속에서 자란다. 선택은 의지의 사건이고 조건은 존재의 사건이다. 의지는 숭고해 보이지만 조건은 설명되지 않는다. 의지는 결단의 언어를 갖지만 조건은 침묵의 시간을 산다.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선택이기에 상징이 되지만 태생적 가난은 선택이 아니기에 서사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영성은 정말 의지의 강도에 의해 측정되는 것인가. 선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시간은 언제나 한 단계 아래에 놓여야 하는가.
나는 가난을 위계의 문제로 두고 싶지 않았다. 가난이 영성의 재료라면 그 재료의 출처가 선택이든 조건이든 하느님 앞에서는 동일한 투명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선택은 한 번의 결단이지만 조건은 매일의 지속이다. 지속은 영웅적이지 않지만 오래 간다. 태생적 가난은 자유가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깊은 의존의 자리로 인간을 밀어 넣는다. 그 의존은 체념이 아니라 구조 속에서 살아남는 방식이며, 설명되지 않는 시간의 축적이다.
수녀님은 미소를 머금고 말씀하셨다. “마르치아가 말한 그 가난의 영성에 대한 질문은 오히려 내가 피정 중에 깊이 생각해 볼 화두야. 고마워요.” 우리는 서로를 설득하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날 가난을 우열로 말하는 언어가 얼마나 조심스러워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영성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일이 아니라 이미 낮은 자리에서 시작된 존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어쩌면 영성은 선택의 고결함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 속에서 얼마나 투명해질 수 있는가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선택은 인간의 자유를 드러내지만, 조건은 인간의 실존을 드러낸다. 실존은 미화되지 않는다. 설명되지 않는 시간과 견딤 속에서 서서히 형성된다. 태생적 가난은 스스로를 낮추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낮은 자리에서 시작된 존재의 상태다. 그 상태에서 하느님을 향해 고개를 드는 일은 결단이라기보다 생존에 가깝다. 나는 그 생존의 자리에서 피어나는 영성이 결코 뒤에 서 있지 않다고 믿는다. 오히려 선택 이전의 자리, 설명 이전의 자리, 말하기 이전의 자리에서 이미 하느님은 인간을 만나고 계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영성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고, 위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서 있는 자리를 깊게 인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