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and Meat
어떤 사람의 의지였을까? 영화 <사람과 고기>가 완성될 수 있었던 공은 누구에게 있을까? 감독? 제작자? 배우? 작가? 투자자? 누구였을까? 누구의 어떤 의지였을까? 나는 처음에 제목이 무척이나 마음에 거슬렸다. 이토록 흉한 제목이라니. “사람과 (물)고기”도 아니고 “사람과 고(대)기”도 아니고, 사람과 “고기”라니. 영화를 보고도 흉했던 첫인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혼자 살며 폐지를 모으는 노인인 우식과 형준은 폐지를 두고 싸우다 화진이라는 할머니에게 타박을 듣는다. 그렇게 서로 알게 된 세 사람은 함께 식사를 하게 된다.
고기를 먹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외로운 노인이 혼자 고기를 먹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요즈음 혼밥이 대세라지만 나이 든 사람일수록 식당에서의 혼밥은 쉽지 않다. 게다가 혼자 고기를 먹으러 간다는 것은 이들에게는 화성 탐사선에 타는 것만큼 낯설고 어려운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나이는 먹기 싫지만 고기는 먹고 싶다.” 그래서 고기를 먹겠다고 의기투합한 세 노인은 연쇄 무전취식에 도전한다. 고기를 먹는 행위는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위로가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일탈은 흥미롭고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래도 여전히 제목은 숭허다)
우리가 흔히 길에서 마주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이라 낯설지 않은 설정과 배경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들이 겪을 법한 죽음과 가족의 문제를 격정적이거나 신파적이지 않게 담백하게 담아낸다. 영화 속에서 형준은 차들이 경적을 울리거나 말거나 리어카를 끌고 무법자처럼 도로를 다닌다. 그런데 영화 초반에 그러는 모습을 볼 땐 거리에서 마주치는 노인들이 떠올라 답답하다가, 후반부에 다시 형준이 그럴 땐 마음이 짠하다. 얼마나 힘이 들까. 얼마나 외로울까 그들의 고단함이 이해되기 때문이다. 외로운 노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영화 <사람과 고기>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돈이나 뜯어내던 화진의 유일한 피붙이 손자는 또 불쑥 찾아와 군대에 간다고 말한다. 그리고 말한다. “할머니 예전처럼 한번 안아 볼까?” 화진은 아무 말 없이 눈물을 참으며 손자를 포옹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속수무책으로 눈물이 흘렀다. 과연 화진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은 화해의 포옹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힘든 시간이 아직도 길게 남아 있다는 것을. 그러니 미움이든 원망이든 그저 꾹꾹 누른 채 이별의 포옹을 하는 것이다.
나의 외할머니는 깔끔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랬던 할머니가 이제 늙어서 지저분해졌다고 내게 흉을 보곤 했다. 그러던 어머니는 할머니가 되었다. 80이 넘은 아버지의 앞섶은 돌아서면 지저분해진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앉을 때마다 식탁을 닦지 않는다. 노안 때문에 더러운 게 전보다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늙어간다.
나이 들고 혼자가 되면 사람은 지저분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몸에서 냄새도 나게 되고 사람들이 피하게 된다. 그리고 고기 먹으러 가기도 쉽지 않아진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심장도 뛰지 않게 될 터이다.
<사람과 고기> 덕에 그들이 손수레를 끌고 내 차 앞을 막아도 기다려 줄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그렇게 내가 그들을 넉넉히 이해하게 된다면, 언젠가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 또 다른 누군가도 나를 넉넉히 기다려 줄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를 만들고자 한 사람들의 의지도 여기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뱀발. 고령임에도 세 배우의 딕션이 너무 잘 들린다. 우리 영화는 배우의 딕션이 잘 안 들리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는데 이 영화는 신기하게 그런 게 없다. 저예산 영화일 테니 후시 같지만, 또 한편으로 이 분들의 연기 공력을 생각하면 동시로 한데도 시간이 더 들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더욱 후시인지 동시인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어쨌든 세 분 모두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