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논평
이 글은 2025년 개봉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 대한 논평이며, 따라서 독자가 영화를 보았음을 전제로 작성한다. 당연히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거니와, 별도의 내용 요약을 생략하기 때문에 영화를 완독하지 않았다면 글을 이해하기 곤란할 수 있다는 점을 먼저 밝혀둔다.
나는 미국의 정치사에 대해 과문할 뿐만 아니라 딱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아마 내가 눈 밝은 미국인이었다면 영화의 블랙 코미디에 더 많이 웃을 수 있었을 것이고, 영화가 고발하는 미국 사회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이주자 문제, 인종 문제, 젠더 문제 등 다양한 형태로 미국에 고착화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온 어떠한 ‘질서’에 대한 '혁명' 내지 '전투'를 소재로 하고 있다. ‘혁명’이라는 단어는 등장인물들의 입에 엄청나게 많이 오르내리지만, 무엇에 대한 누구의 혁명인지는 딱히 말해지지 않는다. 혁명의 주체와 대상이 공란으로 처리된 만큼 이 영화는 폭력적 질서와 저항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루는 한편, 동시에 이 폭력적 질서가 작금에 들어 더 대두되고 있는 만큼 이 영화는 특수하게 시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영화관을 나오며 다른 관객들로부터 현직 미국 대통령의 이름을 몇 차례 들었다.
두 개의 전장, 탈선과 충돌
제목이 말해주듯 이 영화가 전투를 다루고 있다면, 이 전투의 전장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영화의 전장은 두 곳이다. 하나는 ‘사회 혁명'이라는 전장이고, 다른 하나는 ‘가족’이라는 전장이다. 전장이 있는 만큼 대립하는 힘도 각각 존재한다. 사회의 전장에서는 퍼피디아와 '프렌치 75'로 대표되는 이른바 ‘유색인종’의 한 측면과 '산타클로스 모험가 클럽'(이하, “산타 클럽”)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순혈 백인’의 한 측면이 팽팽한 긴장을 빚고 있다. 이들의 대립은, 현실에서 종종 그렇듯, 거칠게 말해 급진 좌파 세력과 극우 세력의 대립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가족이라는 전장에서는 록조와 밥이 전통적 아버지의 자리를 놓고 쟁탈전을 벌인다. 영화는 사회를 비추는 매개로서 록조-윌라-밥의 가족사를 조명한다. 요컨대, 백인 극우인 산타 클럽의 아치에너미가 흑인 아나키스트인 퍼피디아라면, 현역 군인 록조의 아치에너미는 퇴역 혁명가 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전장은 분리되어 있다가도, 또 조금씩 중첩되며 충돌을 일으킨다.
혁명을 다루는 영화라고 해서 영화가 프렌치 75의 ‘혁명’ 활동 일체를 선(善)의 대변자로 두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이들과 산타 클럽의 대립은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라 폭력과 폭력의 어설픈 대립이다. 특히 퍼피디아 세대의 프렌치 75는 전혀 대안적 질서가 되지 못한다. 이들의 ‘혁명’ 활동에서 퍼피디아가 정작 해방의 대상이 되어야 할 흑인을 쏴 죽이게 된다는 점에서 영화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퍼피디아의 편지에서 그녀가 자신의 혁명을 “실패”로 규정하였듯, 퍼피디아 세대의 프렌치 75는 기성 질서에 대한 순수한 저항의 에너지만을 가지고 있을 뿐, 하나의 대안으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그런 한편 ‘가족’이라는 전장을 들여다보자. 밥은 퍼피디아와 더불어 1세대 혁명 활동에 참가하긴 하지만, 밥의 가족에 대한 인식은 퍼피디아에 비하면 너무나 ‘정상적’으로 보인다. 딸 윌라가 태어나자 그 자신은 혁명활동으로부터 멀어져 전통적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밥은 모든 전통과 결별하고자 하는 퍼피디아의 프렌치 75와는 구별된다. 그는 ‘혁명’의 편을 들지만 동시에 가족이라는 전장에서는 여전히 ‘보수적’인 남편이다. 급진 혁명가의 시선에는 이러한 그의 모습은 그저 '반푼이'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 퍼피디아는 이러한 밥에게 “자신은 모유를 만드는 공장이 아니”라며 비난하고, 퍼피디아의 부모는 밥의 부족한 혁명 의지에 대한 우려를 드러낸다. 그러나 앞서 그녀의 저항이 사회 질서의 대안이 되지 못했던 것처럼, 퍼피디아 식의 혁명적 가족론(?)도 기왕의 가족질서에 대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 실로, 총을 들고 은행원을 위협하던 정글푸시는 퍼피디아의 살인으로 일이 수틀리자 팔꿈치를 겨드랑이에 붙이고 “여성스럽게” 달리며 도주를 시도하다가 경찰에 의해 사살된다.
