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책 안 읽고 뭐해요?

by 고성미


긴 하루 끝에 좋은 책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그날은 더 행복해진다.

Just the knowledge that a good book is awaiting one at the end of a long day makes that day happier.

캐슬린 노리스Kathleen Norris






'많이' 살다 보니 별별 일이 다 있었다.

"도대체 이게 되는 일이야?" 싶을 정도로 남보다 몇 배는 큰 굴곡을 지났는가 하면 "이게 되네?"하며 구렁이 담 넘어가듯 쉽게 흘러간 일도 있었다. '날로 먹은' 일 중 하나는 자전거 타기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아버지의 고향인 강원도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살다가 산골 할머니댁 방 한 칸에 네 식구가 들어앉았다. 돌아가는 상황이 어떻든 먹고 사는 일을 걱정할 나이가 아니었던 덕분에 놀고 먹고 신나게 놀았다. 앞뒤 상황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날 땟국물 흐르는 나와 새하얀 원피스 차림의 친구는 자전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친구가 사는 아파트 단지 한 쪽이었고, 방금 전까지 친구가 보조 바퀴없는 자전거를 타고 이리저리 달리는 모습을 지켜봤던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타봐도 돼?"하고 물었다.

다음 기억의 조각에서 내 엉덩이는 자전거 안장에 올라가 있었고, 양 손은 핸들에, 양 발은 페달 위에 있었다. 나는 망설임없이 발에 힘을 줘서 페달을 돌렸고, 동아줄이라도 잡는 듯 핸들을 힘껏 움켜쥐었다. 곧이어 핸들이 왼쪽으로 꺾이며 균형을 잃은 나는 아파트 화단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내 두 손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쓰러질 듯한 자전거가 몸을 세웠다. 그게 다다. 그 이후 자전거가 그냥 '타졌다'. 그 흔한 "잘 잡고 있지? 놓으면 안 돼!" 한 번없이. 운동 신경과는 상관 없는 일인 것 같다. 아마 누군가가 앞으로 닥칠 만만치 않은 일들을 이 악물고 잘 버텨내라는 뜻으로 주신 딸기맛 사탕쯤이 아닐까 싶다.


또 하나 공 들이지 않고 얻은 것은 '책'이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 우리는 서울로 이사갔다. 어른들의 일이라 영문을 몰랐지만, 새로운 학교에 다녀야 했다. 전학 간 첫 날, 간단한 자기 소개를 마치니 배가 불룩하고 머리숱이 없는 남자 선생님이 교실 뒷문 바로 옆 빈 자리를 가리키셨다. 내 짝궁은 나보다 한 달 먼저 전학온 예쁘장한 아이였다.

"여기는 성적순으로 자리를 정한대. 쟤가 일등이래."

짝궁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 보니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은 새까만 단발 머리의 여자 아이가 앉아 있었다. 성적이 아니라 미모, 혹은 부모의 재력으로 자리를 정한다 해도 그 아이를 따를 자가 없어 보였다.


나는 남은 반 학기를 일등의 옆자리에서 보냈다. 딱히 공부를 한 기억은 없다. 그렇다고 뭐 신나게 논 기억도 없는 서울살이의 시작이었다. 끊어지고 이어지는 기억들 속 어느 날 나는 방안에 혼자 있었다. 오전인지 오후인지 커튼 따위 없었던 커다란 유리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벽에 쪼그려 기대 앉은 나는 4학년 교과서를 읽고 있었다. 국어, 바른 생활, 슬기로운 생활처럼 읽을 거리가 많은 책들을 천천히 아껴가며 읽었다. 책 앞표지부터 뒷표지까지 쓰여 있던 모든 글씨와 숫자를 눈에 새기듯 읽었다. 누구도 나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지 않았고, 아무도 나에게 책을 읽어준 적이 없었지만 그냥 '읽어졌다'. 뒤이어 펼쳐든 음악책은 읽을 거리가 많지 않았지만 동요의 가사까지 빠짐없이 읽었다. 몇 권 되지 않는 교과서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 그것 말고는 집에 읽을 만한 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2024년 4월, 나는 가히 충격적인 통계를 접했다. 2023년 우리나라 성인 독서율이 43%로 최저치 기록을 또 경신했다는 내용이었다. 1994년 86.8%였던 것이 20년 만에 반토막난 것이다. 특히 최근 10년 간의 하락 폭이 치명적이었다. 전자책과 오디오북을 포함해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성인이 10명 중 6명 꼴이라니, 책 안 읽고 뭐해요? 책을 '못' 읽는 가장 큰 이유가 시간이 없어서라니, 책 안 읽고 뭐하는데요?

유인촌 문화체육부 장관은 이 같은 추세를 엄중히 인식하고 있다며 독서문화 진흥을 위해 다방면으로 힘쓰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월 수익 500만원 이상 고소득자의 독서율이 더 높았다는 불편한 사실은 쉬쉬하더라도, 오늘밤 잠들기 전에 읽던 책을 펼쳐드는 사람만이 계속 읽어나갈 것이라는 안타까운 진실을.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나는 야생동물 같은 두 아들을 키우고 있다. 그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학원 등의 '사회 생활' 경험없이 눈만 뜨면 먹고 놀고하며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다. 거

기에 한 가지 더하자면 책 읽기였다.



곰 잡으러 간다.

