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14
날을 잘못 잡은 것 같다. 연초에 생일 선물로 받은 책인데 12월의 비상계엄으로 즐거울 수가 없었다. 억지로 즐거우려고 이 책을 열심히 본 적도 있지만, 결국 한동안 손을 놓아야 했다. 이 책은 12백 페이지가 넘는 가공할 두께를 자랑한다. 어떤 댓글에는 이 책을 유쾌한 벽돌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그렇다. 벽돌을 보고 웃기는 웬만해서는 힘든 일이다. 게다가 아무래도 과문한 탓인지 나는 도통 웃질 못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영국산(産) 이야기들은 내게 늘 좀 까다롭게 다가왔다. 워킹타이틀이 흥할 때도 나는 그중 몇 개만 흥겹게 볼 수 있었다. 영국인들의 유머는 묘하게 나와 코드가 어긋나는 모양이다. 그 유명한 <새벽의 황당한 저주>도 황당하다는 부분만 동의가 되고 이상하게 웃을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이런 일은 영국 드라마도 그렇다. <years and years>도 <셜록 홈스>도 이번의 <소년의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는 제법 영민(?) 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이상하게 영국만 가면 찐따가 되는 기분이다.
이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도 마찬가지이다. 책을 읽으면서 웃어야 할지 무릎을 쳐야 할지, 아니면 한 번쯤 책을 덮고 생각을 해봐야 하는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 책을 생일 선물로 사달라고 한 이유는 조금 엉뚱하다. 이 소설은 2005년에 영화로 만들어졌고, 나는 이 영화를 정말 신나게 봤다. 전혀 색다르고 우스꽝스럽고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우울증에 걸린 로봇 마빈이 너무나 좋았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나오는 “지구가 망한다고 경고했지만.... 안녕. 그동안 물고기는 고마웠어.“ 하는 돌고래의 노래부터 정말 빵 터졌었다. 그런데 1년 전쯤 렉스 프리드만이 엘런 머스크와 인터뷰를 할 때 이 소설 이야기가 잠깐 나왔다. 그래서 그때 소설을 사려고 했지만 너무 비쌌다. 결국 조르고 졸라서 생일 선물로 이 책을 손에 쥐었던 것이다.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1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선 갑자기 보고인이 지구를 파괴하면서 지구인 아서는 포드라는 외계인 친구와 히치하이킹을 시작한다. 그들은 머리 두 개에 손은 세 개인 우주 대통령 자포드와 지구 여성 트릴리언, 로봇 마빈과 온갖 곳을 돌아다닌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 그렇게 다니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2부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은 (읽기가 더 힘들었다) 시공간이 뒤죽박죽 뒤엉키면서 온 우주가 몇 번이나 멸망하는 이야기다. 3부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서는 우주를 파괴하는 종족과 크리켓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 이르러 거의 자포자기. 눈은 읽고 있지만 읽고 있는 게 아니야) 4부 <안녕, 그리고 물고기들은 고마웠어요>는 아서가 유사 지구에서 지구 종말을 기억하는 펜처치라는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다. (오오- <백년의 고독> feel이 살짝!) 5부 <대체로 무해함>에서는 어느 행성에서 딸과 가까워지고자 노력하는 아서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서가 펜처치와 사랑을 나누는 4부와 우주 대통령과 사귀던 트릴리언이 갑자기 나타나 딸을 맡기고 가는 5부는 앞 편의 이야기들 보다 훨씬 읽기 쉬웠다. 이 소설을 보면서 빵 터진 유일한 장면도 여기에 나온다. 아서는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 온 우주를 여행한다. 그때 여행 경비를 얻기 위해 자신의 생체 정보를 파는데 그중에는 정액도 있었다. 그리고 아이를 갖고 싶던 트릴리언은 아서의 정액으로 딸을 낳는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딸을 감당할 수 없자 아빠에게 데리고 온다. 정액을 판 것뿐인데 딸이라니. 이것도 황당한데 트릴리언은 딸의 이름을 자그마치 "랜덤"이라고 지었다. 아이는 갖고 싶고, 그래서 그냥 있는 거 써서 낳았어.라는 듯. 나는 정말 이 부분에서 빵 터지고 말았다. 랜덤이라니... 정말 짓궂다.
아서가 갑자기 나타난 딸과 친해지려 노력하는 제5부의 이야기는 그래서 보편적이라 잘 읽혔다. 이 소설에는 정말 굉장한 대사들이 많이 나온다. 인생과 우주의 비밀은 무엇인가? 전 우주에서 두 번째로 뛰어난 컴퓨터는 대답한다. ”42“라고. 이 알쏭달쏭 한 대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덧없다는 뜻인 것 같기도 하고, 그것도 아니라면 마침 이 글을 쓸 때 작가 더글러스가 42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소설 내내 42가 언급되지만 그건 난 모르겠고,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난다.)
