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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숲 Dec 31. 2022

25일간 제주살이 엄마도 너처럼 훌쩍 자란 시간이길

엄마, 나와 여행 와줘서 고마워

 2021년 5월 엄마는 아니 우리 가족은 큰 결정 하나를 하게 되었어. (나의 결정이었으나 우리 식구 모두 큰 도전이었으므로) 로로와 엄마 둘이서 ‘제주도 한달살이’를 결정한 거지! 어렸을 땐 이렇게까지 즉흥적이진 않았던 것 같은데 엄마가 나이가 들수록 더 겁이 없어진다. 로로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단둘이 떠나는 여행을 언젠가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만 있었는데 그런 엄마 마음에 불을 지핀 건 책 한 권이었어. 너보다 더 어린 딸과 짧은 제주도 살이를 하는 에피소드가 있는 <육아가 한 편의 시라면 좋겠지만, 전지민>을 읽으면서 용기백배가 된 거지. 다른 모녀 여행 에피소드들도 많이 접해 봤지만 엄마가 더 공감 갔던 건 아마도 뚜벅이 엄마였기 때문일 거야.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해안도로를 달렸다는 그 한 문장만으로 뚜벅이인 엄마가 너와 제주도행을 결심하기에 충분했지. 꼭 제주도이길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여러 여건들이 맞아떨어져 25일간의 너와 나의 제주살이가 그렇게 시작되었어.


토끼를 만날 수 있다는 제주오름 사라봉, 토끼는 다음 기회에..


 여행에 들뜬 우리도 우리였지만 아빠는 결혼해서 처음으로 이렇게 긴 시간을 혼자 보내게 되었어. (우리가 부럽다고도 했고 외롭다고도 했지만 그래도 사실은 제일 신난 건 아빠였을지도 몰라) 엄마의 크고 작은 결정에 언제나 손을 들어주는 아빠였기에 이번에도 우리의 여행 계획을 말하자 그 누구보다 멋진 생각 같다고, 너무 좋은 시간이 될 것 같다고 엄마의 무모한 결정에 의미를 부여해 주었지.


 어쩌면 너와 단둘이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건 일종의 죄책감 때문이었을지도 몰라. 어느 순간 너의 눈을 제대로 맞추고 너의 말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는 시간들이 집안일에 밀려, 핸드폰에 밀려, 잔소리에 밀려 희미해지고 있었거든. ‘회사까지 그만두고 내가 너와 함께 있어주잖아’, ‘내가 얼마나 많은 걸 포기하고 육아를 하는데…’라는 엄마 입장에서는 타당이 넘치는 변론이 있으니 너에게 떳떳한 엄마라고 생각했어.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만 함께 할 뿐이면서. 그러다 어느 날, “엄마! 내가 엄마 불렀잖아. 나 좀 보고 얘기 들어줘.”라는 서운함 섞인 너의 잔소리가 마음에 박히는 날이 오고 말았지.


 그래, 나는 따뜻하게 눈 맞추고 조잘거리는 너의 얘기를 채근하지 않고 들어주려고 그 많은 것들을 포기한 거지. 아니 포기가 아니라 이걸 누리려고 내가 택한 길이지. 근데 엄마는 엄마의 선택을 너에게 책임 전가하고 있더라고. 너를 키우느라 포기한 내 인생 책임져-라고. 그래서 너와 떠나고 싶어 졌어.

