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llen rabbit Oct 22. 2023

심난한 고 3 학부모에게 테스형이 말한다.

"니 꼬락서니를 알라!"

"거 사람 불편하게 하네!"

나는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딸에게 쏘아붙였다. 볼멘소리를 하던 딸은 입을 다물었고 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내는 내가 한 마디 더할까 봐 내 손목을 그러 쥐고 눈빛을 쏘았다. 그제야 그러지 말걸 나도 후회가 됐다.  

고3인 딸은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학교에 가기 싫다는 말을 계속했다. 교사인 아내는 고3 교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온갖 이유로 아이들이 빠져나간 이맘때의 고 3 교실은 황폐하다. 그걸 보는 교사들의 마음도 심란하기 이를 데 없다. 때문에 우리는 그런 교실을 만드는데 딸이 일조하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딸은 갈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그렇게 긴 실랑이 끝에 아내는 조회만 하고 일찍 오라고 물러섰지만 딸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라고 소리쳤다. 그때 내가 딸을 쏘아붙인 거였다.


고3은 과연 신난 하다. 녀석은 가끔 아내에게 지난 시간들이 후회된다고도 하고, 자신의 운 없음을 한탄하기도 하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억울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때때로 막연한 불안에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고3은 지금껏 자신이 쌓아왔던 어떤 자존심이 세상의 평가를 받는 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 3쯤에는 대게 나는 이 정도는 될 거야. 하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기의 수준이 있다. 하지만 대게 그건 진짜 실력이라기보다는 자존심의 형태에 가까운 편이다.  대입에서 자존심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러니 난생처음 겪는 이 과격한 부딪힘에 꺾이는 자존심이 얼마나 아플. 바라보는 내 마음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나 역시 불안과 걱정으로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딸이 조금 더 열심했더라면 하는 아쉽고 속상한 마음도 없지 않다. 내색은 안 해도 딸의 푸념을 들을 때 짜증이 나는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닐까? 어떻게 살아왔는지, 얼마나 준비해 왔는지, 십수 년을 지켜봤기에 딸이 넘어야 할 현실의 벽이 얼마나 높을 다고 생각하 때문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하나 있다. 막내 동생이 태어나서 집에 왔을 때였으니 내가 5살 때였다. 갑자기 어머니는 나에게 세수를 알아서 혼자 하라고 하셨다. 그때 수돗가는 집 앞에 있었다. 벽돌로 턱을 쌓고 시멘트를 바른 한가운데 마중물을 부어서 물을 길어 올리는 물펌프가 있었다. 나는 갑자기 혼자 세수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당황다. 혼자 세수를 어떻게 지? 어머니가 씻겨줄 때는 몰랐는데 혼자 하라 도무지 막막했다. 어머니는 동생을 씻기고 당신도 세숫대야 앞에 쪼그려 앉은 채 포-포- 세수를 했다. 나는 물 펌프로 물을 퍼 올리며 문득 아버지가 세수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아버지는 등목이라도 하는 듯 무릎을 펴고 엉덩이를 하늘로 추켜올린 채 사방에 물을 튀겨가며 어푸푸- 어푸푸- 요란하게 세수를 했더랬다. 마침내 나는 어머니처럼 포포- 쪼그려 앉지 않고 아버지처럼 엉덩이를 치켜들고 어푸- 어푸- 세수를 하기로 했다. 내가 그러기로 한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나도 남자였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그런 선택을 하고 어푸- 어푸- 과장되게  세수를 한 순간 나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몇 년 뒤 둘째도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어푸- 어푸-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동생이 나를 따라한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 수탁이 물 먹는 자세로 요란하게 세수를 했다. 화장실이 집 안으로 들어오고, 다시 허리높이의 세면대가 생긴 뒤에도 우리는 모두 그렇게 세수를 했다. 어푸어푸- 어푸어푸-. 결혼을 하고 사방에 물이 튄다고 아내에게 등짝을 맞고서야 나는 겨우 물장구질을 멈추고 포포- 세수를 했다. 생각해 보면 많은 것들이 아버지를 따라한 것들이었다. 내가 사람을 잘 기억 못 하는 것이라든가. 비아냥거리는데 뛰어난 점, 아버지가 WWE를 보듯 내가 UFC를 보는 것도 그렇다.

그러니 어쩌면 내 보기에 딸이 부족하다면 딸을 탓할 일이 아닐지도 모를 일이다. 그게 다 누구를 보고 그렇게 했겠는가. 다 부족하고 모자란 아빠를 보고 배웠으리라. 당연히 내가 내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딸도 그랬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왜 더 열심히 하지 않았나, 서운한 마음도 없 터이다. 딸을 부족하다고 속상해하는 것이 아빠로서 지켜봤기 때문이라면, 딸도 아빠를 곁에서 지켜봐 왔으니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알고 있을 터이다. 그러니 내가 속상하다고 하면 딸은 "거 사람 불편하게 하네. 아빠나 잘 살아요." 할지도 모르겠다.


좁은 속으로 딸에게 쏘아붙였던 게 미안하다. 어쩌면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내 모습을 딸에게서 발견하고 짜증이 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장은 고 3 딸의 마음고생을 대신할 수도 없고, 시험을 대신 쳐줄 수도 없다. 그저 바라보며 전전긍긍할 밖에. 내가 조금 더 제대로 된 아빠가 못된 먼저 반성해야겠다. 세수하고 정신부터 차리자. 

어푸어푸- !!

작가의 이전글 참혹해진 <숙영낭자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