큰 곰 잡으러 간다.

정말 날씨도 좋구나!

우린 하나도 안 무서워.

어라! 강이잖아!

깊고 차가운 강물.

그 위로 넘어갈 수 없네.

그 밑으로 지나갈 수 없네.

아, 아니지!

강물을 헤엄쳐 건너면 되잖아!



마이클 로젠의 <곰 사냥을 떠나자>의 일부이다. 이 책에서 아빠와 엄마 그리고 세 아이, 거기다 가족 같은 강아지까지 총 여섯 식구는 어느 날 곰사냥을 떠난다. 그들은 넘실대는 기다린 풀잎으로 가득한 초원을 헤치며 지나갔고, 깊고 차가운 강을 헤엄쳐 건넜다. 질퍽이는 진흙탕을 밟고, 커다랗고 컴컴한 숲은 뚫고 지나갔다. 소용돌이치는 눈보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아간 그들은 마침내 곰이 사는 동굴 앞에 다다랐다. 누군가는 곰 사냥을 포기할 만한 근사한 핑계거리를 헤치고, 밟고, 뚫고 온 그들은 하나로 똘똘 뭉쳤다. 우린 하나도 무섭지 않다며 용감하게 동굴 안으로 들어간 가족이 드디어 곰과 만났을 때의 표정과 몸짓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다음 장면부터가 이 책의 묘미다. 가족들은 반대로 곰의 사냥감이 되어 왔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도망친다. 그 모습을 보고 들으며 히죽히죽대던 첫째 아이와 함께할 때면 나는 최고의 동화 구연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첫째 아이의 독서력은 이 책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 하루 종일 둘이서 책만 읽었던 날이 많았는데 그날도 그 중 하나였다. 점심 밥을 다 먹자마자 아이가 또 그 책을 들고 왔다. 그 무렵 아이는 읽은 책을 반복해서 읽어주길 바랐다. 책 전체를 여러 번 읽기도 했지만 '오늘의 장면'으로 꼽은 한 쪽을 열 번, 스무 번 넘게 연달아 읽기도 부지기수였다. 그럴 때마다 이제 그만하고 제발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며 지쳐 떨어져 나간 건 내 쪽이었다. 그러면 아이는 큰 선심을 쓰듯 책장을 넘기며 한 마디하곤 했다.

"알았어. 그럼 이따가 또 읽자."


그날 밤 아이가 잠든 후 나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곰 사냥이고 뭐고 지겨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곰 사냥 책을 옷장 깊숙이 숨겨 놓고 보니 시원함과 미안함이 뒤섞였다. 내일은 그 책을 안 읽어도 된다는 해방감과 나를 엄마로 만들어 준 아이가 그토록 사랑하는 책을 숨긴 데 대한 죄책감이었다. 다음 날 아이는 눈을 뜨자마자 무언가를 찾아 집안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그것'을 애타게 찾는다는것을 알면서도 나는 모른 척했다. 하지만 풀이 죽은 아이의 모습에 반나절도 못 버티고 다시 내 손으로 그것을 아이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읽고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자란 첫째 아이가 8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느 날이었다. 그때만 해도 마주앉아 하는 훈계가 통할 때였다. 이러저러하니 앞으로는 그러지 말자는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이는 제 옆에 있던 책들 중 하나를 집어들어 펼치더니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며 이렇게 말했다.

"역시 책 볼 때가 제일 마음이 편해."


최근 아이들의 친구들까지 합세한 책모임을 만들었다. 아이가 만화책마저 안 읽는다는 둘째 친구 엄마의 푸념에 내가 너에게 책 읽는 맛을 알려주마하는 사명감이 불탔기 때문이다. 인원은 총 8명인데, 어떻게 또 두 살 터울의 세 형제와 네 살 터울의 형제 하나다. 처음의 계획은 이랬다. 한 달에 한 권 같은 책을 읽고, 독후활동지를 쓴 후 만나서 책수다를 한다. 그리고 바쁜 아이들의 일정을 조율해 만난 후 먹고 마시고 논다.

첫 번째 책은 <고구마 선거>라는 초등 저학년을 대상으로 한 큰 글씨 책이었다. 물론 책 읽기보다 만나서 노는 것에 초점을 맞춘 아이들이었지만 그동안 책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던 몇몇 아이들의 진도는 더디고 더뎠다. 결국 5월에 시작한 책 읽기와 독후활동지는 8월에나 마무리됐고, 화기애애한 책수다 시간을 거친 후 어느 쨍쨍한 날 모여 신나게 물놀이를 했다.


아무 걱정없이 오늘이 마지막 놀이 시간인 듯 노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교과서를 아껴 읽던 어릴 적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있는 가정에 깨알 같은 글씨의 백과사전을 팔아먹은 김선호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잠들기 전 엄마나 아빠가 동화책을 읽어줬더라면, 누군가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책을 읽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을 조금 더 일찍 알 수 있었을텐데.


우리집에는 명품은 하나도 없지만 명작은 아주 많다. 가끔 나는 그 책들을 한아름 안고 음악 교과서의 동요 가사를 손으로 짚어가며 읽던 그 아이를 찾아가는 상상을 한다. 그 아이와 함께라면 읽고 읽고 또 읽었던 책도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책장만 넘기면 되는데 어려울 게 뭐 있나.


아니, 그런데 진짜 책 안 읽고 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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