설거지하느라 잠깐만-이라고 하지 않으려고, 시간 없어, 빨리 가야 돼-라고 하지 않으려고, 일찍 자야 돼, 내일 유치원 가야지-라고 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천천히 너에게 시간을 주고 기꺼이 너에게 반응하려고. 그러려면 조금은 긴 시간의 여행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과감한 용단을 내린 엄마답지 못하게 제주도 숙소에 우리를 데려다주고 떠나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펑펑 울었던 건 로로가 아닌 엄마였네. 결국은 또. 너도 적잖이 당황했는지 이상한 표정에 코믹춤까지 보여주며 엄마를 달래주었지. 눈물바람 콧물 바람으로 시작하는 것도 추억되고 나쁘진 않지 뭐. (얼마 전에 이 날을 추억하며 얘기를 나누던 로로가 아직까지 그 날 엄마가 운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넌 분명 감성형 딸은 아니야)


몇 년 만에 선물처럼 만난 친구의 필카사진


 너와의 긴 여행에서 좋았던 건 너와 나를 재촉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어. (그래도 조금은 했을지도 몰라) 평소 급한 성격의 엄마 때문에 누릴 거 온전히 못 누릴 때가 많은 너였는데 애월 바다 바위에서 총총거리며 하릴없이 2시간을 보내도 내 마음엔  너의 어여쁨만 가득 담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기더라. 하루를 분단위로 쪼개고 핫플을 찾아다니느라, 숙소 체크인과 체크아웃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이 여행지를 누리느라 몸도 마음도 분주했던 그동안의 여행과는 달랐어. 매일 세끼 식사 반찬 고민도, 청소하느라 종종 거리던 일과도 줄어드니 오롯이 네가 보였고 이 시간이 보였지. 일상도 아닌 여행도 아닌 그 중간 즈음의 나날들이라 더없이 좋았을지도.


 숙소에서 밥을 먹으면서 라디오 듣고 킥킥거리던 거 기억나? 우리 사연도 보냈는데 로로가 우리 거 안 읽어준다고 삐죽였잖아. 이른 아침이면 장성규 님, 나갈 채비를 하는 동안에는 애정하는 정지영 님의 목소리를, 그리고 저녁 먹으면서는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으며 알지도 못하는 팝송에 밥을 먹다 말고 함께 춤을 추기도 했지. 깔깔깔 웃으며 신나 하는 너를 보면서 어깨춤에 먹는 저녁밥도 참 괜찮은 조합이네 싶었어. 이렇게 둘이 오랜 기간 떠나보지 못했다면 못 누렸을 사소하지만 어여쁜 추억들이 또 한 겹 쌓였네-라며.


 그렇게 소소한 일상과 웃음과 눈물들이 모여 금세 25일간의 제주생활이 끝났지. 자잘한 계획 없이 숙소만 잡고 와서 매일매일 하루살이처럼 일정을 잡고 베짱이처럼 놀아재낀 나날들이었어. 아, 살면서 우리가 외식을 제일 많이, 카페도 제일 많이 간 날들이기도 했네. 바다에서 나고 자란 엄마라서 인지 바다에 대한 큰 감흥 없이 살아온 것도 사실인데 너와 아빠가 바다를 사랑하니 이제 엄마도 바다가 조금은 품어주는 느낌이 들어.

25일간 로로와 엄마는 261,548걸음을 걸었더라. (넌 보폭이 작아 더 종종거렸으니 훨씬 더 많이 걸었겠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정도의 숫자만큼 손을 잡고 걸으며 너도 나도 단단해졌으리라 믿어. 우리 사이도, 투닥이던 날들도, 혼을 내서 눈물을 쏙 빼던 날들도 있었지만 로로가 엄마와의 여행을 대체적으로 소중하고 행복한 여행으로 기억해줘서 더없이 성공한 것 같아. 평소 로로는 유독 엄마와 아빠에게 (특히 아빠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표현을 힘들어했는데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는 조금은 수월하게 자기감정을 얘기할 수 있게 되었고 엄마에게 먼저 손 내밀어 주기도 하는 딸이 되어 있더라. 정체되었던 키도 1cm나 자라서 왔으니 마음의 키는 뭐 말할 것도 없겠지.


엄마! 나랑 여행 와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바닷가 방파제에 앉아서 엄마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라고 물으니 “엄마! 나랑 여행 와줘서 너무너무 고마워!!!”라고 소리치던 그날의 너의 미소를 잊지 않고 살아갈게. 고마워, 내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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