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31
바둑 사제 간의 대결을 그린 이 영화는 당연한 수순처럼 진행된다. 처음에는 제자를 가리키고 그 스승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제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마침내 제자가 모든 패권을 차지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제자에게 지고 좌절했던 스승은 다시 제자를 이기기 위해 돌아온다. 이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가 있을까?
이 영화는 조훈현, 이창호 역을 한 두 배우가 다 한다. 한 명이 북을 치면 다른 하나가 장구를 치고, 하나가 징을 치면 다른 하나는 꽹과리를 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남기철 (조우진 분)과 조훈현의 아내 정도를 빼면 눈에 띄는 배역도 없다. 두 사람의 역할이 숭배의 대상에서 비난의 대상으로 변화하는 것을 (바둑계 기사로 나왔을 내용을) 주인공들을 둘러싼 인물들이 대신하는 정도다. 그렇게 나머지 배역들은 모두 큰 의미 없이 그저 배경처럼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배역을 맡은 조우진 배우가 이병헌과 대국을 두는 장면은 묘하게 재밌다. 이겼다고 생각한 이병헌이 다리를 떨고 딴짓을 할 때 조우진이 무참한 굴욕을 느끼는 표정을 짓는데, 마치 이병헌의 조우진에게 대한 복수처럼 느껴졌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의자에 묶인 이병헌의 손목을 자르던 이우진이 묘하게 겹쳐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화 <승부>에서 두 사람이 펼치는 승부의 드라마는 분명 극적이다. 그래서 감독은, 혹은 작가는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노렸을까? 바둑은 끝없는 승패라는 것? 그것만으로는 제아무리 MBA 농구 명승부나, MLB 명승부를 영화로 만든대도, 실재 TV로 보는 탁구나 컬링 시합보다 나을 수 없다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왜 만들었을까?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조훈현과 이창호라는 인물의 인감 됨과. 천상계 바둑의 신들이 서로를 인정하는 놀라움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였을까?
아주 심플한 스토리에 담백한 전개, 이 영화는 마치 바둑돌만큼이나 더할 것도 덜 것도 없이 잘 다듬어져 있다. 연출도 역시 무엇하나 과한 것도 부족한 것도 없이 잘 조율이 되어 있다. 아마 오롯이 조훈현과 이창호 두 사람에게 집중한 스토리텔링이 그런 효과를 가져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유아인이었다. 그는 연기를 참 묘하게 한다. 우리가 연기를 잘한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에 잘 녹아들어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을 말한다면 유아인은 거기서 한 발 더 나가 있다. 그의 연기에는 무언가가 더 있다. 마치 바늘에 걸린 미끼가 눈앞에서 당겨졌다 풀어졌다 하듯 그래서 끝내 관객의 코가 꿰이는 그런 맛이 있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던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래서 반가웠다.
개인적으로 나는 바둑을 잘 모른다. 그런데도 바둑 이야기를 하는 이 영화는 시종 흥미진진했다. 한순간도 늘어지지 않았다. 이건 이 영화의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이창호가 조훈현을 마침내 극복하기 시작한 순간. 내리 지기만 하던 조훈현이 갑자기 삼베옷을 입고 대국을 한다. 심지어 거의 누워 있는 자세로 건방진 모습을 보인다. 긴장하지 말아야지, 기세로 눌러야지. 스승으로서의 위신을 되찾아야지 하는 조바심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그렇게 여유 있는 척 시침을 떼던 조훈현은 그러나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결국 코피가 터지고 만다. 나는 이 장면이 너무 재미있었다. 이 정도로 고급진(?) 유머를 영화에서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마침내 조훈현이 심기일전해서 다시 돌아왔을 때, 이창호와 다시 대결하는 장면은 정말 좋았다. 서로를 인정하면서도, 또 지지 않겠노라 하는 모습은 뭐랄까…. 아주 엉뚱하지만, 우주 최강이라던 그랜다이저가 위험에 빠졌을 때, 그랜다이저를 구하기 위해 그레이트 마징가가 출동했을 때만큼이나 큰 감격을 느꼈다. 어쩌면 이 장면 때문에 감독은, 작가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바둑에서 우리는 언제나 이길 수 없다. 그가 돌부처이거나 전신(戰神)이라도 패배는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바둑돌을 던지지 않는 한,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는 누구나 끊임없이 승부를 보아야 한다. 그것이 감독, 혹은 작가가 이 이야기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였을까?
비록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도 현실은 이길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 <승부>는 바둑 그 자체만큼이나 심플하고, 격조 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