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외로운 척 할 순 없잖아

by 고성미

외롭다는 말을 달고 사는 친구가 있었다. 과거형이다. 그 친구는 혼자 밥을 먹느니 차라리 굶겠다는 주의였고, 나는 어제 먹다 남은 김치볶음밥이어도 혼자 먹는 게 속 편한 인간이니 어떻게 우리가 현재를 함께할 수 있었겠는가. 그 친구와 잠시나마 끈끈했던 한 시절을 보내는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다. 외로움이 뭘까. 도대체 언제 어떻게 외로워야 하는 거지?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외로웠던 적이 없다. 혼자 있어 쓸쓸하거나 심심하기는커녕 그런 황홀한 순간을 고대하며 복작한 하루를 견뎌낸다. 물론 내 인생에도 객관적으로 보면 외로워야 마땅했던 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일 년여를 '내 인생의 황금기'라 칭한다.

하필 18년 전 여름의 일이다. 그 당시 나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내 발로 강원도의 어느 절에 들어갔다. 비구니가 되려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단기출가학교'라는 다큐멘터리 덕분이었다.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에 있는 오대산의 월정사에서 약 한 달동안 먹고 자며 행자처럼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강한 끌림을 느꼈다. 특히 숲 속에서의 명상 시간과 일정 시간동안 말을 하지 않는 묵언 걷기 수행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평생 잊지 못할 기억 중 하나는 바로 그 단기출가학교에 입교하던 날의 것이다. 남자는 전원 삭발해야 했고, 여자는 선택권이 있었다. 불교에서는 머리카락을 무명초(無名草)라 하여 번뇌와 망상의 상징으로 여긴다. 따라서 삭발은 속세의 인연과 잡념을 끊는다는 결의를 다지는 일이다. 그날 나는 태어나 처음이자 현재로서는 마지막으로 삭발을 했다. 시원했다. 평소에도 머리카락 아까운 줄 모르는 나였기에 아쉬운 마음은 하나도 없었다. 행자복을 입고 삭발까지 하니 행동거지가 공손을 넘어 겸허해졌다.

삭발식을 마친 우리는 절 옆에 있는 전나무숲길로 향했다. 갑자기 제법 굵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내 민머리를 때리던 그 빗방울. 그 찰진 느낌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이후 3보 1배를 하며 진흙투성이가 되어 길고 긴 전나무숲을 왕복하는 것으로 정식 행자 체험이 시작되었다. 먹으라면 먹었고, 자라면 잤고, 걸으라면 걸었다. 그러면서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와중에도 어느덧 시간이 흘러 내 민머리에는 잡초같은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껄끄럽게 솟아나 있었다.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절에서 더 살아봐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단기출가학교 일정이 끝난 후, 나는 서울로 돌아가는 대신 강원도에 있는 어느 절에 머물렀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사실 교회나 성당, 절은 결코 조용하지 않다. 하지만 낮 동안의 시끌벅적한 각종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후의 그곳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그 시간을 더 즐겨보고 싶었다. 더도 말고 딱 일 년만. 당시 나는 스물다섯 살이었으므로 거칠 것이 없었다.


바다가 가까웠던 그 절에 '템플스테이' 담당자로 취직을 한 거였으니 말하자면 기숙 생활이었다. 일상을 떠나 조용한 곳에서의 휴식을 위해 찾아오시는 손님들과 천천히 절을 둘러보고, 원한다면 예불도 함께 드렸다. 소박한 사찰 음식을 먹고, 상황에 따라 첫새벽 바람을 맞으며 일출을 보기도 했다. 애국가 영상 첫 소절처럼 솟아오르는 붉은 해는 언제 봐도 웅장했다.

절에서의 손님맞이 저녁 일과는 주로 차담이었다. 오래된 목조 건물의 너른 마루에 둥그렇게 둘러 앉으면 처음에는 서로의 어색함만큼 거리를 둔다. 그러면 나는 말없이 차를 내어드린다. 고요한 밤, 달빛 아래서 마시는 향긋한 차 한 잔은 우리 사이의 거리는 좁히기에 알맞았다.

찾아오는 손님들은 그야말로 다양했다. 남녀노소였으며 그때까지 내가 우연히라도 지나가 본 적 없는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 살아온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각자의 배경을 제쳐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반삭발을 하고 앉아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나에게로 시선이 모아졌다.

"이렇게 젊으신데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외롭지 않아요?"

