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22
<야당>은 나무랄 데 없이 잘 빠진 영화다. 이모개 촬영감독의 촬영도 좋다. 예전처럼 아주 기발하고 놀라운 장면은 없었지만, 연출을 포함한 모든 게 범죄 영화답고 안정적이다. 메인 사건이 들어올 때까지의 유쾌한 전개도 좋다. 이때 형사 오상재가 들어오면서 메인 사건이 시작되는데, 사실 이 부분은 자연스럽다기보다 덜컹거리는 느낌이 좀 있었다. 이건 아마도 사건의 배치 때문인 것 같다. 시간상의 배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예상에서 어긋났다는 뜻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이강수가 소개되면서 야당으로서 일 처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이강수가 어떻게 야당이 되는지 검사 구관희가 등장하는 회상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주인공의 등장과 함께 그의 과거까지 나오면 관객들은 이야기가 주인공 중심으로 흘러가겠거니 생각한다. 그리고 메인 사건은 대개 주인공이 어떤 실수나, 뜻밖의 사건에 봉착하면서 시작되곤 한다.
하지만 <야당>의 메인 사건은 이강수의 잘못이라기보다 검사 구관희의 배신으로 시작된다. 이 사건은 이강수에게 사고가 분명한데, 이 일은 이강수를 따라가지도, 구관희의 시점도 아닌, 형사 오상재의 등장과 함께 그의 관점에서 진행된다. 때문에 오상재의 등장으로 극 전개가 잠깐 덜컹거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들도 역시 주인공급이다. 그러니 이강수의 회상을 메인 사건 뒤에 두면 어떨까? 인물들 간의 무게 균형은 갖춰지겠지만, 이강수의 회상은 이야기를 늘어지게 할 것이다. 아마도 감독은 이 영화에서 인물보다는 사건에 조금 더 초점을 뒀던 것 같다.
사건의 결정적인 증가가 되는 첫 녹화물도, 여주인공이 희생되면서 만든 두 번째 녹화물도 모두 소용이 없어지는 전개도 신선했다. 지금까지 다른 영화들은 대부분 첫 녹화물이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열쇠가 되곤 했는데 <야당>은 이런 점을 비껴갔다. 그리고 마지막 반전으로 나온 카드도 그간 쌓은 빌드업을 깔끔하게 해소하면서 감탄이 나오게 만든다. <엑시트> 이후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재밌는 엔딩이었다.
글을 쓰다 보면 늘 문제에 부딪힌다. 어떤 악당을 만들지? 이 뻔한 소재를 어떻게 비틀지? 이렇게 어렵게 시작을 해결하고 나면, 어떻게 앞의 설정을 해소하고 마지막 반전을 만들지? 무엇으로 카타르시스를 주지? 작가들은 글을 쓰는 내내 이런 설정들로 골머리를 앓는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야당>에는 아주 잘 녹아 들어 있다. <야당>을 보면 계속 “이야기 정말 잘 짰네!” 감탄하게 된다.
어디서 다 본 듯한 설정들. 감방 운동장에서의 벤치 다툼, 한직의 검사가 성공하려 애쓰는 모습, 형사들의 스테레오 타입이며 이 모든 것이 흔해 보이지만 상관없었다. 그걸 모두 보완할 만큼 자료 조사는 무척 꼼꼼하게 되어 있고, 영화에 충실하게 반영됐다. 이건 큰 장점이 분명하다. 정치와 검찰, 언론의 유착을 마약 거래 현장과, 실재 있었던 사건처럼 기시감 있게 엮은 점은 재미를 더한다. 분명 <야당>은 오락영화이고, 그 점에서 모자람이 없는 재밌는 영화다.
그러나 이 나무랄 데 없는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문득 아쉬움이 드는 것이 참 의아하다. 재밌고 신나게 영화를 본 것 같은데 왜 아쉬운 기분이 드는 것일까? 너무 쉼표 없이 몰아쳐서 완급조절이 잘 안됐나? 혹시 야당 이강수, 검사 구관희, 형사 오상재, 혹은 약쟁이 조훈이나 엄수진, 또는 이강수의 친구까지 모두 편집 중에 날아간 부분이 많았을까? 그래서 아쉬운 느낌이 들었을까? 하지만 영화에 군더더기가 없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다른 씬이 더 있을 이유가 없다. 야당이라는 직업이 썩 납득이 안 가서일까? 이 일은 형사가 하는 게 더 신뢰가 갈 텐데, 의심해서 일까? 아니, 아쉬움의 꼬투리는 어쩌면 형사 오상재가 등장하는 첫 씨퀀스에서 시작됐을까?
뭔가 아쉽다.
