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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One Battle After Another

by allen rabbit

영화를 보고 제일 처음 떠오른 영화는 1988년 작 시드니 루멧의 <허공 위의 질주>였다. 이 영화는 도피한 반전 운동가의 16년 뒤 이야기이고 <원 베틀 에프터 어나더>는 조직이 붕괴하자 도피한 운동가의 16년 뒤의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관을 나서면서 검색한 것은 영화 속 <프렌치 75> 같은 그룹이 실제로 미국에 있는지였다. 하지만 비슷한 것도 없었다. 20세기 초 노동조합이 굉장히 강한 나라였던 미국은 60년대와 70년대에는 히피와 반전 운동, 흑인 인권 운동을 거치며 민주주의와 다양성의 중심에 있던 나라였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아련한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프렌치 75>라는 단체의 이름은 누가 봐도 프랑스의 68혁명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런 존재는 미국에 없다. 폭탄을 터뜨리고 총을 쏘아대는 이들을 연상하게 하는 실제 사례는 유너바머뿐이었다. 좌파 조직이나 혁명가들은 더 이상 미국에 없다. 영화 내내 <프렌치 75>는 줄기차게 revolution! 을 외친다. 처음에는 머리가 쭈뼛 서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revolution은 선정적이고 설레는 말이었다가, 나중에는 레오가 revolution! 하고 외치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레오는 대마를 피우며 TV로 <알제리 전투>를 본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게릴라의 전투를 그린 영화다. 주인공은 시간만 되면 이 영화를 반복적으로 봤다는 설정일 것이다. 지금 같은 시대에 <알제리 전투>를 보는 도망친 혁명가라니. really?? 그러니 revolution! 소리치면 웃음이 피식 나온다.

감독은 왜 <프렌치 75>라는 상상력을 동원해야 했을까? 랑데부 장소로 나오는 히피족의 유산 같은 대마를 키우는 수녀원은 또 왜 필요했을까?


미국의 여러 가지 상황은 <프렌치 75> 같은 상상이 필요했을 만큼 절실했을지도 모른다. 송곳처럼 이 답답한 상황을 뚫을 어떤 사회운동이 갈급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영화 속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이라는 백인 순혈주의 집단은 소위 ‘딮 스테이트’라는 반대편의 상상력으로 만든 설정인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을 돌파할 송곳이 필요할 만큼 답답한 마음부터, 흑인과의 섹스마저 숙청의 대상이 되는 무식한 백인 순혈주의의 저열함까지. 나는 영화를 보며 한때 문화와 민주주의의 상징이던 미국의 벌거벗은 속살을 본 듯한 불경스러움을 느꼈다. <원 베틀 에프터 어나더>와 비슷한 시기에 <시빌 워>가 만들어진 것도 이런 미국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은 아니었을까?


<원 베틀 에프터 어나더>는 <프렌치 75>와 백인 순혈주의를 배경으로 딸을 찾는 아빠의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엮어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민자들이 닭장 우리 같은 곳에 갇혀 있고, 끊임없이 멕시코 이민자들이 국경을 넘는 미국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이 영화는 마치 한국 영화 같은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도망자 신분이지만, 딸은 너무나 사랑스럽게 컸고, 공부도 잘하고 리더쉽도 있다. 그런 아이를 잃어버린 아빠는 엄청난 무술 실력이 있거나 명사수도 아닌 찌질하고 배 나온 중년이다. 그는 아이들과 지붕을 뛰다 12미터 아래로 떨어져 체포되고, 차에서 뛰어 내려야 할 때는 무서워서 내리지도 못한다. 하지만 이런 온갖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딸을 되찾는다. 그리고 딸은 갑자기(난데없이) 세상 착해진 엄마가 남긴 편지를 읽고. 3시간을 꼬박 달려야 하는 곳의 시위에 참석하기 위해 차를 몰고 나가며 엔딩을 맞는다. 이처럼 정말 많은 코드가 가족애를 부르짖는 너무나 익숙한 한국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배우들의 명연기다. 영화는 퍼피디아가 고가를 걷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나는 이 장면이 너무나 좋았다. 강렬한 인상의 퍼피디아가 후드를 쓰고 고가를 반복해서 오가면, 고가 아래로 이민자들의 수용소가 보인다.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이야기의 본론으로 치고 들어가는 이런 시퀀스가 너무 좋았다. 그리고 레오가 등장한다. 이 집단의 거의 유일한 백인처럼 보이는 레오는 불안과 초조로 쉼 없이 말을 늘어놓는다. 반면 아무런 불안도 두려움도 없어 보이는 퍼피디아는 그런 레오를 귀여워하고 두 사람은 이내 연인관계로 발전한다.