이 과정에서 록조의 개입은 ‘가족’이라는 전장을 본격화 한다. 록조는 얼핏 보기에 산타 클럽과 똑같은 진영에 서 있는듯 보이지만, '진짜배기' 백인 우월주의자 산타 클럽과는 구별된다. 그는 퍼피디아와 사랑에 빠져 협박에 의한 불륜 관계를 가지고, 결과적으로 윌라를 생물학적 딸로서 갖게 되기 때문이다. 산타 클럽은 유색인종을 성애의 대상으로조차 여기지 않지만, 록조는 그 자신의 언급처럼 퍼피디아를 “사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록조가 산타 클럽에 방문할 때마다 다른 회원들과 달리 상하의의 색이 서로 다른 정장을 갖춰 입었다는 미장센에서 잘 드러난다. 관객이 보기에는 똑같이 정신줄을 놓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일뿐이지만, ‘순혈’ 백인들의 눈에는 록조 또한 흑인을 사랑한 ‘잡종’ 일뿐이다. 요컨대 밥이 완전한 혁명가가 되지 못했듯, 록조 또한 순혈 백인이 되지 못하고 ‘반푼이’의 어정쩡한 위치에 놓이는 것이다. 따라서 딸 윌라는 어떤 의미에서 '사회 혁명'의 반푼이와 '순혈 백인'의 반푼이 양쪽 모두를 아버지로 갖게 된다.
바로 이 '반푼이'라는 점에서, 밥과 록조는 가족이라는 전장 위에서 기묘한 데칼코마니를 만들어낸다. 영화 내내 밥은 혁명가로서 무능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테이큰》이나 《존 윅》 같은 영화에서 자주 재현되었던 '돌아온 영웅'의 서사를 영화는 전혀 채택하지 않는다. 그는 마약과 알코올에 찌들은 늙다리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부모 노릇도 결함이 있으며, 사실상 윌라의 가라데 '센세'인 세르지오가 그녀의 정신적, 체력적 교육자가 되고 있다. 한편 부모로서 부적격한 것은 당연히 록조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두 차례 나타나는 록조와 윌라의 우스꽝스러운 추격적을 마치 딸과 아버지의 술래잡기처럼 보이게 하며, 머지않아 사실상 자신의 손으로 죽이게 될 딸에게 예의를 운운하며 '아버지'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연출이 기이하게 읽히는 것은, 록조의 ‘아버지됨’이 인종주의의 강력한 인력에 의해 탈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내내 혁명가로서 무능한 밥과 같이, 록조도 영화 내내 '아버지'로서, 나아가 '남성'으로서 부적격한 인물로 그려진다. 화통 삶는 소리를 내며 탈선된 두 기차가 서로 충돌하듯, 영화가 그려내는 두 모지리들의 ‘아버지’ 대결은 치열하게도 우스꽝스럽다.
몰락과 진동, 가족과 혁명
산타 클럽, 퍼피디아, 록조, 밥이 각각 이들의 전장에서 이들의 위치를 점하며 싸우고 있다면, 이 태풍의 눈 가운데에 있는 윌라는 어느 전장의 어느 지점에 있는가. 또 이 모지리들의 싸움에서 누가 어떻게 윌라를 구원할 것인가. 이것은 새로운 세대의 혁명가에게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다. 윌라는 그 자신의 전장에서 두 차례의 몰락을 겪는다. 어머니 퍼피디아가 실은 혁명의 영웅이 아니라 '쥐새끼'(rat)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윌라는 사회적 혁명이라는 전장에서 몰락한다. 아버지 밥이 자신의 생부가 아니라 가증스러운 인종주의자 록조가 자신의 생부라는 것을 알았을 때, 윌라는 가족이라는 전장에서 몰락한다. 윌라의 삶을 지탱하던 두 기반이 무너지면서 그녀의 정체성은 어디 안착될 곳 없이 흔들리고 만다.