검찰과 마약, 그리고 정치라는 지극히 현실 반영적 이야기는 우리에게 종종 현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그것이 부담을 준다. 영화를 조금 더 들어 올려 현실감을 줄였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조금 더 오락 영화적 성격이 더했을까? 아니면 반대로 사회 부조리를 더 깊이, 그 비극을 조금 더 현실적으로 다뤘다면 예술적인 무게가 좀 더 생겼을까? 하지만 그건 내 몫이 아니다. 그저 감독은 <야당>을 지금의 이런 영화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현실 반영적이라는 이런 영화의 특징은 관객을 조금 뒤로 물러나 팔짱을 끼고 관전하게 만들기도 한다. 마치 야구를 사랑하고 시합도 너무 재밌지만, 마침 경기장에는 응원하는 팀이 시합하는 게 아니어서 편안하게 팔짱 끼고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로 다시 돌아가 보자. 당신은 대리운전을 하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젊은 청년이다. 그런데 어느 날 대리운전을 나갔다가 차주가 건넨 박카스를 마시고 억울하게 마약사범으로 옥살이를 한다. 그러다 우연히 한 검사의 제안을 받는다. 형량을 반으로 줄여 줄 테니 감방에서 제일 무서운 놈하고 매일 싸우라고. 그렇다면 당신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나라면 무서워서 하지 않을 것 같다. 만일 당신이 검사라면 어떨까? 유력 대통령 후보의 아들을 마약범으로 잡았더니 지검장에게 전화가 빗발친다. 무마하려는 게 분명한데, 당신이라면 그 전화를 받았을까 안 받았을까?
수많은 에피소드가 충실하게 채워진 <야당>은 그러나 이런 쉼표가 없다. 이야기의 템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물의 망설임이 없다는 것이다. 영화 <야당>의 세계에서 마약사범들은 뜬금 귀염을 부리기도 한다. 이것은 이 마약쟁이의 행동에 이유를 담거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캐릭터가 입체적이어서도 아니다. 그저 그 자리에서 자기 맡은 역할을 잘하고, 맡겨진 기능을 잘하는 “등장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마약범도 검사도 야당도 그 외 모든 인물이 제 역할을 잘할 뿐이다. 때문에 선택에 거리낌도 망설임도 없다. 당연히 그런 순간도 영화에는 담기지 않았다. 나는 이런 느낌이 아주 강한 영화가 <뺑반>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영화와 나란히 보면 <야당>은 예술 영화다.)
영화 <야당>은 분명 이야기도 속도감 있고 마무리까지 매끈하게 잘 빠졌다. 이 정도 해놓으면 2그램쯤 더 넣는 인물의 고뇌나 갈등, 선택의 갈림길에서 우물쭈물하는 모습 정도는 간과되기 쉽다. "이런 오락영화에서 그런 게 왜 필요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나무랄 데 없는 영화에서 나는 바로 이 부분이 아쉽다. 등장인물들이 선택의 순간에 하는 고민과 갈등을 관객도 느낄 수 있었다면, 그저 관전만 하는 관객으로 남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이 점이 아쉬웠다.
이즈음엔 극장에 가는 일이 좀 서글프다. 평일 낮에 가면 텅 빈 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보는 일이 흔하다. 평일에는 거의 무인으로 운영되는 듯하다. 그래서 간혹 어떤 개봉영화는 시사를 위해 극장을 통째로 빌리려 했는데, 극장 측에서 직원이 없어 안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번에 <야당>은 주말에 보러 갔는데 역시 극장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활기차게 오가는 사람도, 분주하게 울리는 매점 호출 벨 소리도 없다. 극장에 사람이 많던 시절에는 극장의 낮은 조도가 차분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줬던 것 같은데, 지금은 스산하고 마치 유령의 집에 들어가는 기분을 준다. 단관 개봉 시절 암표를 사서 <백 투더 퓨처>를 보고, 멀티플렉스가 생기고, 동네 재개봉관이 사라지고, 필름 영사가 디지털 투사로 바뀌었다. 단일 품종이 된 바나나가 바이러스에 전멸당하듯, 이 화려했던 멀티플렉스도 코로나바이러스에 귀신의 집처럼 변했다.
어쩌면 <야당>은 시나리오가 나왔을 때, 투자사는 자신들이 알고 있던 대박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고 흥분했을지도 모르겠다. 익숙하지만 다른 전개, 누구나 끝을 알 것 같지만 반전까지 갖춘. 분명 십수 년 전부터 나도 귀가 따갑게 듣던 그 성공의 조건들을 이 영화는 “아쉽지만” 다 가졌다.
하지만 세상에는 원래 그랬던 것은 없다. 영원한 것도 없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모두 변하기 마련이다.
극장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