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무관심
따뜻한 무관심.
따뜻함과 무관심은 의미적으로 함께 있을 수 없는 단어이다. 이 두 단어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하지만 '따뜻한 무관심'이라는 단어를 곱씹고 보면 따뜻한 관심보다 한발 더 나간 배려라는 생각이 든다.
이 역설적인 단어에 딱 맞는 순간을 파리의 버스에서 경험했다.
엄마와 함께 여행을 하면 내 시선에서는 바라보지 못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이전 친구들과의 배낭여행은 같은 나이에 비슷한 생각과 가치, 경험들을 가지고 있기에 바라보는 시선과 대화의 주제들이 일치하는 것들이 많았다. 여행 필터로 입혀진 모든 곳은 낭만적이었고, 이러한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다는 감성에 흠뻑 젖어 들어 있었다.
이 젊은 시기에 이 아름다움을 즐기다니 우린 정말 멋진 청춘이야-!
하지만 세대를 달리 하고 경험의 폭이 다른 엄마와의 여행에서는 내가 미처 경험하지 못해 느끼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바라보는 것들이 있다.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는 중에 한 가족을 보았다. 유모차에 탄 신생아와 3살 정도의 아기 그리고 임신한 여성과 그 옆에 3살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남성. 다섯 명으로 구성된 가족이었다. 내 시선에는 아이를 둔 가족의 모습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그저 객관적인 객체로만 보였다. 엄마는 그들의 가족을 보고 한국이면 보기 드문 관경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두고 보니 대한민국에서는 대중교통을 타며 신생아를 안은 부모의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구나를 자각했다. 아이를 데리고 타는 것도 어려운데 유모차를 끌고 있는 임산부라니.
한국은 보통 아이를 낳으면 차를 사고, 차도 SUV와 같은 큰 차로 바꾼다고. 엄마도 어릴 적 오빠가 태어나고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다 너무 힘들어서 차를 샀다는 일화를 얘기를 했다.
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본 모습이 아이를 낳고 키워본 엄마의 눈에는 보이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또 한 번 프랑스가 선진국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느린 행정처리,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옛 건물과 아날로그 기술들. 현대적 요소들로만 비교한다면 불편하고도 답답한 그들의 모습에 가끔은 기술발달이 더 이루어진 대한민국이 더 선진국처럼 느껴지곤 하지만 사람들이 약자를 대하는 모습과 그 자연스러운 태도가 이 국가가 선진국이구나를 느끼게 만든다. 그것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문화라고 하기엔 폭이 좁고 규범이라고 말하기엔 애매한. 그들에게 걸쳐진 옷 같은 느낌. 이러한 뉘앙스를 표현하는 단어가 ‘똘레랑스’일까.
그 자연스럽고도 당연하고도 편안한 에티튜드.
유모차에 탄 아기가 버스에서 계속해서 떠나가게 울기 시작했고, 그 누구도 그들에게 질타 어린 말을 건네지 않았다. 아니,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아이가 우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당연한 것에 시선을 주지 않듯. 그건 무관심이 아닌 분명한 배려였다.
아기의 엄마는 앉아있는 누군가에게 자리를 요구했고, 버스 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은 너무나도 당연한 듯 자리를 내어주었다. 버스는 서로 마주 보고 앉게 돼있는 구도였는데, 아기의 엄마가 자연스레 옷을 올리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자 반대편의 중년은 시선을 바깥 창문을 고정한 채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다. 자리를 내어주고 손잡이를 잡고 선 학생 또한 창밖을 그저 응시하며 여성이 모유를 먹이기 편안하게 도와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개인주의적인 듯 하지만 서로의 개개인을 존중하며 조화를 이루는 모습.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는 모습을 나만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벅찬 감정이 올라와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이를 낳아보지 않은 내가 꺽꺽 울고 싶은 만큼의 벅참이 느껴져 스스로도 기가차고 어이가 없었다.
형용할 수는 없지만 대중교통에서도 젖을 먹일 수 있을 만큼 여성의 성을 분별하여 바라볼 줄 아는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 어머니에 대한 존중이 묻어나는 문화가 부러웠고, 자신의 아이를 위해 기꺼이 행하는 담대함에 감동했다. 동시에 옆에 있는 엄마에 대한 감사함과 미안함도 섞여있는 아주 복잡하고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최근 국가비가 공공장소에서 모유를 먹이는 것이 이슈가 되어 기사화가 된 것을 본 적이 있다.
어쨌든 가치라는 것이, 개인의 인식이라는 것에 평가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정답은 없기에 어떤 것이 옳다고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개인을 개인으로서 바라봐 줄 수 있는 존중의 자세와 연대감이 공존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