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미숲 Dec 08. 2022

‘자연분만’을 하는
위대한 엄마이고 싶었어.

군대 레퍼토리 같은 엄마들의 출산 레퍼토리

 엄마는 진짜 엄마가 되었어. 2015년 1월 10일 자정이 가까운 밤 11시 34분, 40시간의 진통 끝에 결국 제왕절개를 하게 된 최악의 케이스. 너를 품에 안아 보기도 전에 수술 중 기절해 버린 산모. 그게 엄마란다. 41주에도 전혀 밖으로 나올 기미가 없던 ‘열매’는 3.6kg는 될 것 같다던 초음파 결과와는 달리 3kg도 채 안 되어서 우리 품에 안겼지. 


여아/2.95kg /50cm/O형: 태어나자마자의 너를 수식하는 기록들



 위대한 엄마가 되고 싶었어.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먼 훗날 너에게 너의 탄생 스토리를 읊어줄 때 "기나긴 출산의 고통 속에서도 생명이 오는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엄마라는 존재지. 암 그렇고말고. 후훗" 라며 그 순간을 고귀하고 위대한 것이라 포장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지. 그럼에도 현실의 벽은 만만치 않았어.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한 생명이 오는 것은 나 하나의 오기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그 생명이 건강히 우리의 품에 안긴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미 출산 그 자체가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조금 더 너를 키우면서 알게 되었어.


 출산일을 앞두고는 굴욕 3종 세트니, 진통 간격이니, 무통 주사니 하는 출산 용어들이 쏟아져 나오는 블로그 후기들을 읽고 또 읽었어. 어찌나 읽었던지 언제부터는 원치 않아도 매일 밤 눈만 감으면 너와 나의 출산 현장 예고편이 자동 재생되었지. 예고편에서는 엄마 마음대로 편집되기 마련이지만 실제 출산 현장에서는 엄마에게 주어지는 옵션 선택이 많지 않더라고. "덜 달게.", "우유 대신 두유"라는 식의 퍼스널 옵션이 있는 스타벅스 돌체 라테 주문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던 거지. 아주 만약이라도 그런 퍼스널 옵션이 있다면, 엄마는 "기절 금지", "한 번에 순풍", "품에 아이를 안고 감격의 눈물 또르르" 따위를 꼭 선택했을 거야. 


 그 옵션 중에서도 제왕절개가 가장 걱정됐어. 제왕절개를 하게 될 경우, 무엇보다 남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부분이 제일 마음에 걸렸어. 배를 가르는 고통의 후유증도 싫거니와 오로(출산 후 자궁 및 질에서 배출되는 분비물.이라고 하나 경험치에 의하면 열 달 치 밀려 버린 채무와도 같은 폭포수 생리라고 표현하고 싶다) 때문에 남편이 친절하게 기저귀를 갈아주어야 하는 전혀 사랑스럽지 못한 상황을 마주하기 때문이었지. 떠나기 전까지 언니의 기저귀를 걱정하는 이모의 신신당부에도 결국은 우려했던 대참사의 순간은 찾아오고 말았어. 그럼에도 며칠간 세수도 양치도 못한 내게 ‘너는 신기하게 안 씻어도 향기가 좋네’ 라며 건넨 아빠의 한마디는 엄마의 마음에 남아 아직까지도 양치를 안 해도 엄마 입에선 향기 나는 줄 아는 가당치도 않은 착각 속에 살고 있단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만나는 수많은 엄마들의 대화의 물꼬를 트는 레퍼토리 중 하나가 "자연분만했어요? 제왕절개 했어요?" 일 거야. 아이의 나이가 어릴수록 더 그렇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저.. 제왕절개요.."라고 마치 받아쓰기에서 100점을 받지 못해 잔뜩 주눅 들어버린 마음이 되어버리곤 해. 그렇지만 꼭 붙이지. "저 40시간 진통했어요! 그러다가 아이가 위험해서 응급 수술했어요!! (저 자연분만 꼭 하고 싶었던 엄마예요!!!!!)"라고. 


 그래. 그러게 말이야. 자연분만 그게 뭐 그렇게 대수라고. 물론 엄마도 이제는 알아. 자연분만이든 제왕절개든 네가 건강히 엄마와 아빠 품에 와 주었다는 그 자체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너무 상투적 일지 모르지만 그건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게 분명해. 세상에 모든 엄마는 그 자체로 이미 위대하다는 것 말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