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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동원 Aug 09. 2021

순환하는 것

살아지는 것



 2호선은 순환열차다. 끝이 어딘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열차는 달리고, 순환하고, 계절처럼 있다. 급하게 뛰어 탄 신도림에서 생각보다 자리가 많다고 생각하며 앉아있던 어느 여름 저녁, 나는 순환열차에서 순환아빠를 만났다. 덥수룩하게 정돈되지 않은 머리와 한눈에 봐도 불편한 다리를 힘겹게 끌며 앉아있는 승객들에게 무언가 빼곡히 적힌 종이를 나눠주고 있는 어느 아빠를 만났다. 


저는 어릴 때부터 다리가 좋지 안았습니다. 저 혼자라면 오늘 주거도 괜찬지만 저에게는 여덜살 된 이쁜 딸이 있슴니다. 저는 굴머도 좋습니다. 못난 아빠에게 태어난 천사같은 딸을 도와주세요. 단 돈 백원이라도 좋습니다. 도와주시면 이 은헤 평생 잊지 않겠슴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애써 시선을 피하는 승객들에게 그는 물려받은 가난한 다리로 힘겹게 한 걸음씩 옮기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한 장, 두 장 자신의 종이를 나눠주다가 세 장, 네 장 다시 거두는 아빠의 발걸음은 참 고되었고 자신은 굶어도 좋다는 그의 삐뚤한 글씨가 나는 한참을 그렇게 슬펐다. 불편한 몸으로 1번 객차에서 10번 객차까지 발을 옮기며 죄송한 고개를 숙였을 그의 슬픈 잔상이 짙게 남아 나는 그가 다음 객차로 옮겨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일부러 종착지 없는 순환열차에 몸을 싣고 기약 없는 발걸음으로 지하철을 끊임없이 순환하는 그의 하루들이 검은 차창에 상영되는 것만 같았다.




꼭꼭 씹어먹어야지 편식하면 안 돼 아빠 다녀올게

점심은 먹었어? 아빠 왔다 저녁은 뭐 먹었어

아빠 오늘 일 열심히 했다 오늘 피곤하네

잘 자 사랑해 우리 딸 아빠가 지켜줄게




 문득 그 아빠의 순환하는 삶이 2호선과 많이 닮아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도시에 순환 않고 사는 삶이 어디 있겠냐마는 목적지 없이 그저 달리고, 또 달리다가 오늘의 마지막 열차를 운행하면 그만의 차고지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퍽 서글펐다. 딸에게는 한없이 거대하고 든든할 아빠의 뒷모습이 객차 뒤로 사라질 때 열차는 긴 지하터널을 나와 한강 위를 달렸고 나는 그 또한 반짝이는 여름 한강의 윤슬을 잠시나마 즐겼으면 좋겠다는 값싼 도덕심을 속으로 건넸다. 길게 뻗은 직선 위에 가만히 찍혀있는 점처럼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텅 빈 객석을 바라보는 무명배우같이 단 하나의 관객이라도 감격스러웠을 그의 지하철은 오늘도 운행 중일지 괜스레 의미 없는 오지랖을 부리려 글을 쓴다. 그의 종착지는 어디였을까. 많은 철길 중에서 굳이 순환열차를 선택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삶을 탓하기도 전에 여덟 살 난 딸의 오늘 저녁을 생각했을 그의 삶은 오늘도 순환열차처럼 인생의 궤도를 뚜벅뚜벅 걷고 있을까.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넉살 좋은 말의 의미를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2호선은 순환열차다.

그 끝이 어딘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열차는 달리고, 순환하고, 계절처럼 있다.

나는 이 사실이 오늘따라 우울했고 너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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