그리하여 윌라는 생부 록조로 상징되는 '혈통', 밥으로 상징되는 '가족', 생모 퍼피디아로 상징되는 '혁명' 사이에서 말 그대로 “진동”한다. 그리고 이 진동은 영화 후반부의 언덕 자동차 추격 씬으로 표현된다. 오직 미국의 끝없는 고속도로에서만 촬영될 수 있는 이 진동은 마치 매트로놈처럼 ‘풀 악셀을 밟으며’ 꿀렁거린다. 산타 클럽의 암살자 스미스가 윌라를 '청소'할 목적으로 뒤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종주의의 마수는 두 전장의 무너진 교차로에서 진동하는 윌라에게 여유로이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의 삶을 다시 구축할 시간을 허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윌라는 기지를 발휘해 스스로의 힘으로 진동을 멈추고, 바로 그럼으로써 스미스를 자기 손으로 처단한다. 그녀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그것은 우선 원주민계 현상금 사냥꾼이 목숨을 버리고 그녀를 구했기 때문이며, '위대한 비버 수녀회'를 비롯한 잔존 지하 세력이 '쥐새끼'의 딸인 그녀를 거둬 주었기 때문이며, 윌라 자신에게 스스로를 구원할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멸시받는 약자들의 연대와 저항을 통한 자기구원. 이러한 저항의 힘은 어머니 퍼피디아의 실패한 혁명이 가지고 있던 정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목숨을 걸고 믿는 단 하나의 진실은 혁명의 유산이었던 '딕과 제인'으로 시작하는 암구호 뿐이었다. 세차게 진동하는 윌라의 정체성은 퍼피디아의 '실패'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 진동을 멈출 수 있는 자기구원의 힘도 바로 혁명에서 말미암았던 것이다. 이 점에서 영화는 '실패자'로 규정된 1세대 혁명가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당신들의 방식은 틀렸을지언정 그 정신만은 틀림없이 다음 세대로 계승되었다고.
한편, 뒤따라온 밥에게 총을 겨누며 고래고래 “넌 누구냐”고 소리치며 암구호를 외치는 모습은 윌라가 비로소 한 명의 ‘혁명가’로 각성했음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록조로 인해 붕괴된 기왕의 혈연적 가족 질서의 자리에 '혁명'을 매개로 밥과 윌라의 새로운 가족관계가 구축될 것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들의 부녀관계는 기왕의 그것과는 분명 다른 방식으로 변모한다. 따라서 윌라의 정지, 혁명과 가족 사이에서의 정지는, 그저 혁명과 가족 사이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이 둘의 결합이기도 하다.
다음 세대의 전투는
그렇다면 이제 윌라는 어떻게 되었나. 영화의 결말에서 보이듯 그녀도 어머니를 따라 이른바 '혁명가'가 되었다. 전투의 지속, 이것은 실은 자명한 결과이다. 가족을 위협하는 록조와 스미스는 사라졌지만, 아직 산타 클럽은 건재하다. 사회라는 전장이 존재하고 상충하는 두 힘이 거기서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한, 전투는 계속될 것이다. 이것이 “one battle after another”라는 제목의 의미일 것이다. 한국어 자막으로는 "끊임없는 전투"로 번역된 이 말은 한국어로 직역하면 ‘다른 전투 다음의 또 하나의 전투’ 즉 연전(連戰) 정도의 의미다. 그렇기에 윌라의 세대가 해 나가야 할 전투는, 문자 그대로 어머니 퍼피디아 세대의 전투를 이어받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실패한 지난번 전투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전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싸울 것인가. 앞으로 나아가게 될 전장은 어디인가. 이것은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하나 확실한 것은, 그저 이전 세대의 ‘혁명’을 답습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점을 강조하듯, '어른들'과는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그러나 자기들 나름대로의 조직력과 정보력과 정력을 갖추고 연대하는 10~20대의 '신세대' 저항 세력을 시종일관 비춘다. 요컨대 세대가 변한 만큼, 저항의 방식도 달라진 것이다. 지금은 몇 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