”일어나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라던가, 생명의 창조주가 피조물들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불편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라는 등은 정말 그 호기로움에 기가 찰 지경이다. 유일한 내 문제는 이걸 보고 와! 대박! 하며 호쾌하게 웃어야 할 텐데 웃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나로 말하자면 집안의 유구한 전통이 남을 놀리고 빈정거리는 국가대표 선수급 가풍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초 엘리트적 능력을 가지고도 대체로 영국인들이 하는 이런 개그 앞에서는 왜 정색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보통의 이야기에는 등장인물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어떻게 이루나, 혹은 등장인물이 어떤 상황에 처하고 그것을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는 것으로 대게 이루어져 있다. 이게 모두 짜여진 판이었다고 하면 대중적이고. 이게 모두 필연적이었지만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고 하면 예술에 더 가깝다.
그런데 이렇게 지구가 증발해 버리는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던져 놓고 지구가 왜 망했을까 따위는 그냥 길 내려고 했다며 우연의 영역에 던져 놓는다. 어째서 지구에서 가장 뛰어난 지능을 쥐가 가졌고, 그들은 기껏 우주에서 가장 뛰어난 컴퓨터인 지구를 만들고는 사라질 땐 손을 놓는지. 또 지구의 마지막을 경고해 온 돌고래들은 지구 멸망 직전 지구를 떠나는데, 왜 우리가 알아듣게 말하지 않았는지. 왜 지들만 떠났는지... 소설이 진행되면서 생기는 이런 질문들은 전혀 엉뚱한 이야기와 난데없는 사건으로 계속 덮으며 진행된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소설 기법이 있다. 그래도 이런 종류의 소설은 보편적인 은유를 찾을 수 있고, 당연히 인물의 사연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 때문에 이 혼란하고 거대한 콜라주에서도 나는 의미를 찾아 그럭저럭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천 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은 읽고도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아, 음식 이야기가 기억난다. 소설에는 은하 최고의 레스토랑이 나온다. 그런데 거기서 음식 얘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천 페이지 넘는 내용에서 음식은 거의 맥주, 소시지, 샌드위치, 맥주, 소시지, 샌드위치, 맥주가 전부였다. 가끔 피자가 나오던가?
그래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면을 말하자면 이렇다. 로봇 마빈이 우주에서 세 번째쯤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수천 년간 주차장 요원으로 일하는 장면. (진심 그 우울이 공감 간다) 아서가 샌드위치 장인으로 심혈을 기울여 샌드위치를 만드는 장면. 그리고 아서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거나, 전혀 쓸데없는 부분에 집중하면 하늘을 날 수 있는 장면도 좋았다.
하지만 소설은 진행되면서 너무 자주, 느닷없이 우주 대통령이 사라지고, 마빈도 갑자기 버려지고, 사랑하던 펜처치도 우주선에 같이 있다 느닷없이 사라진다. 한국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쓰면 "니 아부지 뭐 하시노?" 소리 듣기 딱이다.
사라진 지구를 그리워하며 온 우주를 헤매던 아서처럼 그래도 뭔가 하나라도 건지겠거니 나는 악착같이 이 두꺼운 책을 다 읽었다. 하지만 남는 게 별로 없다. 마치 마침내 아서가 지구에 돌아왔을 때, 지구가 곧바로 보고인에 의해 사라지는 것처럼 허망한 기분이었다.
작가는 이것을 원했을까?
아닌 게 아니라 이 소설은 꽤 긴 기간 동안 쓰여졌다. "지구가 망했는데, 주인공 아서가 수건을 들고 우주선을 히치하이킹해서 살아난다."라는 정신 나간 설정으로 시작해서, 전반부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전개가 계속된다. 하지만 전반부와 달리 뒤로 갈수록 소설은 앞에서와 다르게 던져 놓은 설정을 비교적 논리적으로 귀결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으로 인해 벌어질 법한 개연성 있는 이야기도 나오는 식으로 변화한다. 심지어 이 히치하이킹하는 수건이 사실은 그 안에 칩도 박혀있고, 무슨 철사도 들어 있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소설의 시작에서는 마치 화장실이든 세탁실에서든 수건만 들고나오면 지구 종말에서 살아날 수 있다고 뻔뻔스레 말했던 것과는 결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간 편협한 영국인이었던 애덤스가 보편 인류로 발전을.... ("니 아부지 뭐 하시노?")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처음 소설이 나왔을 때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도 한다. (그래 1978년이면 영국이 좋았던 시절이지, 마아가아릿 대처가 나오기 전이니까. 그럴 수 있겠네.) 하지만 과문한 탓에 나는 이 소설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듯하다.
그래서 내 심정은 이렇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소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비싸도 사 보려고 리뷰를 찾다가 내 글을 읽게 된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을 쓰는 나는 이렇게 말해드릴 수밖에 없다.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