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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en rabbit Aug 13. 2023

은행 진상남의 그럴싸한 변명

천사는 잘못이 없다

최근에 작업 중이던 한 작품은 굉장히 오랫동안 고민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글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글 한 토막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마침 하루종일 내리던 비가 그쳐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갔다. 한참을 걸으면서 결국 나는 내가  작품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가 할 수 있는 종류의 작품이 아 게 분명다. 죄송하지만 이 작품을 못하겠다고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는 급격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왜냐하면.

어쨌든 실패했으니까.

어쨌든 해내지 못했으니까.

어쨌든 내 실력이 여기 까지라는 거니까.

나는 지난 십여 년간 수많은 실패를 차곡차곡 쌓아 왔다. 그렇게 쌓인 실패는 이제 내 목구멍으로 넘치기 직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은행에 갈 일이 있었다. 한산한 은행에서 받은 번호표는 <1004>다. 갑자기 나는 울컥했고, 괜히 눈물이 나리만치 고마웠다. 천사라니... 아무런 맥락도 지만 나는 위로를 받은 기분이었다.


은행 창구 3개  하나가 업무가 끝나고 비었다. 직전의 호출번호가 1003이었으니 이제 내 차례였다. 하지만 창구 직원은 호출을 하지 않고 다른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천사> 번호표를 쥐고 기다렸다. 잠시 뒤 또 다른 창구의 업무도 끝났다. 이제 빈 창구는 2개가 됐지만 그래도 호출은 없었다. 창구 직원들이 모두 다른 일을 보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확인하고, 걸려온 전화를 받고,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전표를 정리했다. 나는 다음번 호출이 되기를 기다렸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마치 억겁이 흐른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 짧은 몇 분 일 지 모르지만 <천사>를 쥔 나는 배신감으로 견디기 힘들어졌다. 나는 창구 직원이 들릴만큼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비어있는 창구의 직원들과 번갈아 가며 일부러 눈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신들 왜 호출 안 하는 거야? 사람 무시해? 나 기다리는 거 안 보여? 약 올리는 거야?

혼자 속으로 외칠뿐이었지만 나는 점점 더 참을 수가 없어졌다.

"아이 ㅆㅂ!! 기다리는 사람 안 보여?! 뭐 하자는 거야!!" 소리치고,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빈 창구 의자를 걷어차고 싶었다. 고객님 왜 이러시냐며 다가 올 저 뚱뚱한 경비원을 바닥에 패대기를 치고 싶었다. 이렇게 속절없이 시간이 가는 것을, 마냥 내가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모니터의 호출 번호는 여전히 1003에서 멈춰있었다. 나한테 대기표로 1004를 준 의미가 뭐야? 날 갖고 장난치는 거야?

'너 이거 진상 부리는 거야.'

나는 대기표를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이내 러지 말자고 고개를 마구 흔들어댔다.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데? 나는 창구의 직원들을 노려봤다. 리고는 곧장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런 모습이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어땠을까. 미친놈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

마침내 호출 번호 0004가 떴다. 나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는 친절한 창구 직원의 말에 대답 대신 구긴 번호표를 접시에 올렸다. 그때 뒤에서 경비원이 나를 불렀다.

"혹시 대기 번호가 몇 번이신가요. 다음은 이 손님 차례인데요."

"내가 천사야! 천사! 여기 번호에 찍혀 있잖아!"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참았다. 어째서인지 구겨진 <1004> 번호표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반드시 너를 패대기치겠다는 얼굴로 경비원을 돌아봤다. 그러자 창구직원이 서둘러 다른 손님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 죄송합니다. 이 손님 업무를 이미 시작했으니까요. 금방 끝날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직원이 대신 사과를 했다. 그는 내게서 진상의 맛을 느낀 게 틀림없다. 그제야 나는 모니터에 뜬 0004는 어쩌면 다른 업무의 번호였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하지만 이 작품은 내가 할 수 없을 것 같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전했다. 최대한 공손한 말투로.

 

공손한 나와 은행 진상남은 한 사람이었다. 미친놈은 너와 내가 없다. 누구나 또라이 미친놈이 될 수 있다. 작품을 할 수 없다고 고백은 했지만,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이 또 하나의 실패로 쌓이는 게 두려웠던 모양이다. 계속 쌓이는 실패는 마침내 독이 된다. 그 독은 사람을 해치고 상처를 입힌다. 상처 입은 나는 세상을 겁내고 또 상처 입을까 한껏 웅크린다. 때문에 만만한 은행창구에서라도 나는 겁먹지 않았다고,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 아니라고 마구 짖어대야 했나 보다.

멍멍.

가만, 이거 실패니 상처니 그럴싸한 핑계로 진상짓을 덮으려는 것 아닌가. 이거야 말로 정말 개소리다.

깨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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