그때 뭐라고 대답했더라.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한동안 나는 혼자일 시간이 없었다. 그때 내가 쓰던 두툼한 다이어리는 어느 영업 사원의 그것과 같았다. 평일, 주말할 것 없이 매일 두세 건씩의 약속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오전에 A 친구와 만나 놀다 B 친구와의 약속 시간이 다가오면 A와 함께 B를 만나러 간 날도 많았다. 나 역시 그런 식으로 A,B의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일주일이, 한 달이 짧게 느껴졌다. 심지어 어제 저녁에 만났다가 오늘 아침에 다시 만나도 우리의 이야기는 화수분처럼 마르지 않았다. 너도나도 얼싸안고 "대한민국!"을 외치던2002년 한일 월드컵을 치른 후 내 자기효능감은 '버스를 기다리는 찰나에도 옆에 있는 사람과 절친한 사이가 될 수 있다'에 있었다. 그때 다단계를 했어야 했는데.


몸과 마음에서 신호를 보낸 것은 마당발로 지낸지 3년이 지나갈 즈음이었다. 시작은 거짓말이었다. 그 무렵 나는 다이어리에 빼곡히 적힌 시간과 장소, 이름들을 보며 그 약속들이 취소되거나 연기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째깍째깍 흘러갔고, 그들로부터 "내일 보자!"는 문자 메시지를 받고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최대한 그럴듯한 거짓말을 꾸며내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알게 된 그것의 정체는 '소진'이었다. 점점 닳아서 바닥이 드러나는 기분이었다.

상황을 알아차렸을 때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전국을 싸돌아다니며 사람들 속에서 울고 웃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분명 나는 그들과 함께였고, 서로에게 힘이 되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울리던 한 마디는 '충전이 필요해.'였다.


그렇게 나는 서른도 되기 전에 스스로 그들을 떠나왔고, 자발적 고립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물론 돈을 벌어야 했고, 중간중간 연애도 했으므로 온전한 고립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나의 선택권이 영향을 미치는 한에서,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선에서 '혼자'임을 사수하려 아등바등 애썼다. 어쩌다 목표 달성을 하는 날이면 나 혼자 바빴다. 주로 책을 읽었다. 앉아서 읽다 누워서 읽다 서서 왔다갔다하며 읽었다. 그러다 아무런 목적없이 발길 닿는대로 서울의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며 산책이라 위안 삼았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동네 놀이터에서 오아시스같은 몇 그루의 나무로 초록의 기운을 충전했다. 나이가 들수록 혼자됨에 적극적이었다. 홀로 버스나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던 날의 뿌듯함은 초등학생인 두 아들을 포함해 남자 셋과 한 집에 살며 복작거리는 지금의 내 일상에 꿈같은 일이다.

'나 홀로 집에'든 '나 홀로 여행'이든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낸 날 밤 잠자리에 누우면 100%로 완전 충전된 휴대폰처럼 배가 부르고 뿌듯함이 충만하여 얼마 간은 버틸 힘이 생겼다. 언젠가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 몸 어딘가에 나사가 몇 개쯤 빠져서 외로움을 못 느끼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외로운 척이라도 해 볼까. 하지만 '어떻게'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이었다.


미국 공중보건서비스단(USPHS)은 '외로움과 고립감이라는 유행병'이라는 보고서에서 미국인 절반이 외로움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로움이 담배 15개피를 피우는 것만큼이나 심신 건강에 유해하고, 조기 사망 가능성을 최대 30%까지 높이기도 한다니 분명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하지만 자는 시간마저도 혼자일 수 없는 고난의 시기를 건너고 있는 요즘의 나는 18년 전 절에서의 밤을 떠올리곤 한다. 2평 남짓한 방에는 반으로 접힌 1인용 이부자리와 내가 몇 날 며칠 벽돌을 구해다 만든 2단 짜리 책장, 그리고 '나'가 전부였다. 나 혼자 대자로 누워 자기에 조금도 모자람 없던 그 방에서 나 자신에게 묻고 대답했다.

"외롭지 않아?"

"행복해."


그 많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한 번쯤 보고 싶기는 하다. 내가 먼저 연락해 만나자고 할 가능성은 희박하고, 혹시 그들이 먼저 만나자고 하면 야생동물처럼 날뛰는 두 아들을 핑계 삼아 다음을 기약할 확률이 높다. 이건 거짓말이 아닌데 왜 벌써 찔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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