이 영화에서 레오의 연기는 정말 엄청났다. 레오가 학교 선생님과 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특히 내게 인상적이었다. 누구도 그렇게 연기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철부지 아빠가 사회와 기존 질서에 대해 조소하고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딸에 대한 사랑과 은근한 자부심까지 드러내는 이 장면은 자칫 유치하거나 식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오는 이 장면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말 인상적으로 멋지게 해낸다. 나는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너무 좋았다.


<프렌치 75>가 수용소를 습격하는 시퀀스에서 퍼피디아는 레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숀 펜을 만난다. 그는 총을 들이대는 퍼피디아를 비웃듯 쳐다본다. 그녀는 그런 오만한 백인을 굴복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고개를 꼿꼿이 세운 이 오만한 백인에게 퍼피디아는 다른 머리도 세우라고 명령한다. 나중에 두 사람이 관계를 가질 때 퍼피디아는 한 손에 권총을 든 채 숀 펜을 농락한다. 숀 펜은 굉장한 흥분을 느끼며 그런 행동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영화 속에서 숀 펜은 이런 오만한 지배 욕구와 기꺼운 굴종의 모습을 줄기차게 보여준다. 악당인 그의 행동과 태도는 굉장히 불쾌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오히려 배우 숀 펜이 너무나 멋지게 기억에 남는다. 그야말로 명불허전이다.


숀 펜의 부대는 마약을 핑계로 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시위대처럼 위장해서 화염병을 던지는 군인의 모습은 정말 말문이 막혔다. 마치 지금 미국에서 트럼프가 ICE를 동원해서 벌이는 일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프렌치 75>는 16년을 조직으로 살아남아 있었다. 하나씩 잡혀갔고, 누구든 잡힌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을 불었는데도 그렇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위해 총을 쏘고 폭탄을 터뜨리고 은행을 터는지 막연하기만 하다. 그저 이 조직은 살아남기 위해 계속 “원 배틀 에프터 어나더”를 하고 있을 뿐이다. 기지국 역할을 하던 조직원이 바운티 헌터에게 잡혀가자 동네 멕시칸 꼬마들은 이 사실을 대신해서 조직원들에게 알리고, 레오의 딸 윌라는 이 끔찍한 모험 끝에 기꺼이 시위에 참여한다. 이들은 이렇게 세대를 이어가며 ‘원 배틀 에프터 어나더’를 한다.


숀 펜은 백인 순혈주의 모임에 들어가고자 애를 쓴다. 그래서 자신의 오점인 윌라를 제거하려 한다. 그는 바운티 헌터에게 윌라를 넘기며 말한다. 모든 게 “산 넘어 산”이라고. 그리고 마지막 엔딩 추격 씬도 끊임없는 언덕이 계속되는 도로에서 펼쳐진다. 그렇게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원 베틀 에프터 어나더> 속에 살고 있다.

영화는 아련한 80, 90년대 필름 룩을 가지고 있다. (아나모픽 필름으로 찍었다고 한다) 거짓말인 <프렌치 75>도, 한숨만 나오는 미국의 실제 상황도 모두 아련한 옛날이야기처럼 보였으면 했던 것일까? 실제 비슷한 사례도 없는 상상 속의 <프렌치 75>를 가져와서 미국의 발가벗은 상황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일까? 그렇다기에는 시위에 기꺼이 나가는 딸의 엔딩은 너무 나이브 하다. 어째서 <프렌치 75>가 필요했고, <원 베틀 에프터 어나더>는 어떤 싸움을 말하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늘 뉴스를 보자. 미국 국방 장관은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를 만나면서 러시아 국기를 상징하는 넥타이를 매고 상대국 대통령을 조롱한다. 설사 현실에 <프렌치 75>가 있다고 해도 지금 같은 이런 막장으로 치닫는 미국은 치유가 불가능할 것만 같다. <원 베틀 에프터 어나더>를 하더라도 요원하기만 해 보인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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