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원

음악극, 국립극장

by allen rabbit

클로즈업은 정말 위대한 발견이었다. 뮤지컬을 볼 때마다 영화쟁이인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뮤지컬은 클로즈업 없이 다른 방식으로 서사를 쌓는다. 관객은 클로즈업이라는 가이드 없이 무대를 통째로 읽어야 한다. 나는 여전히 그 방식이 낯설다.


음악극 <공생,원>은 일제 강점기 목포의 아동복지시설 “공생원”의 실화를 다루고 있다. 범치라는 공생원 출신의 사내가 몽골의 고아들을 위해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에서 과거 윤치호와 윤학자가 어떻게 아이들을 지켰는지 추억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기독교 전도사인 윤치호는 어린 고아들을 거두어 생활하면서 공생원을 시작한다.

해방이 됐을 때는 윤학자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비난받았고, 전쟁이 터지자 윤치호는 아내를 반동분자로 고발하라는 인민군의 강요를 받기도 한다. 그 뒤 광주로 돈을 구하러 떠난 윤치호는 행방불명이 되고, 윤학자는 남편을 대신하여 고아들을 돌본다. 일제 강점기에는 윤학자가 일본어를 가르쳤고, 해방 후에는 아이들이 한글을 가르치는 행복한 “공생원”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들 윤기는 엄마를 독점하고 싶지만, 원생 아이들에게 상처가 될까 윤학자는 아들을 달랜다. 하지만 장성한 아들은 부모가 걸었던 길을 걷고, 원생이었던 범치 역시 몽골의 고아들을 구하는 일을 한다.


언젠가 한동안 뮤지컬 대본을 쓰려고 애를 쓴 적이 있었다. <켓츠> <시카고> 등 내가 보았던 뮤지컬은 쉽게 공감이 가지 않았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영화 같은 영상매체와 다른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클로즈업이라고 생각했다. 영상매체는 강조하고 싶은 부분들을 언제든 클로즈업할 수 있다. 대본에 아예 그렇게 하라고 써넣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아도 커트 등을 통해 얼마든지 강조할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한 매체를 위해 대본을 쓰는 것과 그럴 수 없는 뮤지컬 대본의 문법은 많이 다르다. 물론 뮤지컬도 배우의 행동이나 음악으로 중요한 부분을 강조할 수도 있다. 또 독백, 방백, 코러스가 클로즈업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나는 뮤지컬의 서사가 강조하는 지점을 자주 놓치곤 한다.


<공생,원>을 보며 클로즈업이 아쉬웠던 이유는 작가의 의도를 읽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공생,원>은 기억에 남는 멜로디도, 흔히 주인공의 테마라 부르는 곡의 반복도 없다. 갑자기 중간에 윤치호가 사라지지만, 아내 윤학자는 그를 기다린다거나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공생원”의 아이들을 건사하느라 두 사람이 어떤 고생을 했는지도 나오지 않는다. 뚜렷한 프로타고니스트나 안타고니스트도 없고, 초반에 시대적인 폭력과 억압에 대한 설명을 제외하면 “공생원”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도 거의 다루지 않는다. 윤치호의 실종, 윤학자가 겪는 어려움, 아이들의 슬픔이 구체적인 테마송이나 합창으로 반복되었다면 어땠을까? 분명 관객의 공감을 더 높였을 텐데, 그렇지 않아 아쉬웠다. 어쩌면 처음부터 <공생,원>은 따뜻하고 착하고 소란하지 않은 음악극을 지향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클로즈업이 없는 뮤지컬을 즐기는 감수성이 떨어져서일지도 모르겠지만, <공생,원>은 내게 그다지 흥미로운 음악극은 아니었다. 다만 한가지, 이 음악극이 특별했던 것은 “배리어 프리(barrier-free)”를 적용했다는 것이다. 극이 시작되기 전에 시각장애인을 위해 무대의 크기와 여러 소품을 설명한다. 그리고 연극 전반에 수화 통역사들이 배우 옆에 나란히 서서 수화 통역을 하는 것이다. 처음엔 참 낯설었는데 극이 진행되면서 자연스레 녹아들어 나중에는 전혀 어색하지 않은, 색다른 경험이 되었다. 착하고 따뜻한 내용을 배리어 프리의 형식으로 진행하는 음악극. 장애를 극복하고 어려움을 함께한다는 “공생”. 이 음악극이 관객들 사이를 돌고 돌아 다시 “공생”의 의미를 반복하는 “원(circle)” 곧 <공생,원 共生,圓>이 된다. 그것이 작품이 의도한 진짜 의미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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