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사람을 버티게 하는 건 장소가 아니라 함께 쌓아둔 시간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는 한동안 이상한 감정을 자주 느꼈다. 보고 싶은 마음은 분명히 있는데, 그 마음을 데리고 갈 곳이 없다는 감정이었다. 명절이 오면 사람들은 부모님 집에 가고, 산소에 가고, 추모공원에 간다.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도 각자의 자리로 찾아간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를 생각하면서도 갈 곳이 없었다. 그게 생각보다 오래 아팠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다. 장례를 치를 때는 정신이 없었고, 그 뒤에도 먹고사는 일이 먼저였다. 슬픔은 늘 뒤로 밀렸다. 그런데 명절이 오고, 제삿날이 오고, 남들은 “다녀왔다”는 말을 하는 날이 오면 그제야 허전함이 선명해졌다. 나도 생각나는 사람은 있는데, 정작 찾아갈 자리는 없었다. 마음은 움직이는데 발은 갈 데가 없었다.
그래서 더 허무했다. 어떤 날은 괜히 차를 몰고 나간 적도 있었다. 어디라도 가면 좀 나아질까 싶었는데, 막상 갈 곳이 없으니 더 공허했다. 아버지를 떠올릴수록 마음은 무거워지는데, 그 마음을 내려놓을 자리가 없었다. 그럴 때 상실은 끝난 일이 아니라 계속 현재형으로 남아 있는 감정 같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추모공원에 모셨다. 그래서 마음이 복잡한 날이면 찾아갈 수 있었다. 차를 타고 가서 한참 서 있다가, 속으로 몇 마디를 하고 돌아오면 아주 조금은 정리되는 느낌이 있었다. 슬픔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 마음을 잠깐 올려둘 자리는 있었다.
그래서 한때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버지도 어디 한 곳에 모셨어야 했나. 그랬다면 덜 힘들었을까.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보고 싶을 때 찾아가 한참 서 있다가 올 수 있었을까. 한동안은 정말 그게 답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내가 힘들었던 이유는 꼭 물리적인 장소가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더 아픈 건 따로 있었다. 아버지를 떠올릴 때 붙들 수 있는 장면이 많지 않다는 것. 함께 웃었던 기억, 편하게 찾아가 밥을 먹었던 기억, 나중에 꺼내 버틸 수 있을 만큼 따뜻한 장면들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 보고 싶은 사람은 있는데, 막상 붙들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 사실이 장소의 부재보다 더 아팠다. 갈 곳이 없다는 슬픔은 사실, 남겨진 내가 꺼내어 버틸 기억이 모자라다는 뜻에 가까웠다. 사람은 떠난 뒤에야 그 사람을 생각하며 붙잡을 뭔가를 찾게 되는데, 정작 그런 것들은 살아 있을 때만 만들 수 있었다. 같이 밥 먹은 저녁, 별것 아닌 통화 한 번, 지나가며 건넨 말 한마디, 한 번 더 찾아간 주말 같은 것들. 남겨진 사람을 버티게 하는 건 주소가 아니라 그런 장면들이었다.
최근에서야 그걸 알았다. 내가 원했던 건 단지 찾아갈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보고 싶을 때 잠깐 꺼내어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 후회가 밀려올 때 붙들 수 있는 장면, 남겨진 내가 기대 설 수 있는 기억이었다. 그런데 그런 건 떠난 뒤에 새로 만들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이 가장 늦게 와닿았다.
그래서 지금도 어떤 날은 아버지가 생각난다. 여전히 갈 곳이 없다고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허전함의 이름이 단순히 장소의 부재는 아니라는 걸. 그건 더 잘해두지 못한 시간, 더 만들어두지 못한 장면, 더 남겨두지 못한 관계의 자리에서 오는 슬픔이었다.
사람이 떠나고 나면 먼저 후회가 남는다. 더 자주 볼걸. 한 번 더 갈걸. 한 번쯤은 말을 걸어볼걸. 남겨진 사람에게 필요한 건 결국 그런 후회를 조금 덜어줄 기억들 인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은 이상하게도, 늘 옆에 있을 때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가 떠나고 나면 안다. 남겨진 사람도 마음을 둘 자리가 필요하다는 걸. 그리고 그 자리는, 살아 있을 때 함께 만든 장면들